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갖게 되는 여러 기쁨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좋은 글, 좋은 생각을 만났을 때 얻는 기쁨입니다. 오늘 한 권의 책을 덮으며 또 하나의 기쁨을 되새김질 합니다.
사유
‘사유’는 초월적 주체의 능력도 아니고 또한 물질로서의 현실세계와 마주 대하는 절대의식의 능력도 아니기 때문이다 : 또한 이 사유는, 비록 개별 인간이 그 담당자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주체의 능력인 것도 아니다. 이 사유는 자연적 및 사회적 현실에 기초하면서 그것에 접합되어 있는 사유 기구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체계인 것이다...이 사유는 지식의 결정적 생산양식으로 하는 현실적 제조건의 체계에 의하여 규정된다. - 51쪽
‘사유하는 인간으로 살자’라고 할 때,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흔히 생각하면 세상이란 것은 내 밖에 있고, 그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내가 사유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에 열광했을까요?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라지만 바로 그 ‘나’, ‘나의 사유 능력’ 자체가 이미 사회와 관계 맺고 있고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유는 인간 정신활동의 최고형태이며, 사유의 본질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 및 과정들 속에 들어 있는 보편적인 것, 합법칙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반영하는 데 있다. 사유는 인간의 사회적인 노동과정에서 싹텄다. - 420쪽
‘사유하는 인간으로 살자’라고 할 때, 우리는 왜 사유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어떤 걸그룹이 많이 벗고 나왔을까?’를 알아내기 위해서 사유하는 것일까요? ‘평창 올림픽을 개최하면 돈을 얼마나 많이 벌 수 있을까?’를 알아내기 위해 사유하는 것일까요?
‘그냥’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 사유의 차이라면 그냥 단순한 생각이 아무런 대상도 갖지 않고 저 마음 가는대로 흘러다니는 거라면 사유는 실재하는 대상과 그 대상의 구조를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것으로서 이 사유는 그것이 노동하는 대상(원료)의 유형과, 가용적인 이론적 생산수단(이론, 방법 및 기술, 실험 또는 기타)과, 그 내부에서 생산하는(동시에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이기도 한) 역사적 제관계를 결합하는 구조에 의하여 구성된다. - 51쪽
사유의 과정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과정과 비슷한가 봐요. 일하는 사람이 있고, 대상과 수단이 있고, 이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 지식을 생산하게 되니까요.
사유를 잘 하려면 그 대상부터 잘 설정해야겠지요.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누군가 ‘학생의 성적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몇 cm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다고 하지요. 이 물음의 답은 아무리 찾아 봐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학생의 성적은 머리카락과 관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음을 잘못 던지면 평생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되겠지요.
사유의 과정을 통해 처음 던졌던 물음이 수정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본가들은 우리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왜 조금 밖에 안 주는 걸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사유를 시작했다고 하지요. 이리저리 공부하고 연구해 보니 임금이란 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릇된 답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릇된 문제의 반복이 많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생산해낸 오래된 ‘명증성’에 대해 거의 홀로 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공간을 열기 위해, 즉 미리 답을 예단하지 않고 정확히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을 얻기 위해, 이 이데올로기적인 문제, 따라서 필연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떠나야만 한다. - 66쪽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도 못하는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를 깨트린 것은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 부르주아지였습니다. 신분제도에 속박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일본은 100%, 순수한 악(惡) 그 자체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개념
한국 사회를 설명할 때 수출, 수입, 수익, 환율, 주가, 물가, 성장 등등의 단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어지간하면 이런 단어들로 한국 사회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런 단어로 한 사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개념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개념을 사용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기업인이나 투자자보다는 자본가가, 사회지도층보다는 부르주아지가, 경제성장률보다는 잉여가치율이 한국 사회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닐까요?
자본주의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과 사회적 조건들은 가변자본과 잉여가치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잉여가치가 측정 가능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며, 기존의 사회적 생산구조의 개념이며, 우리가 곧 정의하게 될 의미에 있어서, 즉 그 ‘제효과’에 있어서만 가시적이고 측정 가능한 하나의 실존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 229쪽
이번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마음에 남았던 말은 ‘잉여가치’였습니다. 이 개념 때문에 마음 먹먹했습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말도 아닌데 이 말이 제 가슴을 친 것은 이 하나의 개념이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윤, 이자, 지대는 잉여가치의 존재형태입니다. 주식 투자자들이 주식을 가지고 있고, 투자의 결과로 몇 억씩 배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잉여가치의 한 부분이며, 착취의 한 형태라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잉여가치의 개념을 들여대면 나쁜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역사의 ‘시기구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의 개념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 즉 생산양식의 개념은...이들 상이한 요소들-노동력, 직접적 노동자, 직접적 노동자가 아닌 감독자, 생산의 대상, 생산수단 등-을 결합하거나 상호관련시킴으로써 우리는 인간역사에서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는 상이한 생산양식들을 정의할 수 있다. - 221쪽, 223쪽
하나의 개념 또는 하나의 간단한 명칭에 의한 이 지시의 양식이 어떠하건, 우리는 역사일반을 결코 인지할 수 없으며, 오직 어떤 것의 역사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318쪽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역사는 변했을까요? 고려시대, 조선시대라는 식으로 역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침밥, 점심밥처럼 별 차이 없는 것들을 시간에 따라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역사는 BC 몇 년, 기원 후 몇 년, 00시대와 관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과 관계하는 가 봅니다. 노예제, 자본제 등과 같은 하나의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가 되는 거지요. 1과 2의 차이는 1이 1이고, 2가 1+1이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생산관계들의 구조가, 생산의 담당자들이 이 기능의 ‘담지자’인 한에서, 이들 장소의 점유자인 생산의 담당자들이 차지하고 수행하는 장소와 기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진실된 ‘주체’는 이러한 점유자나 기능자가 아니며,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류학이 갖는 ‘주어진 것’의 ‘명증성’ 즉 ‘구체적인 개인들’ 또는 ‘진실된 인간’도 아니며, 이들 장소와 기능에 대한 정의와 분배인 것이다. 진실된 ‘주체’는 이들 정의자 및 분배자, 즉 생산관계들 그리고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인 것이다. - 228쪽
인간이 역사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2001년 7월의 어느 하루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은 생산양식으로써의 역사 속에 산다는 말일 겁니다. 역사 속에서 산다는 것은 역사의 속과 겉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가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살덩이가 아니라 관계라는 거지요.
누군가 ‘그렇다면 인간은 구조의 결과일 뿐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야?’라고 하신다면 ‘그건 아니구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사회관계 속에서 할 수 있을 겁니다. 사회관계와 무관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면 그건 하느님이겠지요. 인간이 무언가 하고 싶다면 자신이 처한 사회관계부터 알아야겠지요.
주체
전쟁을 거부하고 자본주의를 타도하며 혁명을 일으키도록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이것은 이론 속에서조차 혁명 속으로 던져진 현실적 인간들의 역사적 책임성에 대한 이 긴급한 호소를 지연시키거나 억압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자기의 근본적 부정에 저항하는 인간적 본질로서의 프롤레타리아는 인간 본질의 혁명적 긍정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는 행동하는 철학이 되었고, 그 실천은 철학 자체가 되었다. - 179, 180쪽
주체사상은 역사를 변혁할 수 있는 주체로써의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좌파는 주체사상에서 인간이 차지하던 위치에 프롤레타리아를 집어넣었습니다. 심지어는 역사적 임무나 책임이 프롤레타리아(노동자)에게 주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역사 변혁의 주체로써의 인간(프롤레타리아), 그리고 그 인간(프롤레타리아)의 본질이란 게 있을까요? 계급성이니 여성성이니 민족성이니 하는 것들이 과연 존재할까요? 하느님의 말씀과 같이 역사가 노동자에게 어떤 임무를 주는 것일까요?
이데올로기적 발상의 특징은 지식이라는 유일한 필연성과는 무관한 ‘이해’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이다. - 180쪽
‘결론’을 미리 내린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전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무지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작동하고 있는 상상일 뿐이다. - 201쪽
노동자가 자유로워지려면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곧바로 현실의 노동자들이 해방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라는 것은 생산양식 속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수준이 아니라 경험의 수준에서 얘기해 보죠. ‘보라 저 노동자 투쟁의 거대한 물결을!’의 건너편에는 ‘보라 저 노동자들의 무기력한 모습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회 변혁을 추진하는 이들에게 노동자들의 무기력한 모습이 가슴 아프더라도, 가슴 아픈 건 감정의 문제이지 과학의 문제는 아닙니다. 노동자는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관계입니다.
노동자는 혁명의 의지로 가득차지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가득차지도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혁명의 전사도, 자본의 노예인 것만도 아닌 거지요.
만약 인간이 각각의 사회적 실천의 구조 속에서 일정한 기능의 공통적인 담지자라면, 인간은 인간 자신 속에 사회구조 전체를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응축할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전체의 구조 속에서 이들 실천의 접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점에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모든 분석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의 분석은 중심의 다양성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부재에 대해 고찰하도록 강요한다. 사회구조와 접합된 특정 실천들은 그 실천이 그 실천과는 엄격하게 상대적인 역사적 개체성의 형태를 결정하기 전에 실천들 사이의 결합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 324, 325쪽
재생산
재생산의 분석에 의하여 확립된 평면 위에서 생산은 사물의 생산이 아니며, 그것은 사회 제 관계의 생산과 그 보존이다. - 347쪽
재생산 분석은 모든 생산양식이 유통, 분배, 소비양식을 - 이들이 통일되는 각 계기마다 - 결정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아가 재생산의 분석은...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로서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면을 우연으로 환원시키는 듯한 모든 외관을 파괴한다. 재생산은 임노동자를 자본가계급에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실’을 드러낸다. - 343쪽
연필은 자본주의 상품이 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 생활 용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연필이 자본주의 상품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연필이 가진 본질이 아니라 연필을 생산한 생산관계입니다.
[다음]에서 검색한 '생산관계'
생산관계라는 것이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관계는 노동자/생산수단/비노동자의 결합관계입니다. 인간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추상적인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지 구체적 담지자로써의 인간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관계에는 담지자로써의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도 들어가겠지요.
생산은 1회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재생산합니다. 재생산은 사물의 재생산이 아니라 그 사물을 생산하는 관계를 재생산합니다. ‘생산’이라고 할 때는 사물을 생산하는 것인지, 관계를 생산하는 것인지를 봐야겠지요.
사물은 눈에 보이지만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잘 살펴야 할 거고, 사물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사물 그 자신이 아니라 그 사물을 만드는 관계이기 때문일 겁니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과정의 감독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언론을 만들고 교육을 만듭니다.
생산관계를 반영한 법과 교육은 노동자가 계속 노동자의 위치에 머물도록 만듭니다.
좋은 책
[자본론을 읽는다]는 루이 알튀세르가 쓴 ‘1부 - [자본론]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철학으로’ ‘2부-[자본론]의 대상’과 에티엔 발리바르가 쓴 ‘3부 - 사적유물론의 기본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말도 있고 그래서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다시 읽고 그랬지만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좋은 책입니다.
책의 뒤편에는 출판사에서 넣은 ‘용어해설 및 색인’이 들어 있는데 ‘용어해설이라고 해서 다음에 필요할 때 찾아보지’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 부분도 함께 읽어 보면 앞의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역자후기입니다.
[자본론]은 경제학적 저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본론을 읽는다]를 통해 알튀세르는 [자본론]의 철학에 대하여 많은 서술을 할당하고 있으며, 또 다른 저술 속에서도 철학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다른 한편에서는 에티엔느 발리바르에 의하여 저술된 제3부에서는 역사과학의 방법을 [자본론] 속에서 찾고 있음이 보인다. 그는 그것을 종래의 역사학적인 방법과는 매우 판이하게 다른 이론적인 서술로 묘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학의 방법을 [자본론]의 방법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 측면에만 국한하며 말한다면 그가 [자본론]속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경제학이 아니라 역사학의 방법이다. - 444, 445쪽
역자의 말대로 [자본론]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제 개념들과 제 개념들의 관계가 들어갑니다. 이 과정이 바로 과학(저자가 말한 철학)의 과정입니다. 알튀세르가 [자본론]을 놓고 철학을 이야기 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 이론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겁니다.
과학(철학)이 없다면 역자가 번역한 ‘징후적 독해’는 불가능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 속에서 경제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명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밝히는 것은 결과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그 방법의 과학성에 있다는 본문 내용이 떠오릅니다.
발리바르가 기존의 역사학과 다른 방법으로 역사를 말했던 것은 기존의 역사학이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써의 역사와 발리바르가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써의 역사가 달랐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발리바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데올로기로써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과학이었던 건 아닐까요? 자본론의 방법이 역사에 대한 과학적 방법이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책의 저자들이 극복하려고 했던 경제와 철학, 역사 그리고 그런 식의 구분을 저자가 책의 맨 마지막 장에서 되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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