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이란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석유, 전쟁, 사막, 이슬람 등등이 떠오르겠죠. 그 가운데 하나가 여성억압일 거구요. 여성억압하면 히잡과 같이 여성의 몸을 가리는 것이 떠오를 거구요.
아시아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듯이 중동이라고 해도 워낙 지역이 넓고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어서 모두 묶어서 하나로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반면에 이란부터 팔레스타인까지 그 사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성억압을 보면 비슷한 점도 많지요. 이 지역이 이슬람과 관계가 깊다보니 더욱 닮은꼴이 많기도 하구요.
신자에게는 천국에서의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이 주어졌는데, 천국이란 “영원히 젊고” “아름다우며” “큰 눈의” 여인에 대한 성적 탐닉이 남성의 유일한 활동인 곳으로서, 이는 무슬림의 궁극적 행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 51쪽
여러분은 천국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먹을 것이 풍부하고 사람들은 즐겁게 놀고 있지요. 그런데 혹시 여성은 비스듬히 누워 맛난 것을 먹으며 놀고 있고 남성들은 여성들 앞에서 춤을 추고 여성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는 모습을 떠올려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슬람도 그렇고 많은 종교들이 남성이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를 반영하다보니 천국의 모습이 남성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모양으로 발전 했겠지요. 그러다 보니 결혼을 하면 여성은 남편의 성욕을 충족시켜 줘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아버지-남편-아들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관리와 통제 속에 살아야 하는 거지요.
이런 얘길 하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여성 억압은 이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도 마찬가지지 않느냐, 이슬람만 여성에 대해 더욱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지요. 맞는 말입니다.
유럽과 기독교인들이 중동과 무슬림들을 놓고 여성을 억압하는 우매한 것들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여성에게 정조대를 채우고, 마녀사냥을 해서 불에 태워 죽이던 것을 생각하면 오십보백보지요.
하지만 기독교‘도’ 그렇다는 것이 이슬람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 다 문제인 거고, 지금은 이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 중입니다.
이란 혁명을 이끌었던 호메이니. 그는 남성 중심의 종교 권력을 강화하고 여성들을 억압했다.
이란 혁명은 과연 '혁명'이었을까?
또 어떤 분들은 꾸란을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꾸란에 남성지배 경향이 많이 담겨 있지만, 남녀 모두 평등하다는 구절도 있으니 문제는 이슬람이 아니라 꾸란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는 거지요.
이 또한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우리가 ‘이슬람’ 하면 자꾸 꾸란을 생각하는데,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꾸란이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그 종교 속에 만들어진 권력, 조직,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꾸란을 안 읽어 봤다고 이슬람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사회만 봐도 이슬람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지요. 종교를 해석하기 위해 꼭 종교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비종교의 길을 통해 종교를 해석할 수도 있는 거니깐요.
꾸란에서 여성에게 온 몸을 가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현실에서는 이슬람 지배자들이 여성에게 머리만이든 아니면 온 몸이든 가리라고 합니다. 그게 하느님 말씀이고 무슬림다운 행동이라는 거지요. 지들은 안 가리면서...
이는 여성과 여성의 몸을 남성의 소유로 보는, 원리주의에 의해 조장된 가치 체계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여성의 몸과 영혼을 정화하는 일은 개개인 남성의 종교적이자 정치적인 의무이고, 그를 통해 이슬람 국가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게다가 도덕적 규율이 깨졌다고 인식되면, 남성이 규율 위반자를 처벌할 의무를 (따라서 정당성까지) 지닌다. - 200쪽
그렇다면 과연 이슬람과 여성해방은 함께 갈 수 없는 걸까요? 이슬람 페미니즘이란 말은 가능할까요? 아니면 비슷한 논리와 행동 체계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여성해방은 걸림돌일까요?
그 해답은 간단하고 단순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여성을 남성의 몸의 일부를 떼어내서 만들었다는 식으로 남성 지배 논리를 유지하고, 현실에서 성직자라는 이름을 빌어 남성들만의 욕망에 충실하려고 할 때, 교회를 넘어 이란에서처럼 국가로까지 종교에 기반을 둔 남성 지배를 계속하려고 할 때 이들은 여성 해방의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억압 받는 무슬림 여성을 위해서 우리는 백마 탄 왕자가 되어야 할까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이상하게 일부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조차 무슬림 여성들에 대해서는 갇혀 있는 그들을 구해줄 백마 탄 왕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무슬림 여성들은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투쟁하지도 못하니 잘난 우리가 대신해 줘야 한다는 거지요.
아니면 무슬림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왕자님에게 자신들이 겪은 것을 증언할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니지요.
이미 정해져 있는 겁니다. 무슬림 남성들이 무슬림 여성들과의 관계를 이미 정해 놓고 인생을 시작하듯, 왕자님들도 무슬림 여성들과의 관계를 녹음기와 카메라를 든 인자한 왕자님과 울면서 자신의 아픈 인생을 말해야 할 공주님으로 만들어 놓는 겁니다.
또 어떤 부류는 ‘우리는 달라’에 집착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고, 이 민족 저 민족이 다르고, 이 여성과 저 여성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할 수 있냐는 거지요. 서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으니 서로를 인정하자는 겁니다. 획일화 되고 규격화 되고 집단화된 자본주의가 우리의 대안일 수 없다는 거지요.
포스트모더니즘과 원리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자본주의를 완전히 거부하거나 사회주의를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 둘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는 반면, 원리주의에서는 이슬람으로 포장된 더 원시적 자본주의를 서구 모더니티 개념의 대안으로 내세운다는 데 있을 것이다. - 140쪽
한국의 우파들이 잘 하는 말이 ‘복지병’입니다. 사람들이 복지 혜택을 많이 받으면 게을러지니 복지는 적당히 하고 경쟁을 많이 시켜야 부지런해진다는 거지요. 한국 사람들은 정말 복지를 많이 누려 게을러지고 있는 걸까요?
누군가는 ‘집단의 시대는 갔어. 개인의 시대가 온 거야’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 얼굴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남성과 종교와 국가로부터 두들겨 맞고 끌려가고 감옥에 갇혀야 하는 여성들에게는 여성이라는 집단의 힘으로 남성들과 싸워야 합니다.
직업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한 채 경제적으로 종속된 삶을 사는 여성들은 국가를 이용해 법과 힘으로라도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경제 활동의 기회를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미국이나 EU는 이슬람에서의 여성 억압을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이들이 여성들의 해방에 무관심한 것은 너무 뻔 한 일이구요. 미국이 여성 억압을 열라 떠들면서도, 여성 억압이라면 세계에서 최상위권을 달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제국주의가 이용하는 ‘여성해방’에 휘둘리지 않고, 이슬람 권력자들이 ‘자 봐. 우리도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 하면서 내세우는 겉치레에 속지 않아야겠지요.
‘우리가 무슬림이 아닌데 이슬람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라는 소심함도 버리고, 무슬림 여성의 문제를 히잡으로 제한하지 말고, 검은 천을 두른 공주님을 구하러 달려간다는 망상에 사로잡히지도 않아야겠지요.
그러면서 숨 쉬며 꿈을 꾸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지요.
무슬림이건 비종교인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중동 사람이건 한국 사람이건 누구나 가지고 누려야할 인간으로써의 자유와 해방의 길 말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찾는데 이 책은 좋은 길라잡이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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