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02- 테오도르 헤르즐과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

순돌이 아빠^.^ 2010. 6. 13. 13:57

이스라엘  건국 이야기 - 테오도르 헤르즐과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

 

(이 글에서는 시오니즘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이 운동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시오니스트(Zionist)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시오니즘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게 된 테오도르 헤르즐(Theodor Herzl, 1860~1904)은 1860년 5월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납니다. 유대인 운동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헤르즐은, 1894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각 사회에 동화되는 방식으로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896년에 ‘유대인 국가 - 유대인 문제에 대한 현대적 해결 시도(The Jewish State - An Attempt at a Modern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라는 글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시오니즘 운동이 헤르즐을 통해 본격적인 식민주의 정치 운동으로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국가’에서 헤르즐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해 몇 가지를 얘기를 합니다. ①유대인들에게 지구상 어느 곳에 적당한 크기의 땅을 줄 것 ②유대인 이주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 ③고려할 수 있는 지역은 아르헨티나와 팔레스타인 ④그런데 해당 지역의 정부와 원주민들은 유대인 이주를 반대할 가능성 있음 ⑤그래서 유럽국가의 보호와 지원 필요함 등입니다.(‘The Jewish State', Jewish Virtual Library, http://www.jewishvirtuallibrary.org 참고)

 

팔레스타인 식민화에 앞장 섰던 테오도르 헤르즐.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유대인 국가’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제국주의의 흐름과도 닮은 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회주의 정당의 극히 일부와 얼마 안되는 혁명적 자유주의 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식민이란 진보와 문명의 전파(傳播)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 막심 로댕송, ‘역사적으로 본 이스라엘’, 장 폴 사르트르 엮음, [아랍과 이스라엘 - 그 분쟁의 뿌리를 파헤친다], 시공사, 1991, 34쪽

 

이런 헤르즐의 주장은 유대인에 대한 학대가 서유럽에 비해 강력했던 동유럽 지역 유대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습니다. 하지만 호베비 시온 운동은 헤르즐과 그의 동료들의 생각에 반대를 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를 건설한다는 식의 주장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오스만 투르크 정부를 자극하여 오히려 이민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 팔레스타인과 서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은 헤르즐과 그의 동료들의 주장이 팔레스타인 아랍인 또는 유럽의 반대유주의를 자극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습니다.

 

1897년 8월29일부터 31일까지 스위스 바젤에서는 헤르즐의 주장으로 1회 세계 시오니스트 대회가 열립니다. 여기서 시오니즘 운동의 연합 조직으로 시오니스트 기구(Zionist Organizaion. 이스라엘 건설의 정치적 ․ 조직적 기반이 되는 시오니스트 조직. 1960년에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로 이름 바꿈)가 탄생합니다. 헤르즐이 의장을 맡았던 1차 대회에는 주로 동유럽 출신을 중심으로 24개국에서 온 약 2백 명이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헤르즐은 이 대회를 독일 뮌헨에서 개최하려 하였으나 뮌헨 지역 유대인들의 반대로 바젤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1차 대회를 통해 ‘시오니즘의 목표는 이스라엘 땅에 공법의 보호를 받는 유대 민족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어 바젤 강령 4원칙을 채택하는데 ①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 증진 ②유대인의 조직화 ③유대 민족의 정서와 의식 강화 ④시오니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정부의 동의 획득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들과 어떻게 같이 살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없고 오직 유대인의 필요와 강대국의 지원으로 유대 국가를 세우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시오니스트들이 현지 주민들을 정치적 실체나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는 1948년 이스라엘 건설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글에서는 영어의 Jewish national home을 ‘유대 민족의 조국’으로, Jewish homeland는 ‘유대인의 조국’ 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Jewish state의 경우에는 ‘유대인 국가’로 옮깁니다. 왜냐하면 초기 시오니즘 운동이 아랍인이나 다른 국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국가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담은 조국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시오니스트들이 ‘조국’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그 속에 ‘국가’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1차 대회 이후 유대인들 사이에 시오니즘에 대한 반대 입장이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정통적인 랍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유대인들이 이산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이런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의 힘으로 유대 국가를 만들겠다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시오니즘에 대한 반발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 대해서도 정치 활동을 강화합니다.

 

그런 한편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지 하기 위한 방법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정부의 지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1989년 헤르즐은 오스만 투르크와 동맹 관계에 있던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를 만납니다. 그리고 1901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인 압둘 하미드(Abdul Hamid) 2세를 만나지만 둘 다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다시 헤르즐은 영국 정부를 설득하러 나섭니다.

 

헤르즐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 없이 시오니즘은 성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르즐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면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유대인의 돈으로 오스만 투르크 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게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또 독일과 영국에게는 유대인 국가의 건설이 제국을 확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제안 합니다. 결국 시오니스트들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들과 손을 잡은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이미 쇠퇴해가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에 비해, 영국은 19세기부터 오스만 투르크 정부와 ‘외국인 거류 협정’을 맺고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강화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1903년에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 영국의 지배권 아래에 있는 유대인의 조국을 만들라고 ‘우간다 안(Uganda Program. 지금의 케냐 지역을 말함)’을 제안합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에서의 학살을 피해 자국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자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아프리카에 백인들이 사는 지역을 만듦으로써 식민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을 했습니다. 이 우간다 안을 두고 1903년에 개최된 6차 시오니스트 대회에서 큰 논란이 벌어집니다. 논란은 유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어느 지역이든 관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과 팔레스타인 아니면 어느 지역도 받아들 수 없다는 다른 시오니스트들 사이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헤르즐도 우간다 안의 수용을 고려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차 대회에서는 우간다가 유대인들의 이주에 적합한지 여부를 조사하기로 하였습니다.

 

1904년에 헤르즐이 죽고 그 다음해인 1905년 7차 대회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는 동부 아프리카 지역이 다수의 유대인들이 정착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오니스트 기구는 영국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하였고, 이에 반발해 자치주의자들은 시오니스트 기구를 떠나 ‘유대인 자치 협회(Jewish Territorial Association)'를 만들게 됩니다. (‘Zionist Congress', Jewish Virtual Library, http://www.jewishvirtuallibrary.org 참고)

 

시오니스트들이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해서 시오니스트-영국 사이의 협력 관계가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중동 지역으로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영국과 영국 제국주의의 지원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오니스트들 사이의 협력 관계는 1930년대까지 계속됩니다.

 

1904부터 러시아에서의 학살을 피해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03년 이전의 이주가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던 것에 반해 1904년부터 시작된 이주는 시오니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때론 새로 이주한 유대인들과 과거부터 거주하던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의 세속주의 경향에 대해 이단이라고 하거나 성매매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을 두고 시오니즘 운동에게 책임을 묻기도 합니다. 거기에 유대인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두 집단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오니스트들은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그 당시까지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을 피해 팔레스타인 서부 해안가에 있는 텔 아비브(Tel-Aviv)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고 시오니즘 운동을 키워갑니다. 또 1903년에 앵글로-팔레스타인 은행(Anglo-Palestine Bank)이 문을 열고, 1905년에는 유대 민족 기금(Jewish National Fund)이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 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오니즘 운동은 공동 거주지(이슈브 Yishuv)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은행을 운영하고 세금을 거두는 등 사회적 기능을 확대합니다.

 

한편 1908년에는 터키에서 젊은 장교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반 오스만 혁명이 성공을 거두어 술탄 압둘 하미드가 권력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새 정부를 만든 이들은 술탄제를 폐지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이 섞여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 터키화를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아랍인들의 자치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을 탄압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오스만 투르크 각 지역에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보다 성장합니다. 유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아랍인들 사이에는 서서히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