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5- 영국의 지배 2 : 1930년대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29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영국의 지배 2 : 1930년대

 

1920년대 말을 거치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유대인 자금이 늘어나고, 이는 유대인 이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고 토지 구매가 증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929년에 유대인 토지 소유가 30만 두남에서 1930년에는 125만 두남으로 늘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들인 토지의 상당부분은 팔레스타인의 유력한 가문들이나 팔레스타인에 살지 않는 부재 지주들로부터 사들인 것인데, 이들은 전체 팔레스타인 사유지 가운데 2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은 압둘 라흐만 파샤(Abdul Rahman Pasha)로 그는 지금의 시리아 지역인 다마스커스에 살면서 20만 두남 가량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기구는 전체 지출 가운데 40% 가량을 토지 구매와 농촌 지역의 식민화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930년대 중반부터 유대인의 이주도 대규모로 증가하여 1933년에 25만명이었던 유대인 인구가 1939년에는 50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최창모, [이스라엘史],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4, 273쪽 참고)

 

이 시기는 토지나 인구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식민화가 가속화됩니다. 유대인 자본가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각종 인허가의 90%를 독점하면서 시오니스트들은 도로 건설, 사해의 광물 개발, 전기, 항만 등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35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1,212개의 공장 가운데 872개의 공장을 시오니스트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또한 고용과 상품 소비에 관해서도 유대인들은 이슈브와 히스타드루트(Histadrut. 1920년에 설립된 노동자 총연맹. 시오니스트 정치 기구의 역할을 하였음)를 중심으로 유대인 노동자의 고용과 유대인 생산물 소비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아랍인과는 분리된 유대인 경제를 만들며 경제력을 장악해 갔습니다.

 

또 1903년에 설립된 앵글로-팔레스타인 은행(Anglo-Palestine Bank)은 중요한 신용 기관으로 도시와 정착촌들을 건설하였고, 유대 민족 기금(Jewish National Fund)은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세금과 기부금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 팔레스타인 건설 기금(Palestine Foundation Fund)는 기금과 은행의 돈을 분배하는 역할을 하면서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위해 약 2천만 파운드를 지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경제를 장악해 가는 동안 아랍인 소작 농민들은 땅을 잃고 처음에는 농촌 지역 농업 노동자가 됩니다. 그 숫자는 1931년에 전체 농업 인구의 30% 가량을 차지하였고, 1936년 무렵 급속도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경작지를 찾을 수도 없고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도시 지역으로 나가 일자리를 찾습니다.

 

1933년에는 이즈 알-딘 알-까쌈(Izz al-Din al-Qassam)을 중심으로 하이파 지역에서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어 유대인들과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35년 이즈 알-딘 알-까쌈은 영국군에게 살해됩니다. 이즈 알-딘 알-까쌈의 투쟁과 죽음은 다른 민족주의 운동 진영의 비조직적이고 미온적인 태도에 비해 아랍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즈 알 딘 알 까쌈 - 1895년 시리아에서 태어남. 1920년대에 하이파 지역으로 이주하여 알-이스티크랄(al-Istiqlal) 이슬람 성원에서 활동. 1933년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1935년 영국 군에게 살해됨. 이 사람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하마스(Hamas)의 군사 조직의 이름이 이즈 알-딘 알-까쌈.

 

결국 민족주의 운동 지도부와 아랍 고위 위원회(Arab Higher Committee. 영국 위임통치 시기 동안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조직)도 아래로부터 돋아나는 민중들의 요구에 밀려 1936년 5월에 총파업을 선언하고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유대인 이주의 중단, 유대인에 대한 토지 판매 중단, 민주적인 정부 구성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요구에 대해 영국 정부는 1936년 7월30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탄압에 나섭니다. 활동가들은 체포, 처형, 추방 되었고 이들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아랍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파업은 1936년 10월에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파업은 멈췄으나 아랍인들의 투쟁은 1939년까지 무장투쟁 등의 형태로 계속되었고, 투쟁의 방향은 주로 유대인이 아니라 영국 정부를 향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팔레스타인 주둔 영군의 수를 증강하고 아랍인 마을을 공중 폭격하며 탄압하였습니다. 그 결과 5천 명 가량이 살해 되고, 1만 명 가량이 부상을 입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떠났고, 수 백 채 이상의 집들과 많은 농지가 파괴되었습니다. 당시 아랍인 인구가 1백만 가량 되었던 것에 비교해 보면 성인 인구의 10% 이상이 죽거나 다치거나 또는 감옥에 갇히거나 외국으로 떠났다는 말이 됩니다.

 

1936~1939년에 걸친 아랍인들의 투쟁과 영국의 억압은 이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아랍인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투쟁 조직들이 무너지고, 활동가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히고 또는 외국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아랍인들이 1947~1949년 전쟁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유대인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이 시기동안 아랍인 경제가 마비되자 유대인 경제가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또 영국 정부와 군대는 유대인들이 생산하는 군수품을 사들이고, 유대인 고용을 확대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보면 영국은 유대인들을 경찰로 고용하여 아랍인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하였고, 유대인들은 아랍인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보다 강한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랍인들이 장기간에 걸친 투쟁을 벌이자 영국으로써도 탄압만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1936년 11월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필 위원회(Peel Commission)를 팔레스타인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1937년 7월 보고서를 발표하는데, 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을 ①예루살렘 지역과 자파(Jaffa)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위임통치령 ②텔 아비브와 하이파, 나자렛 등을 포함하는 중서부 해안과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국가 ③나머지 지역에 아랍 국가를 만들어 이를 트랜스 요르단에 통합 시키고 ④두 국가를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영국과 군사 동맹을 맺는 분할안을 내어놓습니다.

 

 

[지도] 필 위원회의 팔레스타인 분할안, 1937년

출처 : Passia http://www.passia.org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안을 놓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한 편은 야보틴스키의 수정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유대인 국가는 팔레스타인과 트랜스 요르단 전역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한 편은 바이즈만과 벤 구리온(Ben-Gurion. 1886년 폴란드에서 태어남.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1935년에 유대인 기구 집행위원회 의장이 됨. 19481953년 그리고 19551963년까지 이스라엘 총리. 1973년 죽음)을 중심으로 분할안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입니다. 벤 구리온의 경우는 유대인 국가를 세운 뒤 무력을 강화하여 분할안을 파기하고 유대인 국가를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랍인의 경우는 분할안이 실행되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 국가에 할당된 지역에 사는 20만 명 가량의 아랍인이 이송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또 서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경작 가능한 토지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필 위원회의 제안을 거부하고 투쟁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결국 분할안은 실행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