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이스라엘 건국은 홀로코스트의 결과이다?
시오니스트들이 국가 건설의 정당성으로 내세우는 주요한 이야기도 바로 유럽에서의 유대인 학대와 홀로코스트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이들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시오니스트들이 러시아나 독일 등지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으며,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시오니스트들이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때문에 생겼고, 이스라엘인들과 이스라엘을 건국한 사람들은 독일이나 나치즘, 파스시트들과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오니스트들이 유대인 낙하산병을 나치와 싸우는데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대인 구출보다는 유대인을 구출하려 하고 있다는 몸짓에 그쳤습니다.
홀로코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 봐야 할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0세기 초 테오도르 헤르즐이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러시아 폰 플레베 백작과 협력하면서 그에게서 지원을 얻어낸 것은 유대인을 추방하려는 러시아와 팔레스타인 이민 유대인 인구수를 늘리려는 시오니스트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막심 로댕송, ‘역사적으로 본 이스라엘’, 장 폴 사르트르 엮음, [아랍과 이스라엘 - 그 분쟁의 뿌리를 파헤친다], 시공사, 1991, 37쪽 참고)
그래서 플레베가 나중에 헤르즐에게 ‘유태인들은 혁명 정당에 가담하고 있다. 우리는 시오니즘 운동이 이민을 추구하는 한 당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했다. 나에게 시오니즘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미 당신들의 편이다. 당신은 이미 개종한 사람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했습니다. (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2003, 73쪽 참고)
더 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시오니스트 운동 모두 전쟁 동안 수 백 만의 유대인을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양쪽 모두 유럽 유대인의 운명보다 보다 더욱 관심을 가진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질 일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몇 년 뒤에 “제가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의 의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유대인을 구출하는 문제에 정통하지 않았습니다”, “내 활동의 핵심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의 지원이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 Tom Segev, [One Palestine, Complete], Holt, 461쪽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시오니스트들은 나치 또는 파시스트들과 협력 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을 추방하려는 나치나 파시스트들의 입장과 더 많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시키려는 시오니스트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나치스 독일과 유대 기구 사이의 이동 협정으로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티나로 옮아갔는데, 전후에 발표된 독일 외무부의 비밀 문서도, 「내정상의 고려에서 나온 이 정책은, 사실 유대인이 팔레스티나에서 그 위치를 굳히고, 유대 국가를 창설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 막심 로댕송, ‘역사적으로 본 이스라엘’, 장 폴 사르트르 엮음, [아랍과 이스라엘], 시공사, 1991, 37쪽.
시온주의와 홀로코스트의 관계에 대한 세게브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청(Jewish Agency, 건국 이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자치당국)’의 지도자들은 파시즘의 대두를,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들의 대거 이주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아 오히려 반겼으며, 야보틴스키(Jabotinsky)를 위시로 하는 우익 시온주의자들은 파시즘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종종 유럽의 극우세력과 협력을 모색하였다. - 최갑수,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정치적 이용 그리고 유럽중심주의’, 홍성태 엮음, [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 문화과학사, 2007, 230쪽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데 핵심적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인구 문제가 잘 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 이민이 꾸준히 증가했는데, 1920년대 말과 1930년 초에는 1929년 일어난 대공황의 여파로 나빠진 경제적 상황 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떠나는 유대인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부터 나치 독일의 학대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증가했습니다. 그러니깐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이 다수인 상태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이주를 강화하고, 국가 건설의 명분을 얻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었던 하임 바이즈만의 이야기입니다.
6백만 유럽 유태인들의 희망은 이민으로 모아진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6백만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 갈 수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정말 슬픈 일이지만 나는 팔레스타인 위해 젊은이들을 구출하기 원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이 냉혹한 세계의 먼지에 불과하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먼지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오직 젊은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 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2003, 80쪽
그러면 학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팔레스타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 말 러시아에서의 학살을 피해 2백 5십만 가량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갔듯이 독일의 학살을 피해서 유대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들이 미국이 아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벤 구리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오려하지 않고 다른 곳에 정착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는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시오니즘뿐만 아니라 이슈브에게도 가장 큰 위험이다”라고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썼습니다.” - Tom Segev, [One Palestine, Complete], Holt, 2000, 471쪽
그래서 시오니스트들이 사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자신들이 운영하던 난민캠프의 사람들 가운데 17세에서 35세까지의 건강한 남성과 여성을 대상으로 미국이나 캐나다가 아닌 팔레스타인으로 가도록 압력을 넣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Noam Chomsky & Gilbert Achcar, [Perilous Power], Paradigm, 2007, 182쪽 참고)
그러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난민 캠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난민 캠프에 계속 남을 것이냐 아니면 팔레스타인으로 갈 것이냐라는 두 가지 선택만 남게 됩니다. 그러니 난민들은 굶주림과 질병이 가득한 난민캠프에 남기 보다는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Tom Segev, [One Palestine, Complete], Holt, 2000, 491쪽 참고) 풍선을 한 쪽에서 손으로 누르면 다른 쪽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의 관계에서 또 하나 얘기될 수 있는 것이 유럽과 미국의 태도입니다. 1938년 7월 프랑스 에비앙(Evian)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각 나라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유대인 난민 수용과 관련된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미국도 영국도 난민 수용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양쪽 모두 향후 3년 동안 유대인 이민을 10만 명으로 제한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 학대에 대해 미국 등은 난민 문제의 해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유대인에 대한 동정과 죄의식은 시오니즘 운동을 지원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학살에 대한 보상으로 팔레스타인 땅과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학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이 홀로코스트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갖길 원했고, 또 팔레스타인이 쉽게 식민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홀로코스트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적당히 이용되다 보니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제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건국 이후 1961년 나치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회적 침묵이 흘렀습니다. (최호근,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억과 역사 만들기’,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2004년 가을호, 219쪽 참고)
노먼 핀켈슈타인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이 소련의 서진을 가로막는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제제기가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7년 6일 전쟁을 계기로 아랍 국가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위가 확실해 지면서 홀로코스트도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
노르만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사, 2004, 61쪽 참고)
오로지 유대인들만이 홀로코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기억의 신성화(sacralization of memory) 논리가 이미 개입되어 있으며, 따라서 아우슈비츠를 둘러 싼 과거의 기억을 유대인들만이 전유하겠다는 이스라엘의 국가 논리가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공유하거나 희생을 공유함으로써 ’사회(Gesellschaft)가 아닌 ‘공동체(Gemeinschaft)'의 결속을 강화하는 방식이지요. - 지그문트 바우만, 임지현,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 [당대비평] 2003년 봄 2002년 겨울 합본호, 생각의 나무, 2003, 18쪽
시오니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으며, 그때부터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추방해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Steven Salaita, [Anti-Arab Racism in the USA], Pluto Press, 2006, 134쪽 참고)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서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 이미 원주민들을 추방하고 이스라엘을 건국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벌이던 중에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 건설과 자신의 잔악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자신을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이런 ‘희생양’이라는 이미지는 이스라엘 시민들을 국가로 통합하는 도구로 유용하였습니다.
‘굳이 유전자에 기대지 않고도 집단무의식이란 것이 편견과 신화, 그리고 한 기득권 집단의 집체적인 태도의 소산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예컨대,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태인들을 보라. 그들은 앞으로 채 100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들이 1945년 이전까지 여러 나라들로부터 강제 출국을 당하면서 키워 왔던 집단무의식과 천양지차가 나는 전혀 새로운 집단무의식을 키워낼 것이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223쪽
게다가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벌이던 때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는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사회주의자 등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만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홀로코스트의 해결 방법이 유대인 국가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인이 다른 거주지를 찾는 길이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을 억압하는 국가의 건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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