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 [묵공]을 다시 봤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여서 그런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주요 인물인 혁리(유덕화)나 항장군(안성기)보다 조연들에게 더 눈이 가더라구요.
무조건 열심히?
이번에 눈에 띈 사람은 우장군입니다. 우장군은 양나라에서 군대의 대빵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나라가 양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양나라는 묵가에게 도움을 청했고, 묵가에서는 혁리가 도우러 왔지요. 양나라 왕은 혁리에서 군대 지휘권을 맡깁니다.
우장군
우장군은 왕에게 충성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왕이란 자가 외적의 공격으로 나라가 절딴날 처지에 있는데도 음주가무로 흥청망청하는 인물이란 겁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자르는 짓도 서슴지 않지요. 우장군은 이런 왕에게 충성하며, 죽이지 않아도 될 조나라 군사들을 죽입니다. 조나라의 공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망치지 않고 장열하게 전사합니다.
‘열심히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산다고 모든 게 풀리는 걸까요? 4대강 사업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한나라당이 무상급식 열심히 반대하면 상 줘야 할까요? 미군이 이라크에 가서 열심히 전쟁 치르면 좋은 일일까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퇴근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시킨 일을 열심히 하는 것들 두고 성실하다고 칭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언론에서도 은근 이런 것을 부추기지요.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일까요? 그 노동자에게는 충분한 휴식과 여유, 삶을 돌아보고 가족이나 이웃들을 만날 시간이 필요 없는 걸까요? 이건희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죽어라 하고 제 몸 혹사시키는 것을 칭찬하는 것은 잘못된 일 아닐까요?
‘무조건 열심히’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고, 더 많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 우리들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데올로기가 워낙 강해서 마치 오랜 옛날부터 우리가 그래 왔던 것처럼 여기는 거지요. 왜 열심히 해야 하는 지 되묻지 않는 겁니다.
자본주의 발생 초기에 국가와 자본가들이 풀어야 했던 숙제 가운데 하나는 농민이었던 사람들을 노동자로 만들고, 그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숨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기계로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 노동자가 무엇인지를 보여 줬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시키는 대로 일 안 하면 먹지 못하게 하고,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두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점점 자본주의 방식의 노동에 익숙해지고 순응하기 시작했습니다. 해 뜨고 지는 것, 계절의 변화,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맞춰 일을 하던 농민들이 시계에 맞추고, 명령에 맞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나의 생각에 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각에 나를 맞추면서 점점 내가 왜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오히려 왜 일을 해야 하는 지를 묻는 이들에게 ‘너 한가하구나. 아무 생각 말고 일이나 해’라고 핀잔을 주게 되었습니다. 자본가가 생산한 의식을 노동자가 재생산하는 거지요.
우리 모두 게으르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소중한 삶의 시간, 소중하게 잘 써야겠지요. 다만 지배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나와 내 가족, 이웃의 삶을 위해서, 더 많은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먹고 입을 것을 구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고,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을 되짚어 보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내 삶의 시간과 노력을 나누며 살면 좋겠지요. 기수가 고삐를 죄는 대로, 막대기로 엉덩이를 때리는 대로 열심히 달리는 경주마가 되지는 말자구요.
우리는 우리가 구원한다
조나라 군대가 양나라를 무너뜨리자 양나라 왕은 항장군 앞에서 살려 달라고 무릎을 굽힙니다. 양나라 민중들이 조나라 군대를 물리치자 다시 권좌에 앉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조나라 군대를 물리쳤으면서도 양나라 민중들은 ‘대왕 만세’를 외칩니다. 자신들을 버리고 부와 권력에만 매달렸던 왕인데도 말입니다. 자신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났으면서도 박정희 덕분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준 이에게 환호를 보내는 겁니다. 아무 의심 없이!
우리에겐 박정희도, 노무현도, 체 게바라도 어떤 영웅도 필요치 않습니다. 죽은 그들의 이름을 아무리 부르며 매달려 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정신을 깨우고 행동에 나서며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남이 나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되듯이 내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들어 왔지만 이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조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양나라 민중들. 죽 쒀서 개...
멈춰 있던 머리를 다시 돌리고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그 생각이 자라고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나도 예전에 해 봤어. 나도 알 건 다 알아’식의 태도입니다. 특히 과거 한 때 운동을 했었고 자신도 진보의 편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양나라 민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되짚어 보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요.
‘나도 한 때’는 과거의 일입니다. ‘나도 한 때는 운동 했었어’는 ‘나도 한 때는 군대 갔었어’ 하며 군대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과거의 것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하느냐 하는 거지요.
더 큰 아파트, 더 큰 자동차, 더 점수 높은 대학을 쫓아다니면서 술자리에서는 한 때를 얘기하며 ‘나도 알 건 다 알아’하는 것은 지금 한나라당에서 이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을 닮아가는 꼴입니다. 지금 이명박이 6.3 세대가 어떠니, 김영삼이 민주화 운동이 저떠니, 김문수나 이재오가 노동해방을 되뇌이며 궁시렁댄들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과거의 투사가 오늘의 괴물이 되는 건 하루아침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알 건 알아 하면서 정작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건 모르는 거지요.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몰라야 할 것은 아는 거지요. 과거에는 부끄럽다고 했던 일을 이제는 자랑스럽다고 내세우고 있다면 우리 인생 막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체 게바라.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내일의 우리를 결정할 뿐.
내가 세월을 사는 건지 세월이 나를 끌고 가는 건지 모르게 바쁜 날을 보내는 분들 많을 겁니다. 생각한다는 것, 판단한다는 것이 때론 귀찮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할 겁니다. 차라리 누가 대신 생각해 주고 내 대신 나서 주면 좋겠다고 싶기도 할 거구요. 그래서 영웅이 탄생하는 겁니다. 영웅은 자기가 잘 나서 탄생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기 때문에 생기기도 하는 거니깐요.
아무도 나 대신 사랑을 할 수도, 친구와 우정을 쌓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나 대신 책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오직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 늘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사람에게 교통문제는 차가 막히느냐 안 막히느냐이지만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는 저상버스냐 아니냐가 교통문제입니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때론 마음이 몸을 따라가기 때문에 스스로 깨어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 삶의 위치를 어디에 놓느냐도 중요하겠지요. |
'지배.착취.폭력 > 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켄 로치 - [레이닝 스톤]을 보고 (0) | 2011.02.05 |
---|---|
아흐메드 라시드Ahmed Rashid - [지하드Jihad]를 읽고 (0) | 2011.01.26 |
바흐만 고바디 - [거북이도 난다]를 보고 (0) | 2011.01.03 |
라시드 카리디Rashid Khalidi - [부활하는 제국Resurrecting Empire] (0) | 2010.11.16 |
박찬욱 - 공동경비구역 JSA (0) | 2010.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