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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르완다]를 보고

순돌이 아빠^.^ 2011. 7. 18. 11:32

1994년 르완다에서는 후투인(人)들이 투치인(人)들을 인종청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후투인들은 한 달 동안 약 100여 만 명을 죽이고, 강간․폭행을 비롯해 온갖 노략질을 벌입니다.





[호텔 르완다]는 인종청소 과정에서 한 후투인이 투치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담은 실화입니다.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벨기에가 르완다 지역을 지배합니다. 벨기에는 르완다인들을 후투와 투치라는 두 인종으로 나누고, 소수인 투치인들에게 권력을 줍니다. 신분증에도 후투냐 투치냐를 적어 넣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흔히 잘 쓰는 분할지배입니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이라크인들을 수니-시아로 나누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파타-하마스로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입니다. 지배 대상을 나누고, 나뉜 그들을 싸우게 만듦으로써 지배를 쉽게 하는 거지요.

독립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후투인들이 권력을 쥡니다. 후투인들이 투치인들을 억압하자 투치인들은 후투인들에 대항해 싸웁니다. 싸움이 계속되던 가운데 양쪽에서 평화협상이 진행 되었고, 어느 정도 진척이 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후투인 대통령을 암살합니다. 정부와 후투 조직들은 투치인들이 대통령을 암살했다고 몰아붙이면서 투치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시작합니다.

후투와 투치를 어떻게 구별하냐구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이들을 구별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억지로 만들어낸 거지요. 나치가 유대인들을 억지로 구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동안 이웃으로 잘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후투냐 투치냐를 따지며 죽고 죽이게 됩니다. 영화 [노맨스랜드]나 [더리더]의 배경이 되는 일 가운데 하나도 그저 평범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가해자-피해자로 나뉘어 끔찍한 일을 겪는 겁니다. 

르완다 학살에는 프랑스도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 속으로 가 볼까요.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던 폴은 후투인들의 공격을 피해 자기 호텔로 도망 온 투치인들을 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후투인들의 공격이 임박하자 폴은 벨기에에 있는 호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합니다.

벨기에의 번듯한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은 호텔 사장은 폴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만큼 흐르고, 금세라도 호텔에 있던 사람들을 공격할 것 같았던 후투인들이 물러납니다.

호텔 사장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고, 잠깐이나마 후투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던 거죠. 프랑스가 후투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후투인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지요.

벨기에와 프랑스의 도움(?)으로 살인을 잠깐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격 위협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의 기대는 유엔으로 모입니다. 파란 모자를 쓴 군인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 믿는 거죠.





하지만 유엔은 이들을 보호할 능력 아니면 의지가 없습니다. 유엔군은 호텔에 있던 백인들을 쏙 빼서 데려 갑니다. 힘 있는 나라들이 겉으로는 인류애와 평화를 내세우지만 자기 이익과 직결되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거지요.

현장에 파견된 유엔군 장교가 분통을 터뜨리지만 그도 어찌할 방법 없이 떠납니다. 르완다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백인 신부와 수녀들도 아이들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아이들을 남겨 놓고 떠나 버립니다.

‘인도주의’ ‘인류애’ ‘국제평화’의 한계가 여기 있는 거지요. ‘그들’은 불쌍한 존재이고, 도와줘야 할 존재이지 함께 살고, 함께 죽을 존재는 아닌 거지요.

폴은 르완다에서 제일 좋다는 호텔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외국 관료들, 기자들, 구호단체 사람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흑인이지만 백인의 친구가 된 거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흑인 주제에 백인의 친구가 되었다고 착각을 한 거지요.

유럽의 백인들은 흑인인 폴을 친구처럼 대한 거지 친구라고 생각한 거는 아닙니다. 그저 영어를 할 줄 알고 자신들의 비위를 잘 맞추는 쓸 만한 흑인 정도로 생각한 거지요.

한 백인 기자는 호텔에서 만난 흑인 여성과 친분을 쌓습니다. 후투인의 공격을 앞두고 유엔이 백인들만 데려가려고 하자 그 여성이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을 합니다. 기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여성에게 돈을 쥐어주고 떠납니다.

바퀴벌레

인간적 접촉은 고사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식민주의자는 학급의 반장으로, 군대의 장교로, 감방의 간수로 그리고 노예 지배자로서의 삶을 영위케 하면서 식민지인은 생산의 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관계 말이다. 내 공식은 이렇다. 식민주의=“사물화”       - 에이메 세제르, [식민주의에 관한 담론], 동인, 37쪽

과거에 벨기에가 르완다인들을 물건처럼 대했다면, 이제는 후투인들이 투치인들을 물건처럼 대합니다. 투치인들을 공격하면서 후투 정부와 조직들은 투치인들을 바퀴벌레라고 부릅니다. 독일이 유대인을 세균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에는 후투 남성들이 투치 여성들을 쇠로 된 우리 안에 가둬 놓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에 가둬 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강간하는 거지요.

후투인들은 투치인들에게 우리를 짓밟았던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증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투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지위 등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폴이 투치인들을 잠깐, 잠깐이라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후투 군인들에게 돈을 줬기 때문입니다.

증오에는 자신을 억압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한 막연한 감정도 들어 있지만, 자신들이 갖지 못하고 빼앗겼다고 여기는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도 들어 있습니다.

후투인인 폴이 투치인들을 구하려고 온갖 애를 썼던 이유는 폴이 대단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거나 뭐 그래서 그런 게 아닙니다. 늘 함께 일하고 살아왔던 이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있었던 거죠. 후투냐 투치냐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는 거지요.

후투인들의 살해 앞에서 투치 아이들이 "이제 투치 안할 테니 살려주세요"라고 합니다. 스스로는 벗을 수 없는 굴레를 벗겠다고 하는 거지요. 


반면, 그 난리 과정에도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호텔 안을 뛰어 다니기도 합니다. 

어느 인종이냐 어느 민족이냐 뭐 이런 것들을 던져버리고 인간을 보면, 인간이란 게 참 단순한 존재입니다.

죽기 싫어 울고, 즐거우면 웃습니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인다 싶으면 웃었다가,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곧바로 공포에 빠져 듭니다. 희망의 부재가 절망을 의미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사회적 인간


인종청소에 나선 후투 조직들은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열심히 선전을 합니다. 거리에는 후투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 다닙니다.


제대로된 인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선전에 현혹되기 쉽고,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열정은 흉기가 되기 쉽습니다.





호텔 노동자로 일하던 한 후투인은 인종청소가 시작되자 태도를 확 바꿉니다. 투치인 아내를 둔 폴에게 투치 냄새가 난다며 온갖 거만을 떨고 협박을 하지요.

폴이 화가 나서 그동안 친분을 쌓고 있던 후투인 장군에게 그에 대해 말을 하자, 장군은 그 노동자에게 욕을 하며 난리를 피웁니다. 그러고 나자 그 노동자는 다시 지배인에게 고분고분해집니다.

하지만 후투인들이 호텔에 직접 쳐들어오자 그 노동자는 다시 후투인들의 편이 되어 폴을 공격합니다. 

지배인-노동자 관계, 투치 아내를 둔 후투인-그냥 후투인의 관계가 서로 교차하면서 권력 관계의 위아래를 오가는 거지요. 



후투인에 대항해 싸우는 투치인들



끝까지 투치인들을 살리려고 애를 썼던 건 백인 기자도, 백인 군인도, 백인 수녀도 아니고 언제 가해자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흑인 후투인 폴이었습니다. 투치인을 돕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죽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투치인들을 살린 것은 폴이 아니라 투치인들이었습니다. 총을 든 투치인들이 후투 군인들을 몰아내고 투치인들을 살린 거지요.

죽음의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한 것은 인류애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가해자에 대항해 피해자들이 만든 힘이었습니다. 양심이 아니라 힘이 사람을 살린 거지요. 양심이 힘을 만들 수는 있지만 양심이 곧 힘은 아니니까요.

여러 날 정말 겁나게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햇볕이 쨍쨍입니다. 습기로 눅눅한 이불을 햇볕에 널어야겠습니다.

눅눅한 이불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어주는 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햇볕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