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와 제자인 혜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답니다.
“제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이에 달마는 말하였다.
“어디 자네 마음이라는 것을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진정 시켜 줌세.”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혜가는 스승에게 오랫동안 마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달마는 대답하였다.
“자, 이제 내 이미 자네 마음에 평화를 주었네!”
무언가 멋진 얘기인 것 같기도 하고,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라’라는 말처럼 왠지 뭔가 아리까리숑숑한 말인 것도 같고 그러네요.
과학적 인식의 과정은 단어를 개념으로 상승시키면서 전개된다. 단어는 사물을 지시한다. 하지만 단어 자체가 그 지시되는 사물의 속성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단어 또는 공장이란 단어가 사랑과 공장의 속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 이종영, ‘노동의 개념’ 가운데, 진보평론 2010년 봄호, 181쪽
앞의 혜가의 얘기로 하자면 혜가가 진정시키고 싶어 했던 마음, 우리가 알고 있고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그 마음이 사실은 진짜 마음이 아닐 수도 있는 거지요. 진짜 마음이 아니니 그 마음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을 겁니다. 빈 밥그릇에 숟가락질 한다고 배를 불릴 수는 없으니깐요.
노동? 그게 뭐야?
노동, 노동자, 노동운동, 노동조합, 육체․정신 노동,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등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노동이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
저희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강조하셨던 말이 ‘니는 절대 노동을 해서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머리로 먹고 살아야 된다’였지요. 저희 아버지에게 노동은 힘든 것, 몸으로 하는 것, 더러운 것, 못 배운 사람들이 하는 것, 가난해 지는 것, 업신여김 당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쉽게 쓰는 그 ‘노동’이란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혜가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그 마음이 무언지 모름으로써 진정시키지 못했듯이 노동이란 말이 무언지 모르면 노동과 관련된 많은 것들도 알 수 없겠지요.
일반적으로 노예들은 생산수단적 존재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노예들이 노동의 구상을 간직하고서 자율노동을 행하는 한에서, 그들은 아직 완전한 생산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다. 아직 인간적 기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강제노동을 행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자는 자율노동을 행하는 노예보다 더욱 생산수단에 가까운 성격을 갖는다. - 이종영, ‘노동의 개념’ 가운데, 진보평론 2010년 봄호, 192쪽
어,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노예보다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자의 처지가 더 비인간적이고 생산수단에 가깝다니... 옛날 옛날보다 지금이 더 나빠졌다는 거야? 우리가 노예보다 못하다니 이 무슨 자존심 상하는 소리...
잠깐, 잠깐. 자존심 상해하기 전에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노동하고 있는지를 보지요. 기계와 뭐가 다른지를 보면 되겠네요.
기계 : 주인이 필요한 시간에 시작 단추를 누르면 돌아간다.
임금 노동자 : 좋거나 싫거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한다.
기계 : 주인이 입력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임금 노동자 : 사장이나 관리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기계 : 고장 나거나 낡으면 버린다
임금 노동자 : 다치거나 늙거나 하면 버린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서 보듯 조선시대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수확한 쌀의 상당 부분을 가져다 받쳐야 했지만 어쨌거나 일을 하는 과정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언제 밭에 나가고 언제 새참을 먹을지 풀을 오늘 뽑을 지 내일 뽑을지는 알아서 하는 거에요. 일하다 강냉이 밭 사이에서 부부가 거시기를 즐겁게 하든 말든... ^.^
그러니깐 노동자가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어진 일정과 계획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늘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와서 심화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노동의 성격은 타자의 공간과 시간 속에 자신의 육체적 처분권을 대여해서, 육체적 활동을 타자의 명령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출되는 노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타자를 위한 사용가치로서 육체적 활동의 대여. - 이종영, ‘노동의 개념’ 가운데, 진보평론 2010년 봄호, 203쪽
이종영의 말 대로 하자면 ‘돌봄노동’이란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거지요.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타자를 위한 사용가치로서 육체적 활동의 대여’는 아니니깐요. 여성의 노동,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이냐구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노동’이라는 개념을 맑스가 했던 식으로 생산적이고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의 활동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종영 식으로 정의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종영은 ‘자본주의적 공장노동을 자유롭고 자율적인 일’로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①일 ②노역 ③노동을 구분하자는 거지요.
공장이 공장 아냐?
단순한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반(反)인간적 강제노동과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는 기계의 활동을 비교하면, 둘 사이의 구조적 동일성이 드러난다. 단순한 동작의 부단한 반복 활동을 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최대의 잉여가치를 얻기 위한 가장 합리화된 방식으로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고, 기계 자체를 발전시키고, 또 그 둘을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이종영, ‘공장의 개념’, 진보평론 2010년 여름호, 145쪽과 149쪽
어, 그래도 나는 상담원이기 때문에 기계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물음을 하거나 하면 다양하게 대답을 한다구요? 혹시 그 대답 또한 이렇게 저렇게 대답하라고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요?
기계에도 단순히 자기 작업만 계속하고 있는 기계가 있고, 컴퓨터처럼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기계가 있듯이 콘베이어 벨트에서 열심히 나사를 조이는 사람이 잇고 상담원처럼 상대의 말에 정해진 대로 반응하는 좀 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마트 주차장에서 주차 안내를 하는 사람은 혹시 사람의 모양을 한 기계는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서 퇴근을 하며 ‘아이고 사람이 왜 이렇게 머~엉 해 지냐...’합니다. 뭔가 열심히 한 것은 같은데 뭘 했는지도 모르겠고, 왜 했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마치 영혼이 없는 인간이 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요. 퇴근하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 정신이 좀 드네’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 정신없어지는 곳으로 꾸역 꾸여 모여 듭니다. 정신이 있다 없다...
그들이 그렇게 점점 정신이 없어지는 이유는 뭘까요?
답은 간단하죠. 자본가들이 돈 더 많이 벌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노동자들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기계처럼 움직이기를 거부하기 시작하고, 부당함에 맞서기 시작하면 자본가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없겠지요. 사장님께서 내게 일자리도 주시고 월급도 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해서 사장의 재산을 늘려 주는데도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업신여기기나 하는 겁니다.
나는 공장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한다구요? 나는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일 하신다구요? 그렇다고 공장에서 노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공장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자본가의 욕망으로부터 도출되고 노동력의 부르주아적 사용체제에 의해 지탱되는 기계역학적 착취체계. 또는 단순히, 자본주의 욕망을 구현하는 기계역학적 착취체계 - 이종영, ‘공장의 개념’, 진보평론 2010년 여름호, 165쪽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장은 커다란 건물 안에 큰 기계들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하얀색 샤쓰보다는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옛 동창생들 만나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기 보다는 회사에서 일한다고 해야 뭔가 덜 쪽팔리게 되구요. 아무튼 그런 공장도 공장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말할 때 자본주의가 돈 많은 이들이 더 많은 돈을 버는 사회이기는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야 하듯이 공장이란 것도 기계나 건물보다는 기계나 건물을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인들을 향해 총을 쏘면 살인의 무기가 되지만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향해 총을 쏘면 저항의 무기가 되듯이 말입니다.
이종영
고맙게도 진보평론에서 책이 나오면 꼬박꼬박 보내주는 덕에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진보평론이 계간지이고 여러 글이 실려 있는데 왜 이종영의 글에 대해서만 얘기하냐구요? 답은 간단합니다. 이종영의 글만 읽어 봤으니깐요. ^.^
평소에는 꼬박꼬박 이종영 ‘선생’이라고 부르다가 그냥 이종영이라고 하니깐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제 짧은 머리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드물게 ‘과학’을 한다고 여겨지는 분입니다. 공부한다거나 학문을 하시는 분은 많지만 그 가운데 과학을 하며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 하시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거든요.
개념을 따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작업을 하는 사람도 힘들고,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도 아리까리숑숑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개념은 서로가 안다고 전제하고 얘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주어진 수학공식을 이용해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에 익숙해진 우리로써는 그 수학공식이 왜 나왔는지, 그 공식 자체가 맞는지 틀린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거지요. 달마가 마음 진정 시키는 방법만 얼른 가르쳐 주면 될 것을 괜히 그 마음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말입니다.
* 어찌 지내시는지 연락드리고 차라도 한 잔 해야 할 텐데 생각만 하다 시간만 자꾸 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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