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7 - 영국과 미국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17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영국과 미국

 

시오니스트들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서가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발푸어 선언과 같은 영국의 지원으로 시오니즘 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백서가 발표되면서 시오니스트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맞서는 영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기 위한 수단을 동원합니다.

 

1939년 5월에 백서가 발표되고 9월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 2차 세계대전은 팔레스타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독일군이 북부 아프리카로 진격해 가자 팔레스타인에서는 독일군이 곧 팔레스타인을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떠돕니다. 또 이탈리안 공군이 1940년 9월 텔 아비브를 폭격하여 1백 명 이상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병력을 증파하고, 팔레스타인은 군사 기지화 됩니다.

 

팔레스타인이 군사 기지화 되자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영국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건설이나 업무에 유대인들이 고용됩니다. 또 유대인 소유 기업에서는 물병, 정밀기계, 트럭, 무기 부품, 군복, 군화 등을 생산하고 하이파에서는 군함을 수선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의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입니다. (필 마셜, [인티파다 - 시온주의, 미국과 팔레스타인 저항], 책갈피, 2001, 62쪽 참고)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요한 것이 시오니스트들의 군사력 증강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이 영국군으로 참전합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 지도부는 팔레스타인의 방어를 위한 유대인 특별 부대 창설을 요구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1942년 말이 되면 영국군으로 참전한 유대인의 수가 43,000명 가량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들이 현재 이스라엘 방위군의 전신인 하가나(Haganah)의 주요 인적 구성원이 됩니다. 또 전쟁에 참여하면서 가졌던 전투 경험은 이후에 아랍인 그리고 영국과 전쟁을 벌일 때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유대인들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지의 친독일 세력과의 전쟁도 벌입니다.

 

 

이스라엘에겐 건국의 영웅, 팔레스타인들에게는 학살자이자 점령군인 하가나 

 

하가나 - 히브리어로 방어라는 뜻. 1920년대 이슈브 방어를 위해 만들어짐.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아랍인들에 대학 살인과 추방 등의 범죄를 저지름. 이르군, 스턴갱과 함께 이스라엘 방위군(Israel Defence Force)이 됨.

 

군사적 측면에서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백서와 영국 정부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백서가 발표되자 일부 유대인 군사 조직들이 영국을 향해 무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이르군(Irgun)은 영국과의 휴전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스턴 갱(Stern Gang)은 휴전을 거부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계속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나치의 학살을 피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것을 영국이 가로 막고 있고, 따라서 영국이 그들의 주적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반영국 전선을 위해 독일과도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Baylis Thomas, [How Israel Was Won], Lexington Books, 1999, 44쪽  참고)

 

이르군 - Irgun Zevai Leumi 민족 군사 기구라는 뜻. 1937년에 트랜스 요르단을 포함하는 전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탄생. 위임 통치 시절 영국군과 아랍인들에 대한 테러 공격 벌임. 1948년 데이르 야신 학살 사건의 주범.

스턴갱 - 레히Lehi(이스라엘 자유 전사)라고도 함. 1939년에 아브라함 스턴(Abraham Stern)에 의해 만들어진 테러 조직.

 

유대인 이주 문제는 시오니스트들에게 ‘유대인 구출’의 문제이기 보다 국가 건설을 위한 인구 확보로써의 의미가 컸습니다. 거꾸로 영국으로써는 백서에서 말했듯이 불법 이민을 막겠다고 했는데 시오니스트들이 불법 이민을 추진하자 이것을 백서와 영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실은 배가 지중해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으로 접근하면 영국은 초반에는 이 배를 잡아 본래 떠나왔던 나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자 붙잡은 배와 난민들을 사이프러스(Cyprus)와 마우리티우스(Mauritius) 등으로 보내 유대인들을 난민촌에 수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시오니스트들은 나치의 학살을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의 이주를 가로 막는다고 영국을 비난하였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 식민 정부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은 테러, 폭파, 암살 등 다양한 형태로 벌어져 영국 정부를 더욱 괴롭힙니다. 1944년 11월6일 스턴갱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영국 정부 장관이었던 모인(Moyne)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1947년 3월31일에는 하이파에 있는 석유 시설을 파괴합니다.

 

시오니스트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강화되자 1946년 6월 영국 정부는 ‘아가사 작전(Operation Agatha)'을 벌입니다. 약 10만 명의 군과 경찰을 동원한 작전에서 영국은 유대인 정착촌들을 둘러싼 채 통행 금지를 내립니다. 또 유대인 기구 집행위원회(Jewish Agency Executive) 위원들을 포함해 약 3천 명 가까운 유대인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키부츠 야구르(Yagur)에서는 대량의 무기도 찾아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 달인 1946년 7월22일에 이르군이 영국 식민 정부의 주요 시설로 사용되고 있던 킹 데이비드(King David) 호텔을 폭파 합니다. 우유 통에 폭탄을 담아 터트리며 이루어진 공격으로 영국인, 아랍인, 유대인 등을 포함해 91명이 사망합니다.

 

또 1947년 3월1일에는 영국군 20명 이상을 살해합니다. 5월4일에는 자신들의 동료들을 빼내기 위해 아크레(Acre)에 있는 교도소를 폭파하기도 합니다. 7월12일에는 영국군 2명을 납치하여, 자신의 동료들이 7월29일에 처형된 뒤 이들을 처형합니다. 이 밖에도 이르군은 경찰서, 철도 등 영국 정부와 관련 있는 각종 시설을 파괴하고, 영국 관리들을 납치하기도 합니다. 유대인 불법 이민과 테러리스트 활동 자금 대부분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의 지원으로 마련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둔 영국 군인들은 처음에 팔레스타인으로 갈 때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학살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유대인들이 영국군을 향해 테러 활동을 벌이자 처음과는 달리 오히려 반유대, 친아랍 정서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또 영국 언론들은 영국의 청년들이 계속 희생되어야 하냐고 영국 정부를 압박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1942년 5월11일 유럽과 미국,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모인 600여 명의 시오니스트 대표들은 빌트모어 호텔에서 회의를 열고 ‘빌트모어 계획(Biltmore Program)'을 채택합니다. 빌트모어 계획은 발푸어 선언의 원래 목표 이행, 1939년의 백서 파기,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친 유대인 국가 건설, 유대군의 창설,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가 관리하는 제한 없는 이민 허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빌트모어 프로그램을 채택한 회의가 미국 뉴욕에서 열린 것에서 보듯이 이제 시오니스트들은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내 유대인들의 지원으로 국가 건설 작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빌트모어 계획은 민주적 국가 건설이라는 아랍인들의 요구는 완전히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 전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식민화 계획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영국에 대한 분노와 아랍인들의 유대인 이주에 대한 항의가 계속 되는 동안 영국은 미국과 함께 1946년 'AAC(앵글로-아메리칸 조사 위원회. Anglo-American Committee of Inquiry)'를 구성합니다. 영국으로써는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AAC는 조사기간 동안 유대인 난민 캠프와 주변 아랍 국가,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 지역 등을 방문하고, 아랍인과 시오니스트 양측 대표의 의견을 듣기도 합니다.

 

베니 모리스(Benny Morris)의 의견에 따르면 AAC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이들이 유대인 난민 캠프를 방문했던 일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에 있는 유대인 난민 캠프를 방문 했을 때 시오니스트들은 조사 위원들이 유대인의 비참한 상황을 느끼고, 해결 방법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Vintage, 2001, 177쪽 참고)

 

난민 캠프, 주변 아랍 국가, 팔레스타인 방문 등이 있은 뒤 AAC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을 내어 놓습니다. 여기에는 10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용, 유대인의 토지 구매 제한을 완화, 팔레스타인을 유엔의 식탁 통치 아래 두는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이 제안을 다시 검토한 뒤에 ‘모리슨-그레디 안(Morrison-Grady Plan)’을 내어 놓습니다.

 

이 안에는 ‘유대인 10만 명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팔레스타인을 제한된 기간 동안 영국 신탁 통치 아래 두고’ ‘각자 따로 내부 문제를 관리하는 두 개(아랍과 유대)의 준 자치 지역의 연방화’, ‘영국의 예루살렘 및 네게브 사막 지역 지배’, ‘방위 ․ 외교 ․ 관세 분야 등은 영국이 관리’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안은 미국이 요구하는 유대인 10만 명의 이주와 영국이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와 네게브 사막의 군사 기지 설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안에 대해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는 유대인 이주 부분에 대해서만 인정을 하며 ‘유대인 국가’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아랍인들은 즉각적인 아랍의 독립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이라크, 레바논 등지에서 시위를 벌이고 모리슨-그레디 안을 거부하였습니다.

 

시오니스트들이 영국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었던 다른 방법 하나는 미국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그에 비해 미국이 새롭게 세계 패권 경쟁에서 선두주자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미국에게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은 석유 확보를 위한 전략지역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인 1943년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석유가 쏟아져 나오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를 지키는 것이 미국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내외적인 저항과 압력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 체제를 보호해 주면서 석유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합니다. 그 대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1950년~2000년까지 미국 무기 수출액의 약 25%에 달하는 금액의 무기를 사들입니다. (

William R. Clark, [Petrodollar Warfare - Oil, Iraq and the Future of the Dollar], New Society Publishers, 2005, 43, 45쪽 참고)

 

이렇게 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중동 지역을 나눠 먹었던 영국이 패권 경쟁에서 미국에 뒤쳐지면서 석유 생산지에 대한 영향력도 미국이 점점 강하게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석유는 경제적 이익, 군사적 유용성과 함께 석유 공급권을 쥔 국가가 다른 국가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는 정치적 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석유와 아랍 국가, 팔레스타인과 시오니즘에 대한 입장이 미국 정부 내에서 갈리게 됩니다. 국무부, 국방부 등은 석유를 가지고 있는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일방적으로 시오니스트들을 지원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에 비해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이라는 동정적인 여론과 시오니스트 조직들의 강력한 로비를 받은 미국 의회는 유대인 국가 건설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에 지지를 보냅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5년 2월에 있었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자신을 ‘시오니스트’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또 루스벨트에 이어 대통령이 된 헤리 트루만(Harry Truman)은 유대인 난민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지지하고 나섭니다. 트루만이 시오니스트들의 계획에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은 선거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수백만에 이르는 유대인들의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트루만은 아랍권에 있는 미국 대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시오니즘의 성공을 열망하는 수 십 만 명에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제 유권자 가운데는 수 십 만의 아랍인이 없습니다. - Mike Berry and Greg Philo, [Israel and Palestine], Pluto Press, 2006, 23쪽

 

그리고 1946년 10월4일 트루만은 ‘욤 키푸르(Yom Kippur)'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의 분할과 유대인 국가 건설, 그리고 실질적인 유대인 이민의 시작 등을 지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트루만의 성명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을 뒤집는 것입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트루만의 성명이 발표된 몇 달 뒤인 1947년 2월14일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겨 버립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국에 넘긴 것은 시오니스트들의 영국에 대한 투쟁과 미국의 압력,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치 무대에서 약해진 영국의 영향력,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전략 지역으로 삼지 않는다는 정치적 판단 등을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이제 중동 지역에서 요르단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