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점령 전쟁 2단계 : 1948년 5월15일-1949년 1월
1) 시오니스트와 아랍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는 5월15일의 하루 전인 5월14일, 시오니스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5월15일 미국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곧바로 승인하고,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능력과 의지가 약했던 반면 이스라엘은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가 훨씬 강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대규모 추방이 계속 이루어집니다.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국가 가운데 하나는 요르단입니다. 아랍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요르단이 전쟁에 참여한 진짜 목적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해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유엔 분할안이 채택되기 12일 전, 1947년 11월17일 유대인 기구의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 1921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1969년 이스라엘 총리가 됨. 1978년 죽음)는 요르단 국왕 압둘라를 비밀리에 만납니다. 이 자리에서 압둘라는 유엔 분할안에 따라 아랍 국가로 주어진 요르단 강 서쪽(서안지구) 지역을 자신의 왕국에 합병하길 원한다고 밝힙니다. 그러자 메이어는 압둘라의 의견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면서 요르단이 유대인 국가의 탄생 과정에 개입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에 따르면 ‘압둘라는 전쟁이 아니라 타협을 원했으며, 요르단 군대가 유대인 군대와 충돌하거나 유대인 국가에 맞서려는 다른 군대에 협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오니스트들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아랍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요르단과의 충돌을 미리 피할 수 있었습니다. (Avi Shlaim, [The Iron Wall - Israel and the Arab World], Norton, 2001, 30쪽 참고)
그런데 유대인 군대가 분할안에서 아랍 국가에게 주어진 지역까지 공격하고, 또 데이르 야신의 학살 사건이 주변 아랍 지역에까지 충격을 주면서 시오니스트들에게는 고민이 생깁니다. 혹시 압둘라가 아랍 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보호하라는 압력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골다 메이어가 아랍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기 5일전인 5월10일 다시 압둘라를 만나기 위해서 암만으로 갑니다. 골다 메이어와 만난 자리에서 압둘라는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지 말고 유대인들이 자치권을 가진 채 자신의 왕국 속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자 골다 메이어는 압둘라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이전에 양측에서 계획 했던 대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대해 압둘라는 골다 메이어의 제안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는 점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 개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골다 메이어는 유대인들이 최근 몇 개월 동안 무력을 극적으로 증강해 왔으며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힘을 다해서 싸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시작되자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전투를 피했습니다. 요르단 군대는 5월15일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면서 별다른 저항 없이 아랍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군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단, 압둘라와 골다 메이어 사이에 팔레스타인 분할에 대해 협의를 하면서도 다루어지지 않은 예루살렘 지역에 대해서만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집니다.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성지가 모여 있는 예루살렘 내 올드 시티(Old City)를 두고 양측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5월28일 결국 요르단 군대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유엔 분할안에서는 국제 관리 지역으로 되어 있던 예루살렘의 동쪽 부분(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서쪽 부분(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장악합니다. 그리고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를 장악한 요르단 군대는 이스라엘 군의 아랍인에 대한 살인과 추방이 벌이는 동안 이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해방 시킬 것이라는 아랍 연맹의 구호와 달리 각 아랍국들은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장을 실현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집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전쟁에 나선 주된 이유는 요르단이 팔레스타인을 장악함으로써 아랍권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우려해 이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트루만 대통령의 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Clark Clifford)가 1948년 5월9일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서 ‘앞으로 영토를 두고 남은 분쟁은 유대인과 아랍 사이가 아니라 아랍과 아랍 사이이고, 유대인 영토 때문에 생기는 분쟁이 아니라 아랍 국가로 할당된 팔레스타인 지역을 놓고 생기는 분쟁입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Baylis Thomas, [How Israel Was Won], Lexington Books, 1999, 79~80쪽 참고)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을 한 것은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 이틀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초기 6천 명 가량에서 10월에 1만 명 이상으로 증강을 하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무슬림 형제단의 자원병들입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아랍권을 이슬람화 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을 유럽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쟁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로 유대인 군대와 맞설 상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전쟁 초기에 팔레스타인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을 하고, 동쪽 네게브 지역 장악 했으나 곧 이스라엘 군에게 밀려 퇴각하게 됩니다.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oneworld, 2007, 128쪽 참고)
이라크도 팔레스타인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이라크 군은 서안 지구 북부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요르단 정부의 지침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20년 하심 가문의 파이살이 시리아에서 왕국을 세우려다 프랑스에게 쫓겨나고, 영국이 1921년에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1958년에 가서 이라크에서 하심 왕조가 무너집니다. 그리고 요르단의 왕이었던 압둘라는 파이살의 형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라크가 팔레스타인의 해방보다는 압둘라의 정치적 야심을 지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라크 군은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이스라엘 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시리아 군의 경우는 다른 아랍 군대에 비해 훈련이 좀 더 잘된 편이었지만 시리아는 194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아직 국가로써의 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레바논은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으나 1946년에서야 프랑스 군이 레바논을 떠납니다. 그리고 레바논에는 시오니스트들과 협력하는 기독교 정치 세력과 이에 맞서는 무슬림 정치 세력이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48년 당시에도 레바논 군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부터 국경 인근 마을을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2) 전쟁의 전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5월20일 전쟁을 멈추기 위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대인을 구출하는 일을 하기도 했던 스웨덴 출신의 카운트 폴케 베르나도트(Count Folke Bernadotte. 1895년 스웨덴에서 태어남. 스웨덴 적십자사 대표였음. 1948년 9월 유대인 조직인 스턴갱이 암살)를 중재인으로 지명합니다.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 6월11일부터 7월8일까지 실제로 휴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휴전 기간 동안 이후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1948년 5월 중순 아랍 군의 병력이 25,000명 이하였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 군 병력은 35,000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휴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자국 내 유대인 그리고 새롭게 이주해온 유대인 등으로 병력을 대규모로 확충하는데, 7월 중순이 되면 그 수가 65,000명으로 늘어나고 12월이 되면 96,441명으로 늘어납니다. 또 영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비행기 조종사, 통신 전문가 등이 이스라엘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모여 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체코슬로바키아 등지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수입해 옵니다.
국련에 의한 무기 금수령(5월 29일 이후)을 영국이 지킨 것은, 영국제 무기로 장비해 왔던 아랍군으로서는 큰 타격이었으며, 탄약과 부품 등의 부족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아랍 측이 무기와 탄약공장을 전혀 갖지 않았던 데에 비해, 유대 측은 박격포 및 그 포탄 등 무기를 갖고 있었다. 뿐더러 유대 측은 금수령에도 불구하고, 체코 기타의 각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무기공급을 받고 있었으며, 유럽 도처에 두루 쳐진 하가나망(---網)은 폭넓은 협력자들의 도움을 얻어, 무기의 구입과 수송, 지원병 ․ 용병의 모집과 팔레스티나에의 이동 등, 비길데 없는 솜씨로 수행했는데, 이에는 미 ․ 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유고 등 나라들의 공식 당국자의 비밀원조가 있었던 것이다.- 막심 로댕송, ‘역사적으로 본 이스라엘’, 장 폴 사르트르 엮음, [아랍과 이스라엘], 시공사, 1991, 71~72쪽
7월8일 이집트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휴전이 끝이 나고 7월18일까지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7월19일부터 10월15일까지 2차 휴전이 진행됩니다. 전쟁과 휴전이 반복되는 동안 베르나도트는 팔레스타인을 새로 분할하는 안과 이스라엘에게 강제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조건 없는 귀환 등을 제안합니다. 이 안을 요르단은 받아 들였으나 아랍 연맹과 이스라엘은 반대합니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땅을 원했고, 그럴 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9월17일 스턴갱이 예루살렘에서 베르나도트를 암살합니다.
9월26일에는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 내각에 서안 지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위한 공격을 제안했지만 내각의 승인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서안 지구를 공격할 경우 요르단과 방위 조약을 맺고 있는 영국과의 전투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압둘라와 맺었던 상호 불가침에 대한 합의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서안지구를 장악할 경우 또다시 50만 이상의 아랍인들이 유대인 국가 내부에 남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등이 내각에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벤 구리온은 서안 지구를 포기하고 남쪽의 네게브(Negev)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때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집트 왕실로부터 평화협상을 제안 받았을 때입니다. 이집트 왕 파루크의 밀사 카말 리아드(Kamal Riad)가 이스라엘 외무부의 중동 지역 책임자였던 엘리아스 사손(Elias Sasson)을 파리에서 만납니다. 여기서 리아드는 이집트가 사실상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것과 함께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네게브 지역의 상당 부분을 합병하는 것을 인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제안을 두고 이스라엘 내각은 의견이 갈립니다. 그런데 10월6일 벤 구리온은 이집트와 전쟁에 관한 새로운 제안을 내어 놓습니다. (Avi Shlaim, [The Iron Wall - Israel and the Arab World], Norton, 2001, 38~39쪽 참고)
10월15일 이스라엘은 휴전을 깨면서 이집트 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2월28일에는 이스라엘 군이 이집트 군을 시나이 쪽으로 밀어낸 뒤, 국경선을 넘어 시나이 반도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대국들의 압력을 받습니다. 영국은 1936년에 이집트와 방위 조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은 아랍 국가들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중단하고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압박합니다. 미국은 12월31일 제임스 맥도날드(James McDonald) 미국 특별 대표를 이스라엘로 보내 ‘깊은 우려’를 전달합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전쟁 동안 아랍군은 병력과 무기는 물론 싸울 의지도 부족한 채 팔레스타인을 해방 시켜야 한다는 여론에 떠밀려 이스라엘과 대결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짧은 시간에 병력과 무기를 급격히 강화하고, 국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아랍군을 무너뜨려 갑니다. 그리고 1948년 1월부터 아랍-이스라엘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어 이집트와 2월24일, 레바논과 3월23일, 요르단과 4월3일, 시리아와 7월20일 각각 휴전 협정을 맺습니다.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팔레스타인은 세 조각이 나는데, 하나는 요르단이 점령한 서안지구, 두 번째는 이집트의 통치권이 된 가자지구 그리고 세 번째 나머지 지역(전체 팔레스타인의 78%)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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