팔레스타인·이스라엘/06년·09년 팔레스타인

40_사람을 가슴에 묻는다는 거

순돌이 아빠^.^ 2010. 4. 4. 12:39

 

(2009년 팔레스타인 갔던 이야기를 늦게나마 쓰기도 하고 고치고도 있는 글)

 

팔레스타인, 내 가슴에 물든

 

40_사람을 가슴에 묻는다는 거

 

세바스티아는 3천여 명이 사는 시골 마을이고 가까운 곳에 나블루스라고 하는 큰 도시가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시장을 간다거나 병원에 간다거나 할 때 나블루스로 많이 나갑니다.

 

또 여기 친구들은 나블루스에 있는 알 나자 대학을 많이 다닙니다. 서로 언제 자기 학교에 놀러 올 거냐고 해서 오늘은 니달을 따라 알 나자 대학 구경을 갔습니다. 니달이 저를 람지한테 넘겨주고(?) 일하러 갔다가 다시 만나기로 한 거죠.

 

알 나자 대학 입구 모습

 

학교 입구에서 약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학교 학생이 아니면 못 들어가게 하더라구요.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스라엘이 어딘가를 못 들어가게 한 일은 있어도 팔레스타인인이 외국인한테 굳이 어디를 못 들어가게 하는 일은 잘 없었거든요.

 

니달이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에게 이런 저런 사정을 얘기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출입문 앞에 검색 기계가 설치되어 있더라구요. 공항 같은데 가면 몸에 쇠붙이 하면 삐익 하고 소리 나는 기계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곳곳에 설치해 둔 기계가 여기도 있더라구요.

 

웬 일인가 사정을 들어보니 학교 안에서도 총격 사건이 있었고, 학생들도 파타와 하마스로 나뉘어서 싸우는 일이 벌어진 거죠. 그래서 학교 측에서 출입을 까다롭게 만든 겁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마음 아프더라구요.

학교에 들어가니 한국의 대학과 비슷합니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식권을 사서 식판에 음식을 받아오는 모습이 한국의 대학과도 같았습니다. 밖에서 먹는 것에 비해서 값이 싸다는 것까지요. 건물 생긴 거나 단과 대학이 나눠져 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 등등.

 

북적거리는 알 나자 대학

 

첫 번째 차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저에게 꽂힌다는 거지요. 복도와 계단 곳곳에 학생들의 책과 공책이 쌓여 있었습니다. 람지에게 이게 웬 거냐니깐 들고 다니기 무거우니깐 이렇게 아무 곳에나 두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여기는 이슬람 대학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하고 성직자가 되거나 하는 거지요. 이슬람 대학 쪽에 가니깐 역시 수염을 기른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람지가 수업 시간이 다 돼서 저는 한 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세바스티아에 축제가 있어서 놀러 왔던 학생인데 자기 연락처를 적어 주면서 자기 대학에 꼭 놀러 오라고 했던 학생입니다. 전화를 걸고 가보니 본관에 학교 홍보처 비슷한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외국인들한테 나블루스나 학교 안내도 하도 그러더라구요.

 

차마 묻지 못했던 이야기

 

니달이 일을 마치고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학교와 나블루스 사이를 오가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죠. 거기서 위즈단, 위즈단 여동생 나딜을 만났습니다. 위즈단이 교육부에 볼 일이 있었거든요.

 

약혼한 위즈단과 니달이 앞에서 걷고 나딜과 제가 뒤에서 길을 걸으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얘기를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위즈단과 다른 여동생 마라도 그렇지만 낯선 남성이라고 해서 멀뚱멀뚱 하지 않고 나딜도 아주 얘기를 잘 합니다.

 

길을 걷다 나딜이 흥얼흥얼 노래를 합니다. 그러더니 곧 멈추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여자들은 길에서 노래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보고 몇 살이냐고 하기에 서른일곱이라고 하니깐 자기보다 딱 10살 많다며 웃었습니다. 나딜은 나블루스에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어서 매일 세바스티아와 나블루스를 오가더라구요. 제가 언제 나딜의 학교에도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구요.

 

결혼 했냐 애인 있냐 이런 얘기가 오가는데 나딜이 갑자기 ‘사람을 가슴에 묻는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에요’라고 하더라구요. 뭔가 좋지 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궁금하기는 하지만 더 묻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 나딜이 자기는 결혼을 했었는데 남편이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당사자한테 언제, 어떻게 죽었냐고 묻기가 어려워 또 그냥 아무 말 못했습니다.

 

세바스티아에 있는 로마 유적지

 

일을 마치고 넷이서 함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위즈단이  웃으며 자기 동생하고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결혼해서 팔레스타인에서 살라구요. 니달도 옆에서 덩달아 거듭니다. 팔레스타인에 와서 수도 없이 들었던 얘기가 결혼 했냐와 안 했다고 하면 팔레스타인 사람과 결혼하라는 얘기였습니다. 당사자가 있는데 직접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었구요.

 

순간,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구요.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싫다고 할 수도 없구요. 그래서 팔레스타인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없는 3가지 이유를 얘기 했습니다.

 

첫째는 제가 아랍어도 못하고 직업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러자 위즈단과 니달이 미니는 지금도 아랍어를 잘 하니깐 금방 배울 거라고 하면서 직업은 니달이 선생님이라서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제가 무슬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무슬림 남성은 비무슬림 여성과 결혼할 수 있지만 여성 무슬림은 꼭 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해야 합니다. 둘의 대답은 그거 까짓것 문제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서류에다 무슬림이라고 적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제가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화에서는 집을 포함해 결혼에 드는 모든 비용을 남성이 대야 하고, 결혼할 때 상대 여성에게 현금과 금을 선물로 줘야 하거든요. 그러자 위즈단과 니달이 그 돈은 자기들이 마련해 주겠다고 합니다. 아이쿠야!!! 저와 마주 보며 앉아 있던 나딜도 웃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함께 했습니다.

세바스티아로 돌아와 YDA 사무실에서 위즈단에게 조심스레 나딜의 남편이 죽었냐고 물어 봤습니다. 위즈단이 살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하기에 아까 나딜이 얘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위즈단(왼쪽)과 니달(오른쪽). 가운데 아이가 아빠를 잃은 나딜의 아들

 

위즈단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8년 동안 깜빵에 있던 나딜의 남편은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의 포로 교환 때 깜빵에서 나와 나딜과 결혼을 했습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있는 조직인데 붙잡고 있던 이스라엘 포로와 맞교환 하면서 팔레스타인 수감자의 석방까지 함께 요구 했었거든요.

 

깜빵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나딜과 결혼을 했었고, 결혼한 지 얼마 있지 않아 이스라엘군에게 총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저도 본 적이 있는 귀여운 꼬마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빠가 죽을 때 5개월 째였다고 하네요. 아이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가끔은 할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기도 하고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위즈단 가족은 엄마 아빠 그리고 10남매입니다. 결혼한 몇몇은 외국이나 다른 곳에서 살고 있고, 초등학생 막내를 포함해 나머지 식구들이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결혼했다 돌아온 딸과 손자와 함께요. 이 가족이 살아온, 살고 있는 얘기만으로도 영화 한 편이 되지 싶습니다.

 

 

위즈단이 나무 열매를 먹고 싶다고 해서 나무에 오르고 있는 디라르. 디라르는 곧 위즈단의 시동생이 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