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9- 유엔 분할안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00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유엔 분할안

 

1947년 4~5월에 걸쳐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새로운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니다. 유엔이 탄생한 이후 처음으로 지역 분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5월15에 만들어진 새 위원회에게는 ‘UNSCOP(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팔레스타인에 관한 유엔 특별 위원회)'라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UNSCOP는 네덜란드,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이란, 페루, 과테말라, 우루과이 등 모두 11개국 대표들로 구성됩니다. 분쟁 해결이나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위치에 앉게 된 것입니다.

 

스웨덴의 에밀 산드스트롬(Emil Sandstrom)을 단장으로 하는 UNSCOP는 5주 동안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유대인과 영국 정부의 의견을 듣습니다. 유대인들은 분할안에 대해 잘 준비된 설명을 한 반면에 아랍인들은 이들의 방문을 거부하거나 부정적 태도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탄 배를 돌려보내는 것을 두고 ‘홀로코스트의 해결=유대인 국가’라는 정치 구호를 퍼뜨리는데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또 UNSCOP가 유대인 난민촌을 방문 했을 때 각국 대표들은 유대인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가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1947년 8월31일 UNSCOP는 유엔 총회에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여기서 다수안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나누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신탁 통치 지역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두 국가는 경제적으로 하나의 연합을 구성하며, 영국이 2년 더 팔레스타인 지역을 관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유고슬라비아, 이란, 인도 대표가 제안한 소수안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하나의 국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Vintage, 2001, 183쪽, Ilan Pappe, [A History of Palestine], Cambridge, 2006, 125쪽 참고)

 

10월11일에는 미국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지지를 표시합니다. 또 10월13일에는 소련이 유대인 국가의 건설이 중동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진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분할안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11월13일에는 영국이 1948년 8월1일까지 모든 군대를 팔레스타인에서 철수 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티와 그리스, 필리핀 등은 분할안에 반대할 의사를 드러냅니다. 그러자 미국이 나서서 해외 원조 중단, 해당 국가의 상품에 대한 수입 금지 등을 내세우며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들에게 압력을 행사합니다.  

[지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 1947년

출처 : Passia http://www.passia.org

11월29일, 유엔 총회의 투표가 라디오로 전 세계에 중계되는 가운데 미국, 서유럽 국가들, 소련과 소련의 동맹국들, 그리고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포함해 33개국이 분할안에 찬성표를 던집니다.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 그리고 쿠바와 인도 등 13개 국가가 반대표를, 영국, 아르헨티나, 멕시코, 칠레, 중국 등 10개 국가가 기권을 해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가 통과 됩니다. 이 때 통과된 분할안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국제관리 지역으로 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과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지원하고 나서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주변 아랍국들은 분할안에 반대 의사를 표시합니다.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려는 의도는 1937년 영국의 필 위원회를 통해 제시되었고, 이후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이용된 안입니다. 그리고 아랍인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여야할 이유도 없는 안이었습니다. 아랍인들의 입장은 팔레스타인 학자인 와리드 카리디(Walid Khalidi)가 ‘아랍 세계,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 등 다른 모든 나라의 원주민들과 같이 팔레스타인의 원주민들도 식민자 집단과 땅을 나누기를 거부 합니다’라고 간결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시오니스트들 가운데 다수는 일단 유엔 결의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의안 내용 가운데서도 국제적으로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인정했다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물론 이 안을 놓고도 시오니스트들 사이에는 단계론을 주장하는 쪽과 수정 시오니즘 사이에 입장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소수 안이 유대-아랍 2민족의 국가를 만들자는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시오니스트들은 유엔 결의안을 받아 들였고, 다음 단계는 아랍인들을 강제 추방하고 유대 국가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시오니스트들에게 아랍인의 존재는 헤르즐 시절부터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걸림돌이었고, 걸림돌은 제거해야 했습니다. 아래는 야보틴스키가 1923년에 쓴 ‘강철벽(The Iron Wall)’의 한부분입니다.

 

우리와 아랍인들 사이에 자발적인 합의란 있을 수 없다....원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식민화가 실행된 된 사례가 있는지 보라. 그런 사례는 없다....그들이 문명화 되었건 아니건 간에 원주민들은 언제나 식민주의자들에게 강력히 저항해 왔다....시오니스트 식민화는 멈추든지 아니면 원주민들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식민화는 원주민들과 관계없이 오직 힘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Jabotinsky, ''The Iron Wall', Jabotinsky Institute in Israel, http://www.jabotinsky.org

 

벤 구리온의 입장도 야보틴스키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1936년 5월19일에 유대인 기구 집행위원회(Jewish Agency Executive)에서 ‘우리와 그들은 같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팔레스타인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적인 분쟁입니다.’라고 합니다. 1937년 7월12일에 쓴 일기에서는 아랍인에 대한 강제 이송을 두고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가정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Nur Masalha, '‘The Historical Roots of the Palestinian Refugee Question', Naseer Aruri 엮음, [Palestinian Refugees - The Right of Return], Pluto Press, 2001, 38쪽 참고)

 

또 1937년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우리는 아랍인들을 반드시 추방하고 그들의 공간을 차지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1941년 10월에는 ‘시오니스트 정책의 개요’라는 제목의 메모에서 ‘강제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이송은 상상하기 어렵다. 체르케스(Circassians), 드루즈(Druze), 베두인(Bedouin), 시이(Shi'ites. 시아 무슬림), 소작농, 땅 없는 노동자들은 떠나라고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랍인들이 우리의 계획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줄만한 짧은 시간에 자발적으로 떠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오니스트인 요셉 바이츠(Joseph Weitz)는 1940년에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씁니다.

 

우리는 이 땅에 두 민족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이 작은 땅에서 아랍인들과 함께 있는 한, 독립적인 민족이 되겠다는 우리의 목적은 이룰 수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적어도 팔레스타인의 서쪽(요르단 강 서쪽)에만이라도 아랍인 없는 팔레스타인을 만드는 것이다....아랍인들을 여기서 다른 이웃 국가로 이송하는 것, 하나의 마을이나 하나의 부족도 남기지 않고 그들 모두를 이송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이송이 이루어진 뒤에라야 유대인 국가는 수 백 만의 우리 형제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 - David Hirst, [The Gun and the Olive Branch - The Roots of Violence in the Middle East], Nation Book, 2003, 255쪽

 

1941년 1월30일 바이즈만은 런던 주재 소련 대사 이반 마이스키(Ivan Maisky)를 만난 자리에서 ‘만약 50만 가량의 아랍인이 이송될 수 있다면 2백만 유대인이 이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라크나 트랜스 요르단으로 이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Vintage, 2001, 168쪽 참고)

 

1945년 7월 벤 구리온은 뉴욕으로 가서 18명의 유대인 부자들을 만납니다. 이 자리에서 벤 구리온은 수 백 만 달러 가량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루돌프 손넨본(Rudolph Sonnenborn)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벤 구리온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무기를 지원하는데 나섭니다. 10월에는 벤 구리온이 무기 구매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에후드 아브리엘(Ehud Avriel)을 유럽으로 보내는데, 그는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접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라하로 날아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의 첫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합니다. (Nizar Sakhnini, 'The 1948 War : A Cover up for Ethnic Cleansing', Al Awda, http://al-awda.org/zionists4.html 참고)

 

이렇게 시오니스트들은 유엔 결의안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전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전쟁과 추방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주변 아랍 국가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력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인 지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엔 결의안이 통과됨으로써 국제적 지지를 얻은 시오니스트들은 다음 단계인 아랍인에 대한 추방과 유대 국가의 팽창 작업에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