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선언하는 사회에서 인간들에 의한 인간들의 지배는 어떤 조건하에서 끊임없이 다시 재생산되는가? - 7쪽, 자크 비데의 서문 가운데
생산
즉시 지적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사회’의 개념을 매우 일찍이(1847년에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과 가진 논쟁에서부터)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척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용어는 도덕적․종교적․과학적 울림이 과부하되어 있다. 요컨대 그것은 사회 구성체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해야 할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 54쪽
모든 구체적인 사회 구성체는 하나의 지배적인 생산 양식에 종속되어 있다. - 55쪽
생산 양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한편으로 생산력이라 부른 것과 다른 한편으로 생산 관계라 부르는 것 사이의 통일체이다. - 56쪽
생산 양식은 …을 생산하는 방식(양식)이다. 무엇을? 일정한 사회 구성체에서 살고 있는 남자․여자․아이들의 물질적 삶에 불가결한 물질적 재화 말이다. - 59쪽
상부 구조에서, 그리고 하부 구조에서, 다시 말해 생산력과 생산 관계라는 통일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최후 심급의 위치에서 결정하는 것은 하부 구조이며, 이 하부 구조 내에서도, 존재하는 생산력을 토대로 그리고 이 생산력의 물질적 한계 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생산 관계이다. - 58쪽
생산 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사회 구성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직접 생산자들일 때 이 행위자들 사이에(계급 없는 사회들임), 아니면 직접 생산자들과 직접 생산자는 아니지만 생산에 개입하는 인물들 사이에(계급이 있는 사회들임) 존재하는 매우 특별한 유형의 관계이다...생산 수단의 이러한 배분이 생산물의 배분을 결정한다. - 66쪽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은 제1의 목표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의 생산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생산과 자본 자체의 생산이라는 사실이다...자본주의의 동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을 생산하는 수단을 통한 잉여 가치의 생산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생산 수단을 통한 착취의 중단 없는, 따라서 확장된 증대이다. - 73쪽
사람들은 계급 투쟁이 사회적 불의․불평등, 나아가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반항 행위라고 간주함으로써...이것은 착취 조건들이 일차적이라는 점, 노동자 착취의 조건들이 구성되는 과정이 부르주아 계급의 투쟁이 지닌 근본적 형태라는 점, 따라서 착취는 이미 계급 투쟁이고 부르주아 계급의 투쟁이 일차적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 346쪽
재생산
생산-착취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아무런 생산 수단을 지니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다른 임금 생활자들이 그저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을 착취하는 생산에 고용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노동’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노동자들은 이 이데올로기의 효과가 나타나는 첫 대상자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가 계급의 투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 86쪽
사회구성체는 생산을 하면서 동시에 생산 조건을 재생산...생산의 제 1조건은 생산 조건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오로지 이전의 생산 조건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단순할 수 있거나 (생산 조건을 확장함으로써) 확대될 수 있다...재생산해야 하는 것은 1) 생산력이고 2) 존재하는 생산 관계이다. - 91~92쪽
노동력의 재생산이 노동력의 질적 자질의 재생산을 요함과 동시에, 기존 질서의 존중 규칙을 따르는 복종의 재생산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에게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복종의 재생산을 요구하고, 착취와 억압의 담당자들에게는 지배 계급의 지배를 ‘말을 통해’ 보장해 줄 수 있도록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잘 다룰 줄 아는 능력의 재생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 98쪽
왜 학교 장치는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들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이고 그것은 어떻게 기능하는가?...학교는 온갖 사회 계층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유치원에서부터 신구(新舊)의 여러 방법을 통해 수 년 동안 그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전문 지식’(프랑스어․산수․자연사․과학․문학) 혹은 단순하게 말해 순수 상태의 지배 이데올로기(도덕․시민 교육․철학)를 주입시킨다. 이 기간 동안 어린아이는 가족이라는 국가 장치와 학교라는 국가 장치 사이에 꼼짝 못한 채 가장 ‘취약하다.’ 14년째쯤 되어서 엄청난 수의 아이들이 ‘생산’의 현장으로 떨어진다...그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도 그렇게 수년 동안 일주일에 6일씩 하루에 여덟 시간 비율로 의무적인 청중을 갖지 못하고...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전체 어린아이들을 가지지 못한다. - 226~227쪽
자본주의적 착취의 계급적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선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 장치 등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열쇠이기 때문이다...국가는 착취 체계의 재생산 조건을 보장해 주는 주체, 요컨대 자본주의 체계를 영속화시키면서 그것을 버티게 해주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 203쪽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법은 아무것이나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작용, 다시 말해 기능을 조절하는 ‘임무를 띤’ 정해진 구체적 대상, 즉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추상화한다. - 257쪽
법의 본질적 기능은 생산 관계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산의 (그리고 생산 관계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장치들의) 작동 자체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이다...생산과 착취 등을 담당하는 자인 개별 주체의 ‘양심’의 차원에서 생산 관계의 중단없는 재생산을 법률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보장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 306~307쪽
‘법’은 무엇보다 생산 관계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전문화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이다. - 310쪽
‘인간들’이 (종교적 혹은 여타) 이데올로기 속에서 ‘표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자신들의 관계이다 - 280쪽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체라는 범주의 작동을 통해서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로 호명한다...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호명이라 부르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작동시킴으로써 개인들 가운데 주체들을 ‘모집하거나’ (그것은 개인들 모두를 주체로 모집한다) 개인들을 주체로 ‘변모시키기’ (그것은 개인들 모두를 주체로 변모시킨다) 위해 ‘작용하거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 291쪽
무엇이 그것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만드는가? 무엇보다도 그것들 속에 구현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지배 계급, 그러니깐 국가 권력을 보유하고 억압적 국가 장치를 직접적․강제적으로 지휘하는 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 216쪽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계급 투쟁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실, 그러니깐 계급 투쟁의 완결된 사실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복잡한 체계 속에 존재하는데, 사실 그것 자체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의 힘든 계급 투쟁의 결과이다. (부르주아지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이러한 계급 투쟁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장치들에서 남아 있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조직과 투쟁 형태를 찾는 새로운 피착취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하는 이중적 조건하에서만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 330쪽
책의 마지막에 실은 역자 김웅권의 <역자후기> 자체가 알튀세르가 비판했던 지배 이데올로기의 효과는 아닐지... 차라리 <역자후기>를 빼는 것이 책의 내용을 살리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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