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김진성 옮김
2권
진리에 관한 연구는 어떤 점에서는 어렵지만, 어떤 점에서는 쉽다. 이는, 한편으로 어느 누구도 진리를 딱 맞게 얻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진리를 (전혀) 얻지 못하지는 않아서 저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해 무엇인가 참인 것을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또는 조금 밖에 진리에 이바지하지 못하지만 모두 한데 모이면 꽤나 많은 양이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진리가 “누가 도대체 (화살로) 큰 문을 못 맞추랴”란 속담의 큰 문과 같은 것이라면, 진리(를 얻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대충) 가질 수 있지만 (겨눈) 부분을 (정확하게)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 - 97쪽
정말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은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몇 마디 안하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기도 하구요.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하는 사람이 모두 진리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적은 수의 사람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그 가운데 더 적은 수의 사람이 진리를 찾곤 합니다.
한 학자가 A에 대한 개념을 찾는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 찾아 놓은 개념을 바탕으로 개념A를 찾아 갈 겁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진리를 찾기도 하고, 이에 앞서 사회의 노력이 개인으로 하여금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밑바탕이 되어 주기도 하는 거지요.
이런 어려움은, 아마도 두 가지 종류인 듯한데, (지금의 어려움은 그) 원인이 사물 안에 (놓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놓여) 있다. 마치 박쥐의 두 눈이 대낮의 빛을 대하듯, 그렇게 또한 우리 혼 안의 이성도 ‘모든 것들 중 본성으로 볼 때 가장 명백한 것들’을 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98쪽
그 이름이 교수나 연구원이라서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사람이 학자일 겁니다. 그의 나이나 성(性), 계급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한다고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겁니다. 화살을 쏴서 대충 맞추기는 쉬워도 제대로 맞추기는 어려운 거지요.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진리를 찾을 능력이 있어야 할 거고, 그 능력을 갖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겠지요.
철학을 “진리의 학문”이라 부르는 것은 옳다. ‘이론에 관련된 학문’(이론학)의 목표는 진리이고, (윤리학, 정치학 등의) ‘실천에 관련된 학문’(실천학)의 목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98쪽
철학은 진리의 학문일까요, 아니면 진리의 학문이라고 자임하는 걸까요?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목표는 행위인가요? 윤리학은 윤리에 대한, 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학문이고 정치학은 정치에 대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학문인 건 아닐까요? 어떻게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정치적으로 실천할 것인지는 행위·행동·실천과 관련해서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3권
지혜가 가장 지배적이고 가장 주도적인 한, 그리고 다른 학문들이 여자 노예들처럼 말대꾸하는 것이 옳지 않는 한, 목적과 좋음에 {이것을 위해 다른 것들이 있다} 관한 학문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 114쪽
여자 노예들처럼 말대꾸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자 노예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 아닐까요?
(본질 또는 꼴로서의)실체에 관한 학문이 지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가지) 같은 것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식되어서, 우리는 있음/…임으로써 한 사물이 무엇인지를 인식한 사람이 있지/…이지 않음으로써 인식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앞의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알아서, ‘어떤 것(사물)이 무엇인가’(실체나 본질 또는 이에 대한 정의)를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이 안다고 하지, 그 사물이 얼마만큼(양)인지, 어떠한 (질의) 것인지 또는 본성상 어떤 작용을 (다른 사물에게) 입히거나 (다른 사물로부터) 입히는지를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이 안다고 하지 않는다. - 114~115쪽
다리가 있고, 딱딱하고, 나무나 쇠 등으로 만드는 것이 의자가 아니라 사람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의자겠지요. 대상A에 대해 안다는 것은 본질이나 실체를 아는 것이기 A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늘어놓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페이스북을 이해한다는 것은 페이스북 프로그램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페이스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소통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해야 한다’(배중률)는 것이나, ‘어떤 것이 있고/…이고 동시에 있지/…이지 않을 수는 없다’(모순율) - 116쪽
‘미니의 머리는 그가 살고 있는 집보다 작다’는 것은 맞거나 아니면 틀린 것이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증명은 어떤 것들로부터, 어떤 것에 관한, 어떤 것들의 증명이다. - 117쪽
‘자본주의는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체제다’라는 주장이 있다고 하지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인간, 착취, 사회체제와 같은 여러 개념들을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신을 논하는 사람’(신화론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쏟을 뿐, (철학자인) 우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들을 원리들로 삼고 신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생겨나게 만들면서,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맛보지 못한 것들은 ‘죽는 것들’이 되었다고 얘기한다. 분명히, 그들이 이런 말들을 썼을 때, 자신들은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원인들의 (구체적인) 적용 자체는 이미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신들이 즐김(쾌락)을 위해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먹고 마신다면, 이것들은 신들의 존재 원인이 결코 아니겠지만, 존재(‘생존’)를 위해 먹고 마신다면, 그들도 음식물이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영원한 존재일 수 있겠는가? 신화의 방식으로 교묘하게 꾸며 내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그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살펴볼 만한 값어치가 없다. - 132쪽
절이나 교회에 가면 늘 하는 말이 ‘부처를 믿어라’, ‘예수를 믿어라’입니다. ‘부처를 파악하라’,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라’라고는 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부처나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믿는 이들끼리는 얘기가 아주 잘 통합니다. 똑같은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사람들과 그들이 믿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있어도, 무엇이 있는지,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믿음과 인식은 아메바와 스마트폰만큼이나 한 자리에 있기 어렵겠지요.
종교인들만 그럴까요? 책 좀 읽었다는 사람,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 가운데도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되고, 서로가 아는 것에 관한 토론은 서로가 믿는 것에 대한 토론이지요. 손오공이 있다고 믿으면서 손오공에 대해서 안다고 느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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