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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 [레이닝 스톤]을 보고

순돌이 아빠^.^ 2011. 2. 5. 23:11

우리 동생 알제? 설 전날 회사에서 정리해고 통보 받았어. 300명을 짤랐대.

 

설날 저녁에 만난 친구가 술 먹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던질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레이닝 스톤]은 [빵과 장미] [랜드 앤 프리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등의 작품을 만든 켄 로치 감독의 작품입니다. 영화 보는 내내 역시 켄 로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두 남자가 산에서 이리 저리 달아나는 양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장면입니다. 그 놈의 양들이 빠른 건지, 남자들이 느린 건지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난리가 납니다. 그러다 어린 놈 하나 겨우 붙잡아 훔쳐 달아납니다.

 

훔친 양을 정육점에서 고기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팝니다. 돈 벌려구요. 고기 조금 팔았나 싶었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나마 있던 재산 목록 1호 자동차를 누군가 훔쳐 갔습니다. 살아 보겠다고 남의 양을 훔치러 다니는 사람들의 낡은 차를 또 누군가가 살아 보겠다고 훔쳤는지 모르겠네요.

 

차를 잃어버린 밥은 장인어른에게 하수구 뚫는 기계를 빌려 돈벌이에 나섭니다. 이 집 저 집 다녀봐도 하수구 뚫겠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교회 신부님이 막힌 하수구를 뚫어 달라고 하네요. 무료봉사로 말입니다.

 

신부님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

 

이래저래 해서 하수구를 뚫긴 뚫었는데 밥에게 남은 것은 부러진 기계와 온 몸에 뿌려진 똥물이었네요.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거지만 밥에게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딸에게 예쁜 옷을 사 주고 싶었거든요.

 

한 벌의 옷을 위해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봤지만 돈을 구하기는 쉽지 않고 결국 사채를 씁니다. 고리대금업자는 밥이 없는 사이 집에 쳐들어 와서 아내와 딸을 협박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깽판을 칩니다.

 

딸에게 옷 한 벌 사주려고 했다가 빚은 뭉탱이로 늘어나고 집안은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밥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머니 터는 자들

 

사람이 태어나 한 생을 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계를 이어가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 사회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자본가들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것이 되고, 사회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고, 동료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나 작업 일정과만 소리 없이 대화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은커녕 기계나 노예가 되는 과정이 되어 버립니다. 노동자가 되는 거지요.

 

직업이나 실업 또한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회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윤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역전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새 사장을 뽑는 주주총회에서 00본부장이란 사람은 자신이 사장이 되면 주주들에게 더 많은 배당금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더 많은 이윤을 약속하는 것이 주주들에게 인정받기 가장 쉬운 길이지요.

 

만약 더 많은 배당금이 더 많은 해고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면 주주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아무리 이윤도 좋지만 남의 밥줄을 빼앗아서야 되겠냐고 할까요?

 

이들에게 정리해고니 실업이니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슬쩍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나의 이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요? 생계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삶 보다 일하지 않는 이들이 이윤을 얻고, 그 돈으로 흥청망청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밥과 밥의 친구 토미는 실업자입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게을러서 놀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리저리 일자리도 찾고 양을 훔쳐서라도 살아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잉여 인간의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린다는 것은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버젓이를 넘어 난리가 났습니다.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면 정말 자주 만나는 게 고리대금업자들의 광고입니다.

 

9등급 10등급도 가능하다, 여성만을 위한 대출이다, 10분 만에 돈 빌려 준다, 특별 행사로 15일간 무이자다 등등의 광고가 넘치고 넘쳐 납니다. 일하는 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일하지 않는 이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고리대금업자들이 이리도 버젓이 사업을 하고 광고를 해 댄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썩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손으로 남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범죄라면 돈으로 남의 주머니를 터는 것도 범죄겠지요.

 

소중한 것들에게

 

삼성전자가 새로운 스마튼 폰을 내어 놓으면 한국인의 자부심이자 우리들의 일이 되지만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것은 그들만의 일이 되기 쉽습니다. 이건희가 칠순 잔치에서 선물한 와인이 어떤 것인지는 언론 기삿거리가 되지만 설 전날 실업자가 된 이들이 설날에 떡국이나 먹었는지는 기삿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레이닝 스톤]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고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일이지만 모른 채 하기도 하고 설마 나는 아니겠지 했던 실업이라는 문제를 때론 웃음으로 때론 흥분으로 풀어 갑니다.

 

조금은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열심히 살아 보려고 애 쓰는 이들의 삶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지요.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도 영화 소재가 되냐 싶을 지 모르겠지만 이런 게 영화 소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것들 속에 묻혀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소중한 삶에 관한 이야기이니깐요.

 

관객을 크게 자극하지는 않지만 관객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