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3 - 1차 세계대전과 발푸어 선언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46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1차 세계대전과 발푸어 선언

 

19세기말부터 일부 아랍인들 사이에 유대인 이주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유대인들의 움직임이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14년에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시오니즘 운동의 영향력이 팔레스타인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차 세계대전은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먼저 오스만 투르크가 독일 ․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을 잡고 영국 ․ 프랑스 등과 전쟁을 치릅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제국으로써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가 확실히 몰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반면에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영국의 입지가 점점 강해집니다. 특히 영국으로써는 팔레스타인 지역 옆에 있는 수에즈 운하를 지키고, 석유가 잔뜩 묻혀 있는 중동 지역으로 가는 길목을 장악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1908년 터키에서 권력 교체가 일어나 공화정이 선언된 뒤, 터키 정부는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 지역을 직접 통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혁명으로 쫓겨난 술탄 압둘 하미드(Abdul Hamid)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하심 가문의 후세인이 관리하고 있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터키 정부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후세인은 자기 아들인 압둘라(Abdullah)를 영국에 보내 터키에 대항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합니다. 영국은 처음에는 무기 공급 등 후세인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1915~1916년 사이에 일명 ‘후세인-맥마흔 편지(Husayn-McMahon correspondence)’라는 것이 오고갑니다. 이 편지의 주된 내용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세계대전에 참여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해 아랍인들이 봉기를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이 끝난 뒤에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 하심 가문이 지배하는 아랍 독립 국가의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1916년 6월5일 아랍인들의 봉기가 시작됩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1916년에 러시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가 협상 참가자들의 이름을 따서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 협정 내용은 Sykes-Picot Agreement', Answer.com, http://www.answers.com/topic/sykes-picot-agreement )’이라는 비밀 협정을 맺어 전쟁 이후 오스만 투르크 지역을 어떻게 나눠 먹을지 결정합니다. 협정의 주된 내용을 보면 1조와 2조에서는 중동 지역을 지도와 같이 나눠서 A지역과 푸른색 부분은 프랑스가, B지역과 붉은색 부분은 영국이 차지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프랑스가 지금의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그리고 영국이 지금의 요르단, 이라크 중남부 지역을 삼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조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러시아와 다른 동맹국들과의 협의에 따라 관리하는 국제관리지역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지도]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년

출처 : Passia http://www.passia.org

‘사이크스-피코’협정은 중동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정의 어느 곳에서도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흔적은 없습니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과 손을 잡았고, 거꾸로 얼지 않는 항구를 원했던 러시아는 영국 ․ 프랑스 등과 손을 잡은 것이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결국 중동 지역이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땅 따먹기 협정이었습니다. 또 이 협정은 아랍인에게 전쟁 이후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했던 ‘후세인-맥마흔 편지’의 내용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밀협정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정부가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위해 영국 정부를 설득하러 나섭니다. 영국 정부 안에서도 허버트 사무엘(Hebert Samuel)과 아서 발푸어(Arther Balfour) 같은 친시오니즘 계열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시오니스트들에게 협조합니다. 그리고 1916년부터 영국 정부와 시오니스트 사이에 공식 협상이 이루어져 1917년 11월12일 발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됩니다.

 

발푸어 선언은 짧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을 지지하며,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비유대인 사회의 시민적 ․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발푸어 선언이 중요한 까닭은 시오니스트들의 계획을 제국주의 국가가 처음으로 공식 인정 ․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발푸어 선언에서 아랍인들의 존재는 정치적 실체를 가지지 않는 ‘비유대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주어진 조국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적 특혜와 달리 아랍인들에게는 시민적 ․ 종교적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 아랍 국가 건설 등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인 아비 쉬라임(Avi Shlaim)의 말을 빌리자면 발푸어 선언은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의 문을 열고 그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황금 열쇠’를 준 셈입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보면 발푸어 선언은 영국이 1916년에 프랑스와 맺었던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17년이면 영국군은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영국이 사실상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영국은 왜 시오니스트들을 지원하고 나섰을까요? 먼저 독일이나 러시아 지역 유대인과의 관계입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박해 받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들은 자국이 러시아와 싸운다는 이유로 해당 국가를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이들에게 줄 ‘당근’이 필요했습니다. 또 영국은 유대인이 러시아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러시아의 참전과 지원을 끌어당길 수단으로 유대인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국 그리고 미국 내 유대인과의 관계입니다. 영국은 미국 내에 있는 부유한 유대인들의 지원을 원했습니다. 또 미국 내 유대인들을 움직여서 미국이 영국을 지원하도록 만들려는 의도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의 후세인-맥마흔 편지,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마찬가지로 발푸어 선언도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채 외부 정치 세력들 간의 이해 관계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918년 2월 이태리와 프랑스도 발푸어 선언을 승인하였습니다.

 

하심 가문의 후세인 또한 아랍인과의 약속을 깨지 않을 것이라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발푸어 선언을 받아들입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왕국 건설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이들은 시오니스트들과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1919년 1월3일 영국에서 후세인의 아들인 파이살(Faysal. 1885년 헤자즈(Hejaz)에서 태어남.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의 셋째 아들. 1차 세계대전에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는 아랍인 봉기 일으킴. 1921~1933년까지 이라크의 왕)과 시오니스트 기구의 하임 바이즈만(Haim Weizmann. 874년 러시아에서 태어남.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새로운 폭탄 제조 지원. 1918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1920년에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 의장이 됨. 1948년에 이스라엘의 첫 대통령이 됨. 1952년 죽음) 사이에 ‘파이살-바이즈만 협정(Faysal-Weizmann Agreements)’이란 것이 서명됩니다.

 

이 협정을 통해 파이살은 팔레스타인으로1의 대규모 유대인 이주와 정착을 인정하고, 시오니스트 기구는 시리아에 왕국을 세우려는 파이살의 요구를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파이살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고, 시리아에 대해서는 프랑스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의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계획에 대한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습니다. (막심 로댕송, ‘역사적으로 본 이스라엘’, 장 폴 사르트르 엮음, [아랍과 이스라엘 - 그 분쟁의 뿌리를 파헤친다], 시공사, 1991, 47쪽  참고)

 

1919년 7월 다마스커스에서는 시리아 의회가 소집되고 여기서 시리아의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이 때의 시리아라고 하면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합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1920년 3월8일에는 의회가 파이살을 왕으로 하는 독립 국가의 수립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1920년 7월 군대를 다마스커스로 보내 작은 규모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파이살을 하이파(Haifa)로 쫓아 버립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에서는 시리아를 지지하는 집회와 투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영국은 다마스커스에서 쫓겨난 파이살을 1921년에 이라크의 왕으로 만듭니다.

 

프랑스군이 다마스커스로 진군하기 전, 1920년 4월에는 산 레모(San Remo) 회의가 열려 전후 땅 따먹기를 합니다. 여기서 프랑스와 영국이 위임통치라는 이름의 식민화 계획을 가지고 중동 지역을 나눠 먹습니다. 프랑스가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영국이 지금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이라크 지역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두 개로 나누는데 요르단 강 동쪽은 파이살의 형제인 압둘라(Abdullah.

1882년 메카에서 태어남. 영국에 의해 트랜스 요르단의 왕이 됨. 시오니스들과 협력하여 1948년 전쟁에서 서안지구를 자신의 왕국으로 합병. 1951년에 암살됨)가 지배하는 트랜스 요르단이 되고, 요르단 강 서쪽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팔레스타인이 처음으로 정치적 구역으로 나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야보틴스키. 1880년 러시아에서 태어남. 1903년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 수정주의 시오니즘의 대표적인 인물. 1940년에 죽음

 

영국의 지역 분할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에 대해서는 시오니스트들 사이에도 반대의 입장이 나옵니다. 야보틴스키(Jabotinsky)가 주도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이스라엘 땅이 요르단 강 동쪽(지금의 요르단)까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노동 시오니즘과 수정주의 시오니즘 사이에는 논란이 계속 됩니다. 즉, 노동 시오니즘은 정치 상황을 고려하여 팔레스타인 일부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운 뒤 점차 확대해 가자는 것이고, 수정주의 시오니즘은 유대 국가의 건설 지역이 요르단 강 서쪽과 동쪽 모두임은 물론이고 단계적인 것이 아니라 즉시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대 국가임을 선언하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