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저는 태극기가 자랑스럽지도 않고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할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애국할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애국할 생각이 없습니다. ^-------^
다음은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이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외우라고 했던 ‘황국신민서사’ 가운데 일부입니다.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국가에 충성?
우파들이 국가에 집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국가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법’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 됩니다.
억압에는 인민들이 그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어떤 것, 즉 두려움의 메카니즘이 존재한다. 이 메카니즘은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다. - 106쪽
모든 국가에서 법은 억압적 질서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의 조직화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국가는 규범을 정하고 법률을 선언함으로써 금지 및 부인의 최초의 장을 설정하고, 폭력의 대상과 적용의 지형을 설정한다. 더 나아가, 법은 물리적 억압의 조건을 조성하고, 물리적 억압의 양식을 지시·명시하고, 물리적 억압을 행사하는 기구를 배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은 조직된 공적 폭력의 코드이다. - 98쪽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란 것이 과연 그런 물리적 억압이나 폭력의 코드일까요? 평소에는 정말 그런지 아닌지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이 되면 화~악 드러나 버리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데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경찰과 집행관들이 투입 되었습니다. 공적인 힘으로써의 경찰과 공적인 법의 명령을 집행한다는 거지요.
노동자들한테 최저임금 안 준다고, 알바들 돈 떼어 먹는다고 공권력과 법이 열심히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법에 따라, 법원의 명령에 따라 폭력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 법은 정의로운가요? 혹시 공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법을 내세워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닌가요?
국가는 계급관계에 기초한 권력을 집중한다는 의미에서 계급국가이다. 뿐만 아니라, 권력이 항상 국가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국가는 모든 권력의 특수한 기구를 전유함으로써 모든 권력을 관통하여 퍼지는 경향을 가진다는 의미에서도 계급국가이다. - 56쪽
자본주의와 국가가 어떤 관계가 있는 지는 맑스의 <자본>에서 잘 드러납니다.
15세기 말과 16세기의 전 기간에 서유럽 전역에 걸쳐 부랑인에 대한 피의 입법이 이루어졌다. - 823쪽
헨리 8세, 1530년 : 나이가 많아 노동 능력이 없는 거지는 거지 면허를 받는다. 이에 반하여 건강한 부랑자는 채찍으로 때리거나 구금하였다.
에드워드 6세 : 그의 재위 1년인 1547년의 어느 법규는, 노동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를 게으름뱅이로 고발한 사람의 노예로 선고할 것을 규정하였다. - 824쪽
미국과 같은 나라는 생산 관계에서조차 철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의해서 생산에 발생하는 직접적인 이익이 너무 작아 지출이 손해 사업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면 자본은 철도를 국가의 부담으로 전가시키거나...공동의 조건들은 국가적 욕구로서 나라 전체에 미룬다. 자본은 이익이 있는 사업들, 즉 그 자체의 의미에 있어서 이익이 되는 사업들만을 수행한다. -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166쪽
자본주의 국가가 도둑을 잡는 것은 잡지 않으면 욕먹을 것 같아서 소극적으로 하는 거고, 노동자들 파업하는데 경찰을 투입하는 것은 욕을 먹든 말든 적극적으로 하는 거지요.
국가는 도구?
국가가 계급의 국가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국가를 계급의 단순한 도구로 보는 관점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국가는 결코 정치적 지배로만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물질적 틀을 가지고 있다. 특별하고 따라서 강력한 어떤 것인 국가장치는 국가권력으로 포괄되지 않는다...국가는 무(無)에서 지배계급들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며, 지배계급들이 독점하는 것도 아니다. -15쪽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인 실체로 간주될 수 없으며, ‘자본’과 마찬가지로 세력관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계급들과 계급분파들 사이의 세력관계(항상 특수한 형태로 국가 안에서 표현된다)의 물질적 응축이라고. - 165쪽
지배계급은 때로는 단일한 입장을 가지고 움직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수의 입장을 가지고 티격태격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이슬람권 자본을 끌어 들일 것인지를 두고 자본가들과 교회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던 것이 그 예입니다.
국가를 부르주아의 단순한 도구로 여기면서 국가와 관련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니 무조건 국가 밖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능해 집니다. 또, 국가를 부르주아의 단순한 도구를 노동자 계급의 단순한 도구로 만든다는 생각도 가능해 집니다. 문제는 그 도구를 누가 쥐느냐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소련과 북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사회화와 구별되는) 국유화 그 자체는 자본주의 국가의 틀 안에서 부르주아로부터 공적 자본의 경제적 소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자본 전체가 또는 그 대부분이 법적으로 국유화된다 할지라도, 경제의 국가관리가 아무리 광범위하게 실현되더라도, 자본주의 생산관계(생산수단에 대한 실제적 통제와 노동과정에 대한 제어로부터 노동자의 배제)와 기본적으로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국가관리는 국가자본주의라는 현상을 발생시킨다. - 249쪽
좌파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싶다고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란 무엇이고, 자본주의를 다른 사회와 구분 짓는 핵심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핵심을 바꿔야 제대로 바뀌겠지요.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핵심은 국가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아닙니다.
앞의 풀란차스의 글에서 보면 괄호 안에 핵심이 있습니다. 생산수단의 통제와 노동과정에 대한 제어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생각해야 하는 거지요. 국가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만병통치약이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전교조는 빨갱이?
한국의 우파들이 빨갱이라 욕하며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것 가운데 하나가 전교조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 때론 씁쓸한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현재 국가의 작동 전체는 국가의 경제적 역할과 관련되어 재편성되어 있다. 이것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억압적 조치뿐만 아니라 규율(훈련)에 의한 정상화, 시간․공간의 구조화, 새로운 개체화의 과정과 자본주의적 신체성의 배치, 전략적 담론의 작성 및 과학의 생산에 있어서의 국가 활동의 경우에도 타당하다. - 216쪽
전교조는 교사들의 집단입니다. 그리고 교사의 주요 역할은 국가와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겁니다. 부모가 노동자인 학생들을 다시 노동자로 만드는 거지요.
전교조가 주장하는 것은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교사의 역할을 당장 그만두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 가운데 일부를 개선해 보자는 겁니다. 경쟁교육을 하지 말자는 거지 교육을 하지 말자는 거는 아닌 거지요.
인간들의 뇌 속의 환영들 또한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그리고 물질적 전제들에 연결된 생활 과정의 필연적 승화물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202쪽
전교조 소속 교사가 자본주의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교사의 역할을 마음으로 거부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거부하려면 교사를 그만 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국가가 지시한 교육을 수행함으로써만 물질적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교조가 반교육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새로운 사회, 해방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집단으로써의 전교조를 생각한다면 전교조는 반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더 나은 교육이 아니라 교육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은 진리를 찾고, 윤리를 실천해야 할 사람이지 국가와 자본의 도구로 교육되어야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쟁에 찌든 노동자가 아닌 자유롭게 사고 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본가-노동자로 계급 분할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자유로운 인간, 그 인간들이 연대하는 사회가 필요한 겁니다.
더 나은 국가를 만들어서 계급 분할이 사라진 평등한 사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계급 분할이 사라지면 국가는 사라지게 될 겁니다.
실로 중요한 것은 하나로 밀착되어야만 하는 민중운동의 두 가지 전통, 즉 국가주의적 전통과 자주관리적 전통을 ‘종합’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사멸이라는 전체적 전망, 결국 국가의 변혁 및 직접 기층민주주의의 전개라는 두 가지가 접합된 과정을 포함하는 전망 속에 자신을 위치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 341쪽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와 관련된 이해를 돋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맑스주의자나 다른 이론가들과의 논쟁의 과정에서 쓴 듯한 글이라 관련 내용을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 읽으면 수월하겠지요.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 풀란차스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풀란차스만이 아니라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맞서 싸워야할 것은 지배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소위 진보이고 소위 좌파인 무리들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진보를 내세우며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민주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인 길에 관한 낙관주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쉽게 위험이 없는 순조로운 왕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위험은 존재하거나, 혹은 전이되어 존재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 모두가 지명된 희생자로서 수용소 및 학살의 창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에 대해 나는 답하고자 한다. 즉 위험의 비중을 따진다면, 차라리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고 결국은 공안위원회의, 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 독재자의 단두대의 칼날 아래 우리 자신을 죽이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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