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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형이상학] 1권

순돌이 아빠^.^ 2012. 1. 5. 15:32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김진성 옮김

 

내용이 중복되는 경우도 있고, 13권과 14권이 수(數)에 관련된 거라 저의 흥미를 크게 끌지 못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안다는 것,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게 해 주었습니다. 킹왕짱 책값이 좀 부담되었지만.

 

어떤 분은 옮긴이가 번역과정에서 지나치게 한글화를 시도하여 내용 전달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은 전체 내용을 읽어 보면 한글화 때문에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고, 오히려 이상한 일본말식 번역어를 한글화하는 게 더 좋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sun이냐 太陽(태양)이냐 해냐가 아니라 하늘의 빛나는 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1장 감각, 기억, 경험, 기술, 학문 지혜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 29쪽

 

책의 첫 마디가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입니다. 인간이란 게 본래 앎을 욕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앎을 욕구하는 게 인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인간이란 게 많은 경우 당장에 쓸모 있냐 없냐를 떠나 호기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모르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기도 하구요.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은 ‘(머리 안에) 비춰진 것’(인상)들과 기억들을 통해 살아가며, 경험은 조금밖에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무리’(인류)는 기술과 헤아림(추리)을 통해서 살아가기도 한다. - 30쪽

 

동물과 인간이 이런 차이를 가지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차근히 생각하고 깊이 알아보려하기 보다 기억과 인상에 의지하며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요. 추론해 보고 헤아려 보고 따져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는 경험 있는 사람들이 경험 없이 이론만 가진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성공을 거둠을 본다. {그 까닭은 경험은 ‘개별적인 것’(개별자)에 대한 인식이고, 기술은 ‘보편적인 것’(보편자)에 대한 인식인데, 실천(행위)과 산출은 모두 개별적인 것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간접적으로) 딸린 방식이 아니고서는,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지 않고, 칼리아스나 소크라테스를 치료한다...어떤 이가 경험 없이 이론을 가지며 보편적인 것을 알지만 그 안에 든 개별적인 것을 모른다면, 그는 치료를 잘못하는 경우가 잦을 것이다. 치료 대상은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32, 33쪽

 

개별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이용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때도 있는 거지요.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보편적인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셈이지요. 실천의 단계에 들어가면 실천 대상이 개별적이라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하든 치료하든 할 테니까요.

 

경험 있는 사람들보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더 지혜롭다고 믿는다. 한쪽의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만 다른 쪽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험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어떻다)는 것’ (사실)은 알지만, ‘무엇 때문에(그것이 그러는지)’(까닭)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술자들은 ‘무엇 때문에(그것이 그러는지)’와 원인을 안다. - 33쪽

 

감각은 ‘개별적인 것’(개별자)들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앎을 제공한다. 그러나 감각은 어느 것에 대해서도 ‘무엇 때문에’(왜)를, 예를 들어 왜 불이 뜨거운지를 말해 주지 않고 단지 불이 뜨겁다는 것(사실)만을 말해 준다. - 34쪽

감각하고 경험했다고 해서 대상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대상들에 대해서는 감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 인식에 다다를 수 있게 됩니다. 인식이란 것을 ‘불은 뜨겁다’, ‘얼음은 차갑다’, ‘개나리는 노란색’이다와 같은 정도로 그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노란 개나리가 피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것을 떠올렸다면 이미 감각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경험 있는 사람이 어떠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운 듯하며, 기술자가 경험자들보다, 도편수가 일꾼들보다 ‘이론에 관련된 학문’(이론학)들이 ‘제작에 관련된 학문’(제작학)들보다 더 지혜로운 듯하다. 그러므로, 분명히 지혜는 특정한 원리들 및 원인들에 대한 앎이다. - 35쪽

 

 

이론학이 제작학보다 더 지혜로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지혜롭다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지 못하거나 안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옮긴이의 얘기도 들어보지요.

 

예를 들어, 제화술은 ‘제작에 관련된 학문’으로서, 신발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 되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론에 관련된 학문’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론 자체를 위한 것, 즉 스스로가 목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학이 제작학보다 더 낫다. - 35쪽

 

신발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은 신발에 대해서 잘 알 겁니다. 그리고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신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가죽이나 천, 바느질에 대해서도 알아야 신발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쌀에 대해 안다고 나락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락을 키우려면 나락 키우는 것에 대해 알아야겠지요.

 

앞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옮긴이의 말은 사회적 지위와 학문의 지위를 연계 시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지식인이라고 자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들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도 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책 한 권 안 읽는다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목적’이라고 하면 고귀한 듯 하지만 사흘 굶으면 책을 불쏘시개 삼아서라도 밥을 할 겁니다.

 

이론학이 제작학보다 정말 더 지혜로운 것인지, 아니면 이론학을 하는 사람들이 제작학을 하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아서 자신들을 더 지혜롭다고 하는 것인지는 따져봐야겠지요.

 

2장~10장

 

더 지배적인(상위의) 학문이 종속된(하위의) 학문보다 더 지혜라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명령을 받지 않고 명령을 내려야 하고, 또 그가 남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덜 지혜로운 사람이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36쪽

 

철학자가 왕에게 봉사하며, 스스로를 노예보다 더 지혜롭다고 한다고 하지요. 사회의 위치인 왕-철학자-노예의 순서는 그대로 지혜의 위치가 됩니다. 아래쪽에 있는 노예는 철학자와 왕에게 복종해야 할 거구요. 요즘으로 치면 교수나 학자들이 권력자들에게 봉사하며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너희들은 무식하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해!’라고 한다고 해도 될까요.

 

아낙사고라스는 우주(의 구조)를 만들어 낼 때 이성을 ‘인위적인 장치’(해결사)로 사용하는데, 어떤 이유로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있어야(존재해야) 하는지 몰라 곤경에 처했을 때, 그는 이성을 끌어들인다. - 52쪽

 

진화냐 창조냐 할 때, 맨 처음에 있었던 생물이나 원자는 누가 만들었냐는 물음이 남게 됩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 ‘신’입니다. 신이 모든 걸 만들었다고 하면 모든 물음이 해결되거든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물음에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답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관념 속에서 해결된 듯 한 느낌이 들뿐 생명의 발생이 무엇인지 드러난 것은 없으니까요.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달리 하나와 수들을 사물들과 따로(떨어져)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 꼴(이데아)들을 끌어들인 것은 그가 (이 꼴들에 대한) 정의(定義)의 틀 안에서 (사물들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 67쪽

 

정의 또는 개념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념은 대상에 대한 개념이지 개념이 대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남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할 수는 있지만 남성이라는 개념이 남성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들의 창조자이신 신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신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모든 것’(우주)을 한 가지 것으로, 그리고 어떤 한 가지 실재를 밑감(재료)으로, 그것도 물질적이고 크기를 갖는 밑감으로 놓는 사람들은 분명히 여러모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물체들의 요소들만을 놓을 뿐, 비물체적인 것들의 요소들은 〔비물체적인 것들이 또한 있음에도 불구하고〕놓지 않기 때문이다. - 71쪽

 

그 밖에 그들은 흙을 제외한 단순 물질들 중 아무거나 쉽게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것들이 {내가 말하려는 것은 불, 물, 흙, 공기다} 어떻게 서로로부터 생겨나는지를 눈여겨보지(주의하지) 않고서 말이다. - 71~72쪽

 

교장, 교사, 학생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다고 학교가 되는 건 아닐 겁니다. 이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힘이 학생을 학생으로 만드는 지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지요.
 
무엇보다도, 꼴(이데아)들이 ‘감각되는 것’(감각 대상)들 중 (해, 달, 별 등의) ‘영원한 것’들에게 또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는 물음을 누구든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꼴들은 그것들에게 운동의 원인도, 어떤 변화의 원인도 못 되기 때문이다. 또, 꼴들은 다른 사물들에 관한 앎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꼴들은 그것들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꼴들은 그것들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자신들을 나눠 갖는 사물들 안에 (구성요소로서)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들의 있음(존재)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꼴들이 본(원형)이고 다른 것들은 이것을 ‘나눠 갖는다’(분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빈말하는 것과 같고, 시적인 비유를 말하는 것과 같다. - 83쪽

 

사물들과 그 사물들의 실체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데아들이 사물들의 실체이면서 (이 사물들과) ‘따로 떨어져’(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겠는가?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꼴(이데아)들이 사물들의 있음(존재)과 생겨남(생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꼴들이 있다(존재한다) 치더라도 (꼴들을) 나눠 갖는 것(사물)들은 (자신들을) 움직이는(변하게 하는) 것이 있지 않는 한, 생겨나지 않는다. - 84쪽

 

 

플라톤이 본을 세워놓고 얘기하자고 합니다. ‘그것 자체’가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 자체’가 어디 있는 걸까요? 눈 앞에 있는 의자는 의자가 아니고 의자 그 자체가 어디 다른 곳에 있을 걸까요? 인식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을 놓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겠지요. 자꾸 상상해서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대상 밖에 대상의 본질이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