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국가나 권력에 관한 이론에서도 좋지만 국가나 권력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좋기도 합니다. 국가에 대한 이론과 이론에 대한 이론으로 나눠 생각해 봐도 좋을 듯 싶구요.
꿈틀거림
경제의 공간과 장소는 생산․착취 그리고 잉여노동을 추출하는 관계의 공간과 장소인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자본의 재생산과 축척 그리고 잉여가치 추출의 공간과 장소이다. - 19쪽
우리가 흔히 경제라고 하면 돈 벌고 쓰는 거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글쓴이의 생각대로 세상을 보자 치면 우리 눈앞에는 그저 돈 벌고 쓰는 것으로 나타났던 경제라는 것이 생산, 축적, 잉여가치 등과 관련을 맺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경제학이라는 것은 돈 잘 벌고 잘 쓰는 방법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생산, 축적, 잉여가치 뭐 이런 것들을 밝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요.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이 공간은 다른(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도 그리고 자본주의에서도, 자기재생산이 가능한 고유의 내적 작동‘법칙’을 가지고 밀폐되고 차단된 수준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국가는 상이한 형태로 생산관계와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구성요소로 항상 현존한다. - 19쪽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본다고 하죠. 두 가지 꿈틀거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꿈틀거림은 지구 안의 꿈틀거림입니다. 바다와 땅, 공기 등등이 서로 어울려서 바람도 만들고 구름도 만들고 태풍도 만들며 요동치지요. 그 속이 요동친다고 해서 지구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 요동치고 꿈틀거리는 것이 바로 지구인 셈이지요.
두 번째 꿈틀거림은 지구가 그 밖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태양과도 달과도 힘을 주고받으며 꿈틀거리고, 멀리서 날아온 혜성이 대기권으로 들어가다 불타 사라지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지구가 그렇듯 사회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도 안으로 밖으로 많은 것들이 관계 맺고 움직이고 있고 변하고 있습니다. 나 아닌 것을 통해 나를 찾는 방법입니다.
잉여노동시간은 대립적으로만, 필요 노동 시간과의 대립 속에서만 실존한다. -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180쪽
계급들의 경우에 있어서 권력은 분업에 기초한 객관적 위치와 연관되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들과의 적대관계에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표시한다. -46쪽
생선을 놓고 칼을 들면 요리사가 되는 거고, 밤거리 행인을 놓고 칼을 들면 강도가 되는 거지요. 권력이란 것도 단순히 저 혼자 있는 힘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힘이 되겠지요. 관계도 그냥 관계가 아니라 지배나 복종처럼 관계의 속내가 잘 드러난다면 더 낫겠지요.
관계 맺고 있고 변하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고 개념 지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꽃이 자라고 변한다고 해서 꽃이 아닌 것 아니지요.
과학의 과정은 오히려 그 변화와 관계를 규정하고 개념 짓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기도 할 거구요.
각 심급은 시작 바로 거기에서부터 심급들의 상호관계와 접합에 의해 구성되는데, 각 생산양식에서 이 과정은 생산관계의 규정적 역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규정성은 항상 생산양식의 통일성 안에서 발생한다. - 20쪽
통일성은 단순한 혼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성 요소들의 관계와 상호 작용으로써의 통일성인 거지요.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다는 막연한 의미의 ‘사회’보다는 사회구성체로써의 사회를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국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겁니다.
과학
앞의 풀란차스의 말대로 고유의 내적 작동법칙을 가지고 밀폐되고 차단된 수준으로 움직이는 사회를 가정한다면 그 길은 오류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맑스-레닌주의적’ 국가‘이론’으로 ‘간격’을 채우려고 오랫동안 추구해온 종말론적이고 예언적인 독단론 - 24쪽
대표적인 예가 붕괴론입니다. 자본주의가 내부의 모순 때문에 저절로 무너질 거라는 거지요. 이런 ‘기대’ 속에서 소위 말하는 좌파나 지식인들은 붕괴의 징후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기서 온갖 ‘위기’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저의 생각은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아니고 위기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기대와 희망으로 과학을 대신하면서 스스로가 예언자가 되려고 하지는 말자는 겁니다. 사회과학의 역할은 사회적으로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것이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을 ‘전망’이란 이름으로 환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점쟁이가 하면 되는 겁니다.
생각하기 싫고 공부하기는 싫고 무언가 말하고는 싶을 때 빠지기 쉬운 것이 종말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귀가 솔깃하거든요. ^.^
나는 자본주의 국가이론이 그 대상(자본주의 국가)의 재생산과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는 장에서, 즉 계급투쟁의 장인 다양한 사회구성체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재생산과 역사적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과학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 29쪽
과학은 대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내가 알려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확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과학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고 나면 세상이 확 달라 보입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권력과의 관계성에 기초하는 이 권력관계는 특수한 제도-장치에서 구체화된다. 즉, 잉여가치 추출의 장소이며, 이러한 권력이 행사되는 장소인 회사, 공장 그리고 생산단위에서 구체화된다. - 46쪽
공장이라고 하면 건물 속에 기계가 있고 거기에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요. 그런데 풀란차스는 잉여가치의 추출 장소라고 하네요. 다른 사람의 얘기도 들어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공장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자본가의 욕망으로부터 도출되고 노동력의 부르주아적 사용체제에 의해 지탱되는 기계역학적 착취체계. 또는 단순히, 자본주의 욕망을 구현하는 기계역학적 착취체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이종영, [공장의 개념], 진보평론,2010년 여름호, 165쪽
대상을 이해했다고 치고, 또 하나 주의할 것!
어느 누구도 신성한 교조와 텍스트를 지키는 사람으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텍스트로 나 자신을 치장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진정한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즉 나는 나 자신의 이름으로만 내가 쓰고 말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 - 서문 가운데
공부하는 사람이 쉽게 빠지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조금 알아 놓고 모든 것을 알아낸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론 하나 알아 놓고 세상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듯이 하는 거지요.
‘원조’ 국밥집 하듯이 ‘정통’ 00주의라고 합니다. 잘 해석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나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공부는 세상을 해석하고 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나를 드러내고 돈벌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남보다 내가 더 잘 아는 것보다는 몰랐던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게 더 중요하겠지요. 몰랐던 것을 알기에도 인생은 짧지 않을까요? ^^
도대체 인식에 있어서 진리 그 자체보다도 더 숭고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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