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15-이스라엘 건국은 팔레스타인에 발전을 가져왔다?

순돌이 아빠^.^ 2010. 6. 13. 11:42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이스라엘 건국은 팔레스타인에 발전을 가져왔다?

 

1) 시오니즘과 인종주의

 

‘사람은 그와 피가 다른 사람들에게 동화될 수 없다. 그가 동화되기 위해서는 혈통을 바꿔야 한다. 혈통에서 그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종족과의 결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인종의 순수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국민적 통합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땅을 가져야 하고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은 인종적으로 순수한 주민이 되어야 한다.’ - 이스라엘 건국에 앞장 섰던 야보틴스키의 말, 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2003, 38쪽에서

 

민족의 내적 소질은, 외적 영향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든지 항상 그 양식을 결정한다. 어느 민족에게는 기아를 초래하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강인한 노동을 가르치기도 한다. 과거의 위대한 문화는 모두 원래 창조적이었던 인종의 피가 불순해짐으로 인해서 사멸한 것이다. - 히틀러의 말,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홍신문화사, 1996, 138쪽

 

인종주의적 입장에서 유대인을 유대인이라고 규정한 것이 반유주의자들입니다.

 

‘이 과정은 인종 프로젝트들(racial projects)에 의해 펼쳐지는데....인간의 육체와 혈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난 의미 체계들에 의해 그려진 경계선들을 따라 사회적 선을 분배하는 것이다’, 폴 C. 테일러, [인종 - 철학적 입문], 서광사, 2006, 6465쪽

 

‘이러한 결론은 사르트르를 상기시킨다. “유태인들이라는 이름은 유태인들 스스로가 지칭한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지정해 준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진실이다. … 유태인들을 창조한 사람은 바로 반유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118쪽

 

그리고 야보틴스키가 주장하는 ‘유대 민족에게 유대 국가를’ ‘유대인의 순수한 피’와 같은 주장은 ‘게르만 민족에게 게르만 국가를’ ‘게르만 민족의 순수한 피’와 같은 반유대주의와 같은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특정한 집단에 대한 억압을 사회 혁명이나 시민적 권리의 확보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민족이 지배하는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즉 유대인 학살을 피해 이스라엘을 건국해야 한다는 시오니스트의 주장과 유대인을 학살했던 반유대주의자의 주장이 흐름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노먼 핀켈슈타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 돌베개, 2004, 6667쪽 참고)

 

 

우리는 근대의 인종차별적 부정의의 희생자들이 흔히 억압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투쟁 속에서 인종적 사고를 오히려 이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도 있다. - 폴 C. 테일러, [인종 - 철학적 입문], 서광사, 2006, 6364쪽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해 볼 수 있는 질문은 시오니즘이 인종주의적 경향을 띄고 있다고 해서 시오니즘을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시오니즘=인종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오니즘 안에도 종교 시오니즘, 노동 시오니즘, 수정 시오니즘 등 다양한 경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오니즘 자체를 인종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야보틴스키나 수정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인종주의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종교 시오니즘의 경우는 신학적 환상을 기반으로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향과 신의 구원을 중심으로 시오니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잭 실버스톤(Jack Silverstone) 같은 사람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이스라엘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시오니즘이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은 다문화, 다인종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시민과 주민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왔습니다. 6백 만 명의 이스라엘 시민 가운데 1백 만 명은 아랍 무슬림이거나 기독교인이고, 여기에 더해 두르즈, 체르케스, 사마리아인과 같은 여러 가지 소수자들도 함께 있습니다.’, Steven Salaita, [Anti-Arab Racism in the USA], Pluto Press, 2006, 148쪽

 

‘인종주의적 발상은 단순히 체질적인 측면에 의거하여 사람들을 구분하거나 범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과 결합하여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종종 종족이나 민족의 개념과 중복되고 대체되기도 한다.’, 김광억 외, [종족과 민족 - 그 단일과 보편의 신화를 넘어서], 아카넷, 2005, 20쪽

 

그런데 혈통이나 피를 가지고 인종주의를 규정하지 않고 지역이나 문화와 같은 요소를 포함해서 인종주의를 규정할 경우에는 시오니즘을 인종주의로, 이스라엘을 인종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지 구매의 경우 이스라엘은 자국의 시민권을 가진 아랍인들은 토지를 살 수 없고, 유대인만 토지를 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시오니스트들이 가져온 ‘발전’이란 것 또한 인종주의 프로젝트에 따라 아랍인들을 차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 이스라엘이 가져온 발전

 

이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다수 민족이 되었다. 1900년 말까지 팔레스타인은 돌과 선인장이 사막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던 황무지였다. 이제 이 땅은 현대 농업 및 공업 국가이고 그 사막에는 풍요로운 농지가 곳곳에 있고 아름다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어디에서 이런 변화를 주도한 과학적 농부, 산업 노동자, 경영 전문가들이 온 것일까? - 맥스 디몬트, [이스라엘 역사 사천년],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378379쪽

 

식민주의자들이 자신을 정당화 하는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식민지에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시오니스트 또는 일부 학자들이 얘기하듯 팔레스타인이 그야말로 문명과 문화라고는 없는 황무지였는지, 또 유대인들이 가져왔다는 발전의 이면은 무엇인지 등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먼저 유대인 사상가인 애셔 긴스버그(Asher Ginzburg)가 1891년에 쓴 ‘팔레스타인의 진실(Truth from Palestine)’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는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이 그 어떤 작물도 재배할 수 없는 황량한 사막이며, 그곳에서 땅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나 뜻하던 대로 땅을 살 수 있다고 믿곤 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땅 전역에서 경작되지 않고 놀고 있는 땅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해외에 있는 우리는 아랍 사람들이 사막 출신의 야만인들이고, 짐승처럼 무지하며,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믿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에 불과하다. 아랍 사람들은 셈 족 사람들[우리 유태인들]처럼 날카로운 정신을 소유하고 있으며 매우 명민하다. - 타리크 알리, [근본주의의 충돌], 미토, 2003, 178쪽

 

시오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발전’을 기준해서 보자면, 1881년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약 457,000명으로 이 가운데 무슬림이 400,000명, 기독교인이 42,000명, 유대인이 13,000~20,000명 정도로 다수의 문명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의 70%가량이 농촌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근대화와 도시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1869년에 최초로 자파와 예루살렘을 잇는 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892년에는 역시 자파와 예루살렘을 잇는 철도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1903~1905년 사이에는 하이파와 데라아(Deraa)를 잇는 두 번째 철도가 만들어졌습니다. 1842년에는 처음으로 약국이 문을 열고 1843년에는 유럽식 병원이 예루살렘에 들어섰습니다.

 

정치와 행정의 측면에서 보자면 1831~1840년까지 이집트 점령 시기를 빼면 1차 세계대전까지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영토 구분이 생긴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1870년대 팔레스타인은 시리아의 일부로 다마스커스에 있는 총독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크게 아크레(Acre), 나블루스(Nablus), 예루살렘 등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각 지역은 지구 행정관이 관리하는 하위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예루살렘을 예로 들어 보자면 1840년 11월, 영국-오스만 투르크 연합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를 몰아낸 뒤 오스만 투르크 정부는 영국 등 유럽 국가들과 ‘외국인 거류 협정’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 협정의 결과로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두게 됩니다.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예루살렘], 그린비, 2002, 165쪽 참고)

 

 

그리고 1877~1878년까지는 1명을, 1908~1918년까지는 3명의 대표를 오스만 투르크 의회에 대표로 보냅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교육, 언론, 각종 클럽, 정치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Rashid Khalidi, [Palestinian Identity], Columbia, 1997, 35쪽 참고)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황무지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아니라는 것은 시오니스트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테오도르 헤르즐의 경우도 ‘유대인 국가’에서 자신들의 계획이 진행되면 원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고 해당 정부는 유대인의 유입을 막으려 나설 거라고 예상 했습니다. 만약 시오니스트들의 주장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 인구가 희박하고 비정치적이었다거나(‘Zionism - An Introduction', 이스라엘 외무부 홈페이지, http://www.mfa.go.il 참고) 팔레스타인이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이었다면 (‘이스라엘 : 역사’,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 http://seoul.mfa.gov.il 참고)  굳이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과 같은 기구를 만들어 보다 많은 경작지를 사들이려고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결국 팔레스타인을 황무지로 표현하거나 ‘땅이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이 없는 땅’과 같은 주장은 식민주의자들이 자신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아메리카는 ‘신’대륙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예전에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아도 자신의 문명을 가지고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북아메리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면서 ‘그들은 땅이 있어도 농사를 짓지 않는다. 하느님이 주신 땅을 그대로 버려 둘 수는 없다’고 하면서 땅을 차지해 가던 과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 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 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 (‘이스라엘 : 역사’,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 http://seoul.mfa.gov.il 참고)

 

식민주의에 대해서 얘기할 때 늘 나오는 것이 ‘발전’에 관한 것인데, 그동안 식민주의자들은 공장 몇 개, 철도 노선 몇 km 식으로 발전을 규정해 왔습니다.

 

 

‘식민주의자들은 내게 사실을, 통계학을, 몇 마일에 이르는 신작로를, 운하를 그리고 철도를 들이민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콩고의 수도 브라자빌에서 뽀엥-누아라는 항구 도시에 이르는 철도를 놓는데 동원된 기천의 민중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사이, 맨 손으로 아비잔 항구를 건설하고 있을 노동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들의 고유한 신, 땅, 관습, 그리고 삶, 즉 춤을 즐기는 삶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삶으로부터 철저하게 유리된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에이메 세제르, [식민주의에 관한 담론], 동인, 2004, 37쪽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사례만 봐도 시오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발전’의 이면은 강제추방, 살해, 강간, 토지 몰수 등으로 얼룩졌습니다. 제한적인 혜택 또한 시오니스트들이 의도하여 아랍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화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우연히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식민주의와 발전의 관계를 얘기할 때는 경제적 발전의 결과뿐만 아니라 경제적 발전의 과정을 포함해 성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이 더해져야 합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발전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의 초기의 가정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제 그 개념은 그것이 처음에 주목한 협소한 경제적 측면에다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요소들을 합친 한층 더 전체적인 형태로 사고되고 있다. 발전에는 경제 변화만이 아니라 젠더와 같은 문제들이 주요한 사항이 되는 사회 변혁의 질적 과정도 포함된다는 것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J. C. 영,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박종철출판사, 2005, 105쪽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이 말하는 발전이 실제로 아랍인들에게는 박탈이었다는 것을 팔레스타인 난민의 사례를 가지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1947~1949년 전쟁 사이에 75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하고, 1967년의 전쟁에서 20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의 2세, 3세가 태어나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700만 명을 넘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고, 가장 많은 인구를 수를 보이는 난민 문제입니다.

 

이 가운데 450만 명 가량은 유엔이 1949년 팔레스타인 난민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UNRWA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UNRWA에 등록된 난민의 경우는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그리고 가지지구와 서안지구 등지에 UNRWA가 운영하는 59개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 30만 가량의 난민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 내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는 있으나 추방된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표> UNRWA에 등록된 난민의 수, 2007년

지역

난민수(단위 : 명)

요르단

1,903,490

레바논

413,962

시리아

451,469

가자지구

1,048,125

서안지구

745,776

합계

4,562,822

출처 : ‘2007년 UNRWA 연간 건강 보고서(2007 UNRWA Health Annual eport),

UNRWA(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사업기구) 홈페이지, ttp://www.un.org/unrwa

 

또 어떤 난민은 팔레스타인 전쟁 때 추방 되어 난민이 되었다가, 1967년 전쟁에서 다시 난민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스라엘의 장벽 건설 과정에서 계속해서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들이 돌아올 땅이 없다며 난민의 귀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이스라엘로 오라고 계속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