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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크루즈 - [귀향]을 보고

순돌이 아빠^.^ 2011. 2. 9. 19:25

많은 사람들이 오랜 된 일이든 아니든, 잊은 일이든 아니든 폭력의 기억을 안고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나 정의를 향한 폭력도 아니고 그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저지르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문제이지만 역시 폭력은 피해자의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칩니다.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에서 보듯이 죽음이나 몸에 장애를 남기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에 남긴 상처는 오랫동안 피해자를 괴롭히고 또 괴롭힙니다.

 

강간범 아버지

 

우리가 가진 잘못된 생각 가운데 하나가 ‘그래도 믿을 건 가족 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데...’입니다. 여러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가족의 강화를 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을 만하다고 여겼던 가족이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방송이 있습니다. 이 방송을 볼 때 제 머리에 자주 떠오르는 말은 ‘믿을 건 가족 밖에 없다’가 아니라 ‘문제 아이 곁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입니다. 아이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모가 이상 행동을 하는 경우 아이도 이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아이가 부모 말이라면 콩으로 두부를 만든다고 해도 안 믿으려고 한다면, 혹시 아이가 구름이 비를 만든다고 해도 부모가 안 믿었던 것은 아닌지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조그만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물건을 던진다면 혹시 부모가 제 성질 못 이겨 아이에게 화풀이를 해 댔던 건 아닌지 보면 좋겠습니다.

 

부모도 부족함 많은 인간인지라 여러 가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행동 가운데는 그냥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경우입니다.

 

 

 

 

<한 언론사의 아동 성폭력 관련 기사>

 

 

언뜻 생각하기에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이 가해자일 것 같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례가 가족이나 이웃이 가해자입니다. 아는 사람이 범죄자인 거지요.

 

아빠가 아주 오랫동안 내게 입을 맞추고 있었을 때도, 아빠 호흡이 이상해져 갈 때도, 난 꿈을 꾼 거야. 그 날 밤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우리 아버지' 때문에 그날 밤 내가 깨어났을 때도, 난 꿈을 꾼 거지.

 

한 연극의 대사라고 합니다. ‘설마’, ‘어떻게’, ‘그래도 아버지가’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설마’, ‘어떻게’, ‘그래도 아버지’가라고 하는 통에 피해자는 피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도 못하고 고통의 시간은 길어집니다.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남성입니다. 어떤 여성이 남편과 이혼을 하고 중학생 딸 하나와 함께 산다고 하지요. 이 여성이 다른 남성과 결혼 할 때 생각해 봐야할 것 하나가 무엇이겠습니까?

 

폭력, 대물림

 

가지고 있던 DVD를 오랜만에 다시 꺼냈습니다. 영화 [귀향]을 어머니나 모성을 중심으로 보시는 분도 있는데 저는 여성과 폭력을 중심으로 봤습니다. 

 

성폭력을 개인만의 일인 것처럼, 그러니깐 이상한 정신을 가진 몇몇 가해자만의 일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성폭력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해자-피해자의 얼굴 생김새는 달라도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비슷한 경향을 가집니다. 

 

 

라이문다 역을 맡은 페넬로페 크루즈에게는 파울라라는 딸이 있습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라이문다의 남편은 파울라를 강간하려고 하고 파울라는 아빠를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집으로 돌아온 라이문다는 파울라를 진정시키고 모든 일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는 남성의 욕망과 폭력에 관대한 이데올로기가 태어납니다. 니가 밤늦게 다녔기 때문이지, 니가 몸 관리를 잘 못 했기 때문이지, 부끄러우니 입 다물어라 등

 

이런 식의 제도와 의식은 성폭력을 되레 부추깁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고 처벌하고 추방하고 교육하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의 가해자가 두 사람의 가해자가 되고, 두 사람의 가해자가 세 사람의 가해자가 됩니다.

 

남성 지배의 사회가 해체되지 않는다면 성폭력 가해자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해자-피해자가 세대를 이어서 재생산 됩니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가해자가 대물림되는 동안 할머니-어머니-딸로 피해자도 대물림됩니다.

 

또 피해자는 이상 행동이나 심리 상태를 보입니다. 자신이 당했던 폭력과 관련된 시간, 공간, 단어, 소리 등에 이상한 반응을 보이도 하고, 사람을 지나치게 불신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신뢰하기도 합니다. 많이 먹기도 하고 적게 먹기도 하고 잘 웃기도 하고 잘 울기도 합니다.

 

자식을 늘 매질하던 아버지에게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도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 놈이 그 놈’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봐 왔던 남성의 모습은 늘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지만 또한 순응하면서 사는 거지요. 아버지의  폭력과 억압 때문에 외모에 집착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의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는 의외로 다양하고 뿌리가 깊을 수 있습니다.

 

힘이 필요해

 

피해자라고 언제나 당하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피해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피해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성들 사이에서도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그 생각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렀겠지요. 하지만 혼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점점 사람이 모이고 지혜를 모으고 조직을 만들고 힘을 키웁니다. 힘이라는 것은 꼭 물리적인 힘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니깐요.

 

 

 

아니, 물리적인 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를 입은 파울라도 여성이고 파울라를 위해 노력하는 라이문다도 여성이고 시체를 묻을 때 힘을 보태는 사람도 이웃 집 여성입니다. 피해를 입었다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죽이고 땅에 묻어 버립니다. 여성도 물리적인 힘을 쓸 수 있습니다.

 

폭력은 가해자가 행동을 보다 쉽게 하도록 하고 피해자가 자신을 방어하는데 힘을 못 쓰도록 만듭니다. 또 폭력은 공포를 만들어 심리적으로도 피해자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힘이 필요합니다. 근육의 힘일 수도 있고, 사회 제도나 의식의 힘일 수도 있고, 경찰의 힘일 수도 있고 아무튼 범죄자들을 제압할 힘이 필요합니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폭력의 역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움츠러들어 아무 것도 못할 수도 있지만, 상황이 바뀌어 나도 상대에게 총을 쏠 수 있게 되면 둘의 관계는 달라집니다.

 

상대가 착한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당장에 필요한 것은 나쁜 짓을 막을 힘입니다.

 

다른 곳으로의 귀향

 

[귀향] 속의 어머니도 라이문다도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바람이 많은 것은 여전하지만 그들의 고향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병든 이모를 돌봐주던 이웃집 친구가 암에 걸려 자리에 눕자 라이문다의 어머니는 이제 그 친구를 돌봐 줍니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라이문다는 돌아온 어머니 곁에서 눈물도 흘리고 웃으며 안심도 합니다.

 

 

세상이 늘 그런 거고, 뭐 달라질 게 있냐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있고 없음은 큰일입니다. 그 한 사람이 없어 세상에 혼자 버려져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도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있어 살아갈 이유와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말하기 어렵고 어쩌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었던 것들을 [귀향]은 때론 웃음으로, 때론 흐뭇함으로 풀어 갑니다. 다시 봐도 좋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