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10- 점령 전쟁 1단계 : 1947년 11월-1948년 5월14일

순돌이 아빠^.^ 2010. 6. 13. 12:47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점령 전쟁 1단계 : 1947년 11월-1948년 5월14일

 

유대 국가로써의 이스라엘 건국을 향한 시오니스트들의 전쟁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유엔 분할안이 통과된 1947년 11월부터 시오니스트들이 국가 건설을 선포한 1948년 5월14일까지이고, 두 번째 단계는 주변 아랍국들과 전쟁에 돌입한 1948년 5월15일부터 아랍 각국과 휴전 협정을 맺은 1949년 초까지입니다.

 

시오니스트들이 20세기 초반부터 대규모 유대인 이주를 추진했으나 1947년 당시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아랍인이 다수인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 아랍인들 강제 추방하고 인구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인구 문제와 함께 중요한 영토 문제는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 지주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땅을 사들였지만 전체 팔레스타인 땅의 6% 정도 밖에 갖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 땅을 빼앗고 국가 건설을 위한 영토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유엔 분할안이 통과되자 아랍인들이 유대인 거주지를 공격하는 등 저항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1947년 12월부터 아랍인과 아랍인 마을 공격하며 추방 전쟁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사례는 데이르 아이유브(Deir Ayyub) 마을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새로운 학교 문을 열고 축하 행사를 벌인 날 밤 10시, 20명의 유대인 군인들이 아무런 방어 능력을 갖추지 못한 마을로 들어가 여기저기 사격을 해 댑니다. 그리고 1948년 4월 주민들이 완전히 쫓겨나고 마을이 파괴되기까지 3차례 더 공격을 합니다. 12월18일에는 유대인 군인들이 무슬림과 기독교인 수 백 명이 함께 살고 있는 키사스(Khisas)를 공격합니다. 이들은 주민들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이 집, 저 집을 폭파하며 어린이 5명을 포함해 15명을 살해합니다.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oneworld, 2007, 56쪽 참고)

 

도시 지역에 대한 공격의 첫 대상은 하이파가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생활하던 곳으로 1920~1930년대까지 양 민족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 맞서 공동 행동에 나서던 전통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군대의 공격으로 노동 계급의 연대는 민족간 싸움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라크 석유회사(Iraqi Petroleum Company)의 정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아랍인 노동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르군이 폭탄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르군은 이 공격이 그 전에 아랍인 노동자들이 유대인 노동자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랍인 노동자들이 유대인 노동자들을 공격해서 39명을 살해합니다.

 

시오니스트들은 주민들이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평화롭게 지내려고 하는 노력을 파괴합니다. 왜냐하면 시오니스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948년 1월7일 텔 아이브(Tel-Aviv)시의 관리들이 모여 이르군뿐만 아니라 하가나까지 나서서 자파 지역의 아랍인들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합니다. 유대인이 다수 거주하는 텔 아비브와 아랍인이 다수 거주하는 자파는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월25일 대표단이 벤 구리온을 찾아가 항의를 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oneworld, 2007, 65쪽 참고)

 

그리고 이런 항의는 텔 아이브뿐만 아니라 아랍인 도시나 마을과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도 나옵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시오니스트는 아니었으며 유대인들 중에는 아랍인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군대에 의한 살인과 파괴가 벌어지는 동안 1948년 1월9일, 시리아 출신의 파우지 알 카우크지(Fawzi al-Qawuqji. 1897년 레바논에서 태어남. 1936년 팔레스타인 아랍인 대투쟁 때 참여. 1948년 아랍 해방군 사령관. 1974년 죽음)를 사령관으로 하는 아랍 해방군(Arab Liberation Army)이 아랍 연맹의 지원을 받으며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유대인 거주 지역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랍인들의 비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2천~3천 명 가량 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의지나 무기, 조직,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유대인 군대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아랍 연맹 국가들도 소극적인 태도로 행동에 나설 뿐이었습니다.

 

2월9일에는 유대인 군대가 갈릴리 북부 지역의 파수타(Fassuta), 타르비카(Tarbikha), 아이루트(Aylut) 등지를 공격합니다. 2월13일에는 유대인 군대가 자파 지역을 공격하여 사람이 안에 있는데도 집들을 폭파합니다. 2월15일에는 아랍인을 비롯해 유대인과 베드윈 등 1,500여명이 살고 있는 키사르야(Qisarya) 지역이 유대인 군대의 공격을 받아 주민들이 완전히 추방됩니다. 단지 몇 시간 만에 조직적으로 진행된 공격이었습니다.

 

3월이 되면 시오니스트들의 아랍인에 대한 추방 전쟁은 ‘D 계획(Plan Dalet, 공식 명칭은 여호수아Yehoshua 계획)’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진행됩니다. D 계획에 따라 하가나의 각 여단은 계획을 실행하기 좋게 담당 지역을 할당 받습니다. 그리고 각 여단은 자신들이 점령, 파괴하고 주민들을 추방해야할 마을의 명단과 작전을 수행할 날짜까지 받습니다.

 

그전에도 유대인 군대의 공격으로 13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나 그동안의 공격이 산발적이었던 반면 D 계획을 계기로 조직적인 추방 작전이 진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D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는 동안 하가나는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이미 2차 세계대전에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었습니다.

 

D 계획이 실행되는 동안 벌어졌던 주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데이르 야신(Deir Yassin) 마을의 학살입니다. 유대인 군대의 공격이 있기 전까지 데이르 야신은 이웃 유대인 마을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 4월9일 주민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이르군과 스턴갱이 데이르 야신을 공격하기 시작해 집들에 기관총 세례를 퍼붓고 수류탄을 던지며 주민들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주민들은 한데 모이게 해서 살해합니다. 유대인 군인들은 여성들을 강간한 뒤 살해하기도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트럭에 태워져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개선 행진’에 이용되는데 트럭에 타기 전에 군인들은 주민들의 보석과 돈 등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행진이 끝난 뒤 또다시 살해합니다. 그렇게 새벽에 시작된 공격이 낮까지 이어지면서 200명가량이 살해됩니다.

 

데이르 야신 학살

 

데이르 야신의 학살을 두고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은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려고 했으며 확성기를 통해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은 피하라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은 다릅니다.

 

사건 당시 12살이었던 파히미 지단(Fahimi Zidan)은 ‘유대인들이 우리 가족을 벽을 향해 줄 서게 한 뒤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총을 맞았지만 아이들 대부분은 우리 부모님들이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4살짜리 제 여동생 카드리(Kadri)는 머리에, 8살짜리 여동생 사메(Sameh)는 뺨에, 7살짜리 남동생 무함마드(Mohammad)는 가슴에 총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벽을 향해 섰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하림 에이드(Halim Eid)는 ‘제 언니(또는 여동생-옮긴이)는 한 남자가 쏜 총에 목을 맞았어요. 그리고 그 때 제 언니(또는 여동생)는 임신 9개월째였어요.'라고 했습니다. (David Hirst, [The Gun and the Olive Branch - The Roots of Violence in the Middle East], Nation Book, 2003, 249250쪽 참고)

 

팔레스타인 국제 적십자사의 대표였던 자크 드 레이니어(Jacques de Reynier)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르군은 24시간 전에 마을에 도착해서 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모든 집을 비우고 항복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명령에 따르라고 주어진 시간은 15분이었습니다....이 일당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철모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젊은 남성과 여성이었으며 그 가운데는 청소년들도 있었습니다....그들은 손에 칼을 들고 있었는데 대부분 피로 얼룩이 져 있었습니다. 한 예쁜 소녀는 그것이 마치 트로피라도 되는 듯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 자신의 칼을 제게 보여줬습니다. 이들은 ‘청소팀’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아주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 (David Hirst, [The Gun and the Olive Branch - The Roots of Violence in the Middle East], Nation Book, 2003, 249252쪽 참고)

 

데이르 야신 학살 사건은 사건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일이고, 또 다른 아랍 주민들에게도 유대인 군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데이르 야신의 학살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알려지면서 공포에 질린 아랍인들이 살던 고향에서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시오니스트들에게는 쉽게 아랍인들을 추방할 수 있는 정치 선전의 계기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또 주변 아랍 국가들에게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인에 대한 추방 과정에 영국군이 협력 또는 방조했다는 사례도 있습니다. 4월16~17일에는 유대인 군대가 티베리아스(Tiberias) 지역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영국군에게 이 지역에 대한 하가나의 봉쇄를 풀고 아랍인 지역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며칠 안에 도시에서 떠날 것이며 4월22일 이후에는 보호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아랍인들은 버스와 트럭을 타고 도시를 떠납니다. (Nizar Sakhnini, 'The 1948 War : A Cover up for Ethnic Cleansing', Al Awda, http://al-awda.org/zionists4.html 참고)

 

또 다른 사례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 도시인 하이파입니다. 1948년 4월18일 영국군 하이파 지역 사령관인 소장 휴그 C. 스톡웰(Hugh C. Stockwell)이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의 연락관인 헤리 베일린(Harry Beilin)을 사무실로 부릅니다. 그리고 스톡웰은 베일린에게 자신들은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지 사이에 있는 완충지대에서 철수 할 것이며, 철수 작업은 4월20일까지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4월 이전에도 하이파 지역에서 공격이 있었지만 이 완충지대가 유대인 군대의 직접적인 공격을 어느 정도 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4월20일 저녁 무렵까지 완충지대에서 철수를 완료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21일 아침 10시 30분, 하가나가 5만 여명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공격이 시작된 이후 수 천 명의 주민들이 도망을 가고 결국 하이파는 유대인 군대의 손에 들어갑니다.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복된 곳이 자파입니다. 4월부터 시작된 공격에 대해 자파 지역 주민 1,500여 명이 5천 여 명의 유대인 군대와 맞섰습니다. 하지만 5월13일 자파 주민들은 패배를 하고 주민 5만 명이 추방되었습니다. 자파를 점령함으로써 유대인 군대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와 마을에서 아랍 주민들을 추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