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4- 영국의 지배 1 : 1920년대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38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영국의 지배 1 : 1920년대

 

1922년 7월24일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은 영국에게 위임 통치라는 이름의 지배권을 줍니다. 하지만 영국의 위임통치에 대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즉각 반대하며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을 요구합니다. 게다가 위임 통치 규약 전문에는 위임 통치국이 발푸어 선언의 이행을 책임진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아랍인들에게 위임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결권의 박탈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발푸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까지 담겨 있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위임 통치 규약은 Rashid Khalidi, [The Iron Cage - The Story of the Palestinian Struggle for Statehood], Beacon, 2007, 282쪽 참고)

 

 

그리고 4조에는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의 이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또는 다른 문제에 대해 팔레스타인 행정부에 조언을 하거나 협력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유대인 기구의 설립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준 국가 기구로써의 역할을 하는 유대인 기구(Jewish Agency)가 태어나게 되고, 유대인 기구는 영국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유대인의 대표라는 위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영국의 위임 통치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다시 한번 국제적으로 승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90% 가량을 차지하는 아랍인들에게는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반면, 전체 인구의 10% 가량을 차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정치적 특권을 준 것입니다. 이후에도 영국은 아랍인들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다가 1936~1939년 대투쟁이 있고서야 약간의 입장 변화를 보입니다.

 

한편,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민주적인 국가를 수립하자는 아랍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구의 90%가량이 아랍인인 상황에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의회와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곧 시오니즘 운동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임 통치는 아랍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아랍인들의 요구는 영국도 유대인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1920년대 초부터 아랍-유대 두 집단간의 충돌이 커졌습니다. 1921년 5월에는 자파(Jaffa)에서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져, 양측의 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군인과 경찰이 아랍인들을 공격하였고, 이 일로 200여명의 유대인과 120여명의 아랍인이 죽거나 다칩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사태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헤이크레프트 위원회(Haycraft Commission)를 구성합니다. 이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이 사건은 자발적이며 반유대적인 경향이기보다 반시오니스트 경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원회는 아랍인들의 폭력을 비난하면서도, 다수의 유대인 이주로 인해 아랍인들이 아랍인을 종속 상태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의 이민 문제라면 다른 하나는 토지 문제였습니다. 시오니스트들에게 토지 확보는 시오니즘 운동 초기부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랍인 지주들에게 높은 가격을 쳐주면서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 결과 지중해 땅값이 1925년부터 10년 동안 3배 내지 4배로 뛰었고, 1935년에 경작 가능한 토지의 12%를 유대인들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다테야마 료지, [팔레스타인 그 역사와 현재], 가람기획, 2002, 40쪽 참고)

 

유대인들이 토지 구매를 늘이면 늘일수록 나타나는 현상은 아랍인 소작농들이 땅을 빼앗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땅을 사들인 뒤에 소작인들을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토지를 빼앗긴다는 것은 농민들이 빈곤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회문화적인 환경까지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오니스트들에게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 유대인 이민 문제였습니다. 1919~1931년 사이에 11만 7천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왔으나 정치 ․ 경제적 어려움으로 많은 수가 다시 팔레스타인을 떠났습니다. 1924~1931년 사이에는 이민 100명당 29명이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27년에는 도착하는 수보다 떠나는 사람의 수가 5:3으로 더 많았습니다. (막심 로댕송, [아랍과 이스라엘의 투쟁], 두레, 1991, 39쪽 참고)

 

그러다 1929년에는 또 다시 아랍인-유대인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집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16차 시오니스트 대회에서 야보틴스키가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 연설에서 야보틴스키는 유대 민족의 조국이라는 것은 유대인 국가를 의미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8월15일 시오니스트 조직인 베이타르(Beitar. 시오니스트 청년 운동이라는 뜻을 가진 극우 청년 조직. 1919년에 야보틴스키가 설립.

)가 무슬림과 유대인 모두에게 성지인 예루살렘의 서쪽벽(통곡의 벽) 앞에서 반아랍 시위를 벌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시오니스트 깃발을 들고 서쪽벽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헤브론(Hebron)에서는 6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을 입고, 사파드(Safad)에서도 20여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됩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을 공격합니다. 결국 이 충돌로 유대인 133명이 사망하고 339명이 부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아랍인 116명이 사망하고 232명이 부상을 입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1930년 쇼 위원회(Shaw Commission)을 구성하여 이 사건에 대한 조사에 나섭니다. 보고서에서 쇼 위원회는 아랍인 농민들의 생활 조건이 후퇴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영국의 친시오니스트 정책으로 인해 아랍인들의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임 통치 규약에서 발푸어 선언을 뺄 것과 유대인의 이민과 토지 구매를 제한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영국 정부가 아랍인들의 요구를 일정정도 수용하는 식의 보고서를 만든 이유는 주변 중동 지역의 정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1930년에는 이라크에 대한 위임통치가 중단되고, 1922년에는 이집트가 독립하는 등 주변 국가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으로써는 아랍권에서 반영국 민족주의 운동이 커가는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