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는 역사의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이 점령과 추방을 통한 팔레스타인의 식민화 과정이었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신화화 하거나 왜곡시키는 네 가지 주장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건국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인들의 귀향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역사적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과거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살았었고, 그곳에 유대인들의 왕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관련 역사를 보면 기원전 12세기에 여호수아가 요르단강 서안을 정복했고, 기원전 1011년부터 기원전 931년까지 독립 왕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922년에 이스라엘 왕국과 유대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기원전 722년에는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왕국을,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가 유대 왕국을 멸망시킵니다.
그 이후 몇 번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이 바뀌게 되고 서기 74년, 117년, 135년 등에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모두 진압됩니다. 이후 비잔틴 제국, 페르시아 등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다 638년 아랍군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이슬람이 퍼집니다. 아랍군의 점령 이후 팔레스타인은 유대인과 무슬림이 공존하는 지역이 됩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고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이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했던 유대인들의 고향이 과연 팔레스타인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건국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모로코, 에티오피아, 이라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세계 각지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맞는 문화, 정치, 경제 등의 생활방식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의 언어라는 히브리어는 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죽은 언어였던 것을 20세기 초반 시오니즘 운동이 성장을 하면서 되살려 낸 것입니다. 정체성을 따지기 위해 ‘유대인이 누구냐’라고 하면 대답은 자신이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유대인입니다. (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3], 살림, 2005, 262쪽 참고) 왜냐하면 출신지역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등지로 다양하고 인종적으로도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으니 특정한 정체성으로 묶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몇몇 국가가 단일민족 국가라는 신화를 강력하게 믿고 있지만 단일성이라는 것은 이질적 요소의 혼합의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말해 주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의 동질성일 뿐이다. 그 상상이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구성원들이 확신하도록 국가는 창조된 단일민족의 신화를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교육시키고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는 국가가 사람들의 기억-망각을 포함하여-을 통제하는 데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
김광억 외, [종족과 민족 - 그 단일과 보편의 신화를 넘어서], 아카넷, 2005, 71쪽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이주했던 대다수의 유대인들과 그들의 부모 또는 그 부모의 부모까지도 팔레스타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유대인들이 가진 종교와 문화 속에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고향이라는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오니즘 운동 초기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현대에 재건하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겁니다.
앞에서 폴 존슨이 6만 명이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갔다고 했을 때 이들의 고향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독일입니다. 거꾸로 물어서 부모님은 물론 그 부모님의 부모님 때부터 모로코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어떻게 팔레스타인 고향이 될 수 있습니까? 테오도르 헤르즐이 ‘유대인 국가’ 마지막 부분에 ‘국가를 원하는 유대인은 국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 것이며, 우리 자신의 고향에서 평화롭게 죽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헤르즐의 고향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이고, 팔레스타인 땅의 한 뼘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그리고 스페인, 잉글랜드와 웨일즈 등 거의 모든 유럽 전역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오니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 http://seoul.mfa.gov.il 참고) 거나 ‘전 세계에 흩어져 2천 여 년에 걸친 이산경험을 했던 유태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조국을 가지게 되었다’ (김용기, [이스라엘의 정치와 사회], 글터, 1996, 163쪽 참고)는 주장도 있지만 그들은 유랑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다거나 유랑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유대인들이 살아왔던 개개인의 역사와 문화를 사라지게 만드는 얘기입니다.
‘타자가 명명한 소위 유태인이라는 전형성이 유태인들 각자의 특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개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147쪽
다른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의 경우 그들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살아 왔으며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말을 배웠고, 그 지역의 사회와 문화를 익혀 왔습니다. 그들이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고향은 카자흐스탄이고, 그들은 유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과거 역사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해서 나의 고향이 만주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온주의는 지구상 모든 민족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들의 역사적 정신적 유대의 실체를 주장하는 유대민족과 그곳에서 수세기 동안의 존재를 주장하는 아랍 민족간의 충돌이었다 -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 ‘시오니즘’, http://seoul.mfa.gov.il
또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으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역사적 정신적 실체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수의 유대인에게는 팔레스타인이 고향이 아니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의 삶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역사적 실체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팔레스타인이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살아 왔던 유대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1878년 오스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실시한 인구 통계 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인구는 15,011명이었고, 무슬림/기독교인의 인구는 447,454명이었습니다. Mike Berry and Greg Philo, [Israel and Palestine], Pluto Press, 2006, 1쪽
따라서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러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이주한 수 십 만의 유대인에게는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향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있지도 않은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귀향의 열망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의 땅에서 강제로 쫓겨난 이후 유대인들은 이산의 시기 동안 이스라엘 땅에 대한 믿음을 지켰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기도와 희망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 이스라엘 건국선언문, <The Declarat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State of Israel>, 이스라엘 외무부, http://www.mfa.go.il
만약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이 맞다면 유대인들은 기회만 된다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시도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먼저 고대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기원전 586~538년까지 바빌로니아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한 뒤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은 538년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유대 땅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 유대인은 소수였습니다.
그러면 키루스 왕의 귀환 허가에 유대로 돌아간 유태인의 숫자가 그렇게 적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이 포고령은 추방된 지 50년이 지나 유수 2세대에게 내려진 것이었고, 그들 중엔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귀향길의 어려움을 고려해 본다면, 사실 우린 유태인 사회 전체가 한마음이 되어 짐을 꾸려 떠나지 않았다는 데 놀랄 게 아니라, 무리를 이루어 떠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한다. -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예루살렘], 그린비, 2002, 89~90쪽
토마스 이디노풀로스의 주장으로 보자면 유대인들에게 귀향의 기회가 주어져도 이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종교적 신념이 강한 일부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니 모리스에 따르면 19세기말부터 1914년까지 러시아에서 약 2백50만 명의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또 수만 명은 캐나다,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떠났습니다. 또 수 십 만 명은 중부나 서부 유럽에 정착했습니다. (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Vintage, 2001, 17쪽 참고)
그리고 이 가운데 2만 5천 명 정도만이 1882~1884년, 1890~1891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Mike Berry and Greg Philo, [Israel and Palestine - Competing Histories], Pluto Press, 2006, 1쪽 참고)
라시드 카리디(Rashid Khalidi)에 따르면 1881년부터 1939년까지 약 3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럽을 떠났습니다. 이 가운데 약 260만 명이 미국으로 갔고, 그 가운데 일부인 42만 명가량이 팔레스타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 간 유대인 대부분은 1924년 미국에서 외국인의 이민을 제한하는 이민법(Immigration Act)이 만들어진 뒤 팔레스타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Rashid Khalidi, [The Iron Cage - The Story of the Palestinian Struggle for Statehood], Beacon Press, 2007, 18쪽 참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민족적 열망이 오랜 세월 지속되었으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꿈꿔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시오니스트들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1881~1882년 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레온 핀스커(Reon Pinsker. 1821년 러시아에서 태어남. 호베비 시온 운동을 일으킴. 1891년 죽음)와 같은 사람은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이 정착하기에 정당한 지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Vintage, 2001, 17쪽 참고)
테오도르 헤르즐도 그의 글 ‘유대인 국가’에서 국가 건설 가능 지역으로 팔레스타인과 함께 아르헨티나를 고려하였습니다. 또한 1903년 영국이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을 때 테오도르 헤르즐을 비롯해 자치주의자들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하였습니다.
<표>이스라엘 국민들의 종교성과 율법준수도(1998) | ||
|
아랍인 |
유대인 |
종교성 |
|
|
매우 종교적 |
10.4 |
1.5 |
종교적 |
21.4 |
11.5 |
어느정도 종교적 / 전통적 |
35.5 |
40.6 |
비종교적 / 세속적 |
32.7 |
46.4 |
기도 빈도 |
|
|
규칙적 |
24.3 |
9.1 |
종종 |
12.2 |
4.7 |
때때로 |
11.8 |
22.9 |
거의 하지 않는다 |
16.6 |
26.9 |
전혀 하지 않는다 |
35.1 |
36.4 |
모스크, 회당에 정기적으로 감 |
35.9 |
20.3 |
안식일에 차를 타지 않음 |
- |
24.8 |
자신의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
60.7 |
32.9 |
출처 : 최영철, ‘이스라엘의 정치발전과 이슬람’, 21세기중동이슬람문명권연구사업단, [중동 정치의 이해 1], 한울, 2004, 132쪽 |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이스라엘 건국이 종교적 신념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 유대 민족에게 약속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종교적 신념이 강한 정통파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특히나 국가 건설에 반대하는 경향을 가졌습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은 분명했다. 야훼가 언제 그들의 민족을 구원해 주실지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예정된 그날이 올 때까지 누구도 무력을 사용해 그날을 앞당기는 걸 야훼로부터 허락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예루살렘], 그린비, 2002, 132쪽
그리고 지금도 반시오니즘의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집단 가운데 하나가 정통파 유대인들입니다. 정통파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은 성지 순례를 위한 장소로 기억되었지 세속적인 국가를 건설할 지역으로 생각되진 않았던 것입니다.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oneworld, 2007, 10쪽 참고)
시온주의라는 이념에서 이스라엘을 실현시키기까지의 연쇄작용은 1860년경 시작된다. 당시에 “시온으로 돌아가자”라는 메시아적 개념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변질된다. - 맥스 디몬트, [이스라엘 역사 사천년],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383쪽
게다가 시오니즘 운동은 그 자체가 세속적 민족주의 운동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스라엘 사회는 기본적으로 세속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입니다. ‘유대인=유대교=종교적 열망’ 식으로 생각하는 흐름에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유대인 가운데는 종교적인 유대인도 있고, 세속적인 유대인도 있으며, 종교적인 유대인 가운데 일부는 시오니스트이고, 일부는 반시오니즘 입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950년 7월 이스라엘은 ‘귀환법’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올 권리와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주택과 경제적 지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 대다수의 유대인은 이스라엘이 아닌 곳에 살고 있고, 오히려 유대인의 유입이 줄어드는 것이 이스라엘 정부의 고민입니다. 또 최근에 이주한 유대인의 출신 국가를 보면 이스라엘과 함께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다는 미국 출신보다는 러시아 출신이 많습니다. 또 에티오피아 출신 유대인들은 경제적 환경이 좋아질 것을 기대하고 이스라엘로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사이에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향이라는 민족적 ․ 종교적 열망이나 기도가 어느 정도 있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이것이 곧바로 이스라엘을 탄생 시킨 주요 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힘을 모으기 위해 민족적 ․ 종교적 열망을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유대인의 귀향이라는 주장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관계 문제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왕국과 유대 왕국이 멸망한 것은 2천년도 넘은 옛날 일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가기 전에도 팔레스타인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유대 왕국이 무너진 뒤에도 팔레스타인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오니스트들은 현대의 이스라엘이 마치 과거의 유대 왕국을 현대에 재건한 것 인양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아예 유대 왕국이 무너진 이후를 외국의 지배시기라고 말하며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을 ‘독립’이라고 주장합니다. 팔레스타인이 20세기 초반까지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지배를 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았던 이주민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건국은 독립의 성격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 정당성을 따지자면 역사적으로 오래 거주했고,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보다 많은 정당성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시오니스트들은 아랍인들을 배제한 채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스라엘을 재건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거주하지도 않던 땅에 몰려가 그 땅을 식민지로 만들고 새로운 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 민족의 국가가 있었다는 것이 현재 국가 건설의 정당성이 된다면 한국인들이 만주 지역에 몰려가 중국을 물리치고 고구려를 다시 세우는 것도 정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본 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이원복의 <가로 세로 세계사 3 - 중동>편
중동분쟁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만 해....이스라엘의 유대인과 그 적인 아랍인 두 종족은 놀랍게도 같은 조상을 지닌 형제와 같은 종족이란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모두 셈족이고 둘 다 셈족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숭배하지.- 이원복, [가로세로 세계사 - 제3권 중동], 김영사, 2007, 166쪽
심지어는 현재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오랜 옛날 성경 시대로 가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를 알기 위해 영국의 고대사까지 알아야 할까요? 물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초기 영국인들의 이주 과정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과거의 왕국과 현대 이스라엘을 연속선상에 있는 국가로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을 조상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아랍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래의 몸종인 하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이스마엘을 조상이라고 말한다. 결국 유대인 ․ 아랍인의 혈통은 아브라함에서 비롯되는 공통의 인종적 기원을 갖고 있다. - 손주영 ․ 김상태, [중동의 새로운 이해], 오름, 1999, 259쪽
만약 유대인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자고 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 문제를 얘기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간단한 예는 이스라엘 시민이자 유대인인 사람 가운데는 흑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종적으로 과거의 유대인이 어떻게 탄생 했는지와 지금의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이라는 거지요. 고대 역사 속의 유대인과 이스라엘, 현대 역사 속의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분리 ․ 평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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