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6- 백서 White Paper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22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백서 White Paper

 

1936~1939년 대투쟁이 아랍인의 정치 역량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태도 변화를 다시 한번 이끌어 내었습니다. 1939년 초 영국에서는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유대인이 참여하는 성 제임스 궁 회담(St. James Palace Conference)이 열렸고, 이 회담에서 영국은 2민족 국가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 이 안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1939년 5월에는 영국이 백서(White Paper)라는 것을 내어 놓습니다.

 

백서의 주요 내용은 ①10년 안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탄생 시키고, 아랍인과 유대인은 양 측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정부에 함께 참여한다.(1장) ②앞으로 5년 동안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는 75,000명으로 제한하며, 5년 이후에는 아랍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의 추가 이민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영국 정부는 유대인들의 불법적인 이민을 감시할 것이다.(2장) ③아랍인으로부터 유대인에게로의 토지 판매는 제한된다.(3장) 등입니다. ('British White Paper of 1939', Jewish Virtual Library, http://www.jewishvirtuallibrary.org 참고)

 

1939년 5월에 영국이 백서를 내어놓은 주요한 이유는 1939년 9월에 시작된 2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반영국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성 제임스 궁 회담이 실패한 1939년 3월에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였고, 백서가 나온 시점인 1939년 5월은 세계대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영국은 자신이 가진 힘을 유럽에 보다 집중해야 했습니다. 또 1차 세계대전 이후 이라크,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에서 커지고 있는 반제 민족주의 운동을 가라앉히고 아랍/중동 지역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주변 아랍국의 반영국 정서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제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발푸어 선언을 뒤집는 백서로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랍인과 독일의 협력 문제입니다.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독일+이탈리아 등이 경쟁을 벌이자 독일과 이탈리아는 아랍인들의 대영국 투쟁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거꾸로 아랍인들은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반제국주의적 발언을 해 왔던 이라크의 왕 가지(Ghazi)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 또는 살해된 뒤 이라크에서는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1941년에 이라크 군인들이 반영국 쿠데타를 일으켜 독일과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Tariq Ali, [Bush in Babylon - The Recolonisation of Iraq], Verso, 2004, 6162쪽 참고)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Husayni)와 망명 중인 수 백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이라크에서의 쿠데타를 지원합니다. 또 이라크에서 알 후세이니는 라디오를 통해 파트와(fatwa)를 발표하고 모든 무슬림에게 영국에 맞서는 성전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아민 알 후사이니 - 1985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남. 이슬람 성직자로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태리와 독일 등지에서 망명 생활. 전쟁이 끝난 뒤에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74년에 베이루트에서 죽음.

 

하지만 쿠데타는 실패하고 알 후세이니는 독일로 가서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정치 선전을 도우면서 아랍과 무슬림들이 독일을 지원케 합니다. 또 1941년 11월28일 히틀러를 만난 자리에서 알 후세이니는 1차 세계대전에서 아랍인들이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싸웠듯이 이젠 영국에 맞서 싸우는 아랍인의 투쟁을 조직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전쟁 이후에 아랍 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알 후세이니의 사례는 하나의 예이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써는 아랍인들이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과 손을 잡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석유에 관한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가 옛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나눠 먹을 때 단순히 영토만 나눠 먹은 것이 아니라 영토를 나눠 먹으면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의도까지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라크가 그 주된 대상이었습니다. (앤써니 샘슨,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책갈피, 2000, 100쪽 참고) 

 

석유는 석유회사의 수익뿐만 아니라 항공기, 자동차, 전차 등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석유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포쉬는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석유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직 패배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1909년에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 나중에 BP-British Petroleum으로 이름 바꿈)가 탄생하여 영국 정부가 주식 51%의 소유합니다. 또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있던 이라크에서 1927년에 대규모 유전이 발견됩니다. 중동 지역의 석유 생산량은 1921년에 연간 1천6백8십만 배럴이던 것이 1939년에는 1억1천4배만 배럴로 늘어납니다. 또 이라크의 석유는 송유관을 거쳐 팔레스타인 하이파로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으로써는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석유 생산지를 지키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영국 정서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이런 시도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노를 완전히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1936년에 대투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아랍인들의 투쟁에 대해 폭격, 고문, 살인, 추방 등으로 맞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랍인들 사이에는 1916년 이후 영국에게 속아왔다는 생각이 퍼져있었습니다.

 

백서에 대해 유대인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백서의 내용대로 하자면 유대인이 다수를 이루는 국가, 그리고 유대인이 다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대규모 이주, 국가 건설에 기반이 되는 토지의 확보 등이 모두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서에 대한 시오니즘 운동의 대응은 팔레스타인으로의 불법 이민을 계속하는 것, 영국 정부를 향해 무력 투쟁에 나서는 것, 시오니즘 운동의 후견인을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꾸는 것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서 2민족 1국가를 기본으로 하는 백서는 실행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아랍인과 유대인이 이런 저런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토지 구매와 판매 제한조치도 종이 위에만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