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서광사, 박종현 옮김
불경죄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친구인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탈옥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저 세상으로 떠나려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곳에서의 머무름에 관련해서 그게 어떤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러 모로 살피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아마도 아니 가장 적합하겠기 때문일세. - 280쪽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던 날, 마지막으로 제자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죽음과 혼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게 되는 데 대해 성내는 게 마땅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기뻐하는 게 마땅하겠기 때문입니다.” 이를 소크라테스께서 들으시고서는 케베스의 탐구심에 대해서 즐거워하시는 것 같이 제겐 생각되었습니다...“알다시피, 케베스는 언제나 어떤 논의거리들을 찾아내거니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곧바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일이 전혀 없지.” - 284쪽
죽음을 앞둔 스승이 제자의 탐구심을 칭찬하는 모습입니다.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에 옳게 종사하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아닌 죽는 것과 죽음을 스스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으이. - 287쪽
어이없는 재판 때문에 곧 독배를 마셔야 할 판국에 철학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추구해 왔다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
우리는 그것을 혼이 몸에서 벗어남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게지? 그리고 이것이 죽음이라고, 즉 몸은 몸대로 혼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만 있게 되고, 혼은 혼대로 몸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만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지? 죽음이란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겠지? - 289쪽
죽음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몸과 혼이라는 것이 있고, 이들이 분리되는 것이라는 거지요. 먹고 마시는 즐거움, 성적 즐거움, 몸에 관련된 보살핌 등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면서 철학자와 몸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니깐 대체로 자네에겐 그런 사람의 관심은 몸에 대한 것이 아니고, 가능한 한 몸에서 멀리 떨어지되, 혼으로 향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가?...지혜를 사랑하는 이(철학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혼으로 하여금 몸과의 결합상태에서 최대한 벗어나게 하는 사람임이 분명하겠지? - 289, 290쪽
어느 정도 형편이 괜찮았던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점점 살림을 털어 먹고, 왜 언제나 꺼주구리한 모습으로 다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은 아닌가 싶네요.
존재한다는 것
존재하는 것들 중의 어느 것이 정녕 어디에선가는 혼에 아주 명백해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추론함에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 292쪽
추론에 관한 역자의 설명이 있습니다.
추론(logismos)은 이성(logos) 고유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요컨대 어떤 감각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그런 것은 ‘사유(사고)를 통한 추론’에 의해서 포착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유 또는 사고나 추리는 모두가 이성의 기능 또는 능력이다. - 293쪽
국가란 무엇입니까? 동사무소? 파출소? 주민등록증? 국가가 무엇인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동사무소나 주민등록증을 통해서 국가를 추론할 수는 있을 겁니다.
적어도 혼이 가장 훌륭하게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즉 청각도 시각도 또는 어떤 고통이나 즐거움도 혼의 주의를 돌려놓으며 괴롭히는 일이 없고,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으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 혼이 가능한 한 몸과 관계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그때일 걸세. - 293쪽
이 말은 죽음과 몸과 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르게 읽으면 학문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상에 다가가가고 지(知)를 찾아야 할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대상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지를 제대로 찾을 수도 없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라고 하든 진보적인 학자라고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욕을 품고 있는 사람이 권력이나 지배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권력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권력에 대해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찾는 것은 권력에 대한 지(知)가 아니라 자신이 권력을 쥐는 방법에 대한 지(知)가 되겠지요.
우리는 올바른 무엇인가가 그 자체로 있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전혀 없다고 말하는가? - 294, 295쪽
‘그 자체로 있다’는 말이 좀 애매합니다. 역자의 말을 보지요.
여기에서 플라톤의 저 유명한 ‘이데아(idea)' 및 형상(形相:eidos)과 관련된 언급이 시작된다...플라톤의 전문 용어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데아’나 ‘형상’도 실은 사물 또는 존재의 ‘본모습’ 또는 ‘참모습’으로서,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성에 의해서나 보게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서 쓰게 된 말이다. - 294쪽
본질 또는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몸의 구속에서 벗어나 혼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잇습니다.
그러니깐 죽게 되었다 해서 성을 내는 사람은 자네가 본다면, 이는 결국 그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이 아니라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데 대한 충분한 증거가 그대한테는 되어주지 않겠는가? - 303쪽
스승이 죽는다고 세상이 쫑 나을게 아니라 혼이 있다고 하니 제자가 묻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 혼은 있으며 또한 그 혼이 어떤 힘(능력)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아마도 적지 않은 설득과 증명이 필요합니다. - 309쪽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스승이 곧 죽게 되었는데 설득하고 증명하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에 그리고 올바른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립되겠고, 그 밖에 수없이 많은 다른 것도 이러하겠다...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생성된다는 것, 즉 모든 대립되는 것이 대립되는 것들에서 생성된다는 것, 이 점을 우리는 확실하게 한 것인가? - 312쪽
대립과 생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것에서 생기는 것은 무엇인가?”
“죽는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한데, 죽은 것에서는 무엇이 생기는가?” 그분께서 물으셨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서로 대립 또는 관계하는 것들을 함께 놓고 보는 방법입니다. 자본가-노동자, 남성-여성, 장애인-비장애인, 동성애자-이성애자... 뭐 이런 식이지요.
노동자가 노동자인 것은 자본가가 자본가이기 때문이겠지요. 대립하는 것들이 관계를 맺음으로써(대립한다는 것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쪽이 규정되고, 한쪽이 규정됨으로써 다른 쪽도 규정되는 것이겠지요. 양쪽이 규정됨으로써 이들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일 거구요.
그는 리라를 알아보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엔 그 리라의 임자인 소년의 모습을 떠올려 갖게 되겠지? 이건 상기함일세. 마치 누군가가 시미아스를 보고서도, 번번이 케베스를 상기하게 되듯 말일세. - 321쪽
웬 상기? 역자의 말을 보지요.
‘상기함’이 궁극적으로는 어떤 감각적 지각을 넘어선 다른 것에 대한 앎을 혼 자체의 능력에 의해 갖게 된다는 것 - 318쪽
안다는 것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앎(지식)을 갖게 되고서는 이를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 - 329쪽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럴 수 없겠는가? - 330, 331쪽
무엇인가 대해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여러 말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사막에 사는 고래에 대해 알고 있어’라고 한다면 이건 정말 아는 것일까요? 사막에 사는 고래란 없기 때문에 사막에 사는 고래에 대해 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 겁니다. 신통방통 전지전능한 부처님이나 하느님도 그런 건 아닐까 싶네요.
‘아니야. 나는 부처님의 신통방통한 능력을 보고 있단 말이야’라고 하고 싶으면 자신이 보는 부처님의 신통방통한 능력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부처님의 능력인지를 설명하고 논증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사람은 ‘너에게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나는 알고 있어’가 아니라 저도 알 수 있도록 하느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설명하면 됩니다.
같음(동일함) 자체나 아름다움 자체, 각각인 것 자체, 즉 [각각]임 [자체]가 도대체 그 어떤 변화인들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이들 각각인 것은 그 자체로는 한 가지 보임새여서,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으며 결코 어느 때든 어떤 점에서든 또 어떤 식으로든 아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 338, 339쪽
'언제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CEO'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건 없을 겁니다. CEO는 착취와 관련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착취할 수는 없을 거구요.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총’라는 비유는 가능하지만 어쨌거나 총은 사람을 죽이는 물건입니다.
이것들을 자네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으며, 또한 그 밖의 다른 감각들에 의해서도 지각할 수 있을 테지만,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들은 사유(사고)를 통한 추론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서도 결코 포착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며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 않겠는가? - 339, 340쪽
불우이웃 돕자고 연탄을 나르는 CEO를 볼 수는 있어도 착취하지 않는 CEO는 없는 겁니다. 착취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추론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구요.
학문과 토론
혼과 몸이 한데 있을 때, 자연은 몸에 대해서는 복종하고 지배받도록 지시하되, 혼에 대해서는 지배하고 주인 노릇을 하도록 정해준다고 말일세. - 342쪽
혼-몸, 내면-외면, 본질-현상 등등의 관계로 사람이나 세상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혼과 몸이 따로 있다면 하면 혼이란 무엇일까요?
신적이며 죽지 아니하고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으며 한 가지 보임새이고 해체될 것이 아니며, 또한 자기에 대해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가장 닮은 것이 혼 - 343쪽
신적인 혼이라고 해서 원래 있는 그대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낫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하는 것도 더 나은 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일 거구요.
만약에 어떤 참되고 확실한 논변(주장)이 그리고 깨닫게 될 수 있는 논변(주장)이 정작 있다면, 그런데도 누군가가 이와 같은 어떤 논변(주장)들, 즉 같은 것들이면서도 때로는 참된 것들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논변들에 접하게 된 탓으로 해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서투름을 탓하지는 않고, 마침내는 괴로움 때문에 탓을 선뜻 자신에게서 논변들에 떠넘기고서는 이제는 논변들을 몹시 싫어하며 욕하면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면, 그러나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와 이것들에 대한 앎은 잃게 된다면, 이 사태는 딱한 일일 것이야 - 374쪽
책 좀 읽었다는 사람, 나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A 맞다 싶어 ‘야 A가 진짜야. 너네들 모르지?’ 하다가, 좀 있다가는 ‘야 A가 아니야. B가 진짜라니까’라고 합니다. ‘00주의가 맞아’라고 하다가 ‘**주의가 맞아’라고 하다가 뭐 그런 식이지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니 이제 하는 말이 ‘무슨 무슨 주의가 뭐 중요해. 그냥 사는 거야. 아직 철이 덜든 놈들이나 무슨 무슨 주의 따지는 거지 좀 아는 사람은 나처럼 세상을 넓고 여유롭게 보는 거야. 에헴~~~’입니다. 뒷짐지고 부채질도 한 번 해 주구요.
혹시나 제자들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말을 잇습니다.
논변(주장)에는 확고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마음(혼) 속으로 들게 하지 말 것이로되, 그보다는 아직은 우리 자신이 확고하지 못한지라, 확고해지도록 과감해야만 하며 힘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훨씬 더 들게 하세 - 374, 375족
내가 모른다고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일 뿐이며, 아직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더 노력하면 됩니다. 아직 모른다고 해서 알 수 없다고 하지는 말아야겠지요.
지혜를 사랑하는 자세로 임하지 않고 마치 아주 교양 없는 사람들처럼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어서네. 왜냐하면 교양 없는 사람들도 뭔가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되면, 그 논변이 다루고 있는 것들의 진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내세운 것들이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데에 열을 올리기 때문일세. - 375쪽
좀 안다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학문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방송 토론회를 보면 황당할 때가 있습니다. 토론 주제와 관련 없이 상대방 말꼬리 물고 늘어지거나 어떻게든 상대방의 약점만 캐내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명박 정권과 FTA 문제로 싸움을 벌일 때에도, FTA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논쟁을 하든 싸움질을 하든 제대로 할 수 있겠지요.
제대로 알려고 노력함으로써 더 나은 혼을 만들게 될 거구요.
만약에 내가 뭔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자네들에게 생각되면, 자네들이 동의해 줄 것이로되,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자네들이 할 수 있는 논변을 다 해서 항거하게. - 376쪽
진리를 찾는 과정은 혼자 하는 것이기도 하고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함께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누구이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말이 맞으면 맞다고하고 틀리면 틀렸다고 하세요’라고 해야겠지요. 그래야 함께 진리를 찾을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수, 교사, 학자 가운데는 논증이나 토론은 거부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주입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많아 큰 일입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이쪽 것은 아무 논증도 거치지 않고 어떤 그럼 직함과 그럴싸함으로 해서 제가 갖게 된 것이기 때문이거니와...저는 그럼 직한 것들을 이용해서 논증들로 삼으려는 논변들이 기만하는 것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379쪽
세상에는 화려한 말과 그럴싸한 문장으로 마치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습니다. 저 같이 아는 게 적은 놈이야 그럴싸한 것들과 진리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노력해서 구별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원인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안다는 것이, 즉 무엇으로 해서 각각의 것이 생기며 무엇으로 해서 소멸하고 무엇으로 해서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 내게는 대단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지. - 391쪽
‘원래 그래’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일까요?
진짜 원인과 그것 없이는 원인이 결코 원인일 수 없는 것 - 399쪽
내게는 로고스들(logoi)에 의지하여 이것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있는 것들)의 진리(진실)를 고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 404쪽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거지요.
눈이 어쨌든 눈이면서 뜨거움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이전의 그것일 수는, 즉 눈이면서 뜨거울 수는 결코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뜨거움이 접근해 오면, 이것에 자리를 내어주거나 소멸해 버릴 것이라고 말일세...비단 형상 자체 만이 언제까지나 제 이름에 대한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형상 자체는 아닌 다른 무엇인가도, 그것이 있는 한은 언제나, 그것의 특성을 언제나 갖네. - 420쪽
플라톤이 계속 찾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이 그것이게끔 하는 무엇인가 봅니다. 혼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죽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하는 게 필연적인 일이지 않겠는가? 죽지 않는 것이 파괴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면, 혼에 죽음이 닥친다 해서, 그것이 소멸할 수는 없으이. 왜냐하면 혼은, 앞서 말한 바에 의할진대,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거니와 죽은 상태의 것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네. - 430쪽
마지막 순간
이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 시간이 점점 다가옵니다. 친구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지요.
생애를 통해 몸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들이나 치장들에 대해서는, 제 것 아닌 낯선 것들이며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해롭게 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결별을 하되, 배우는 것과 관련된 즐거움들에 대해서는 열의를 보이며, 혼을 낯선 것이 아닌 혼 자체의 장식물로, 곧 절제(건전한 마음 상태)와 올바름(정의), 용기, 자유, 그리고 진리로 장식하고서... - 451쪽
크리톤이 안타까워 말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내가 생각하기로는 해가 아직 산등성이에 있지, 아직은 진게 아닐세. - 456, 457쪽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좀 뒤에 그걸 마심으로써 내 자신에게 비웃음을 자초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할 것이라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지. 사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이제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는 터에 아낀다는 것은 말일세. 그러니 가게! 내 말대로 따라주게. 달리는 말고. - 457쪽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자 다리부터 점점 몸이 굳습니다. 크리톤은 슬퍼 밖으로 나가 버리고, 다른 이들은 울부짖으며 통곡을 합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순간을 맞고 [파이돈]도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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