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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 [국가·정체政體] 5권

순돌이 아빠^.^ 2011. 12. 11. 12:19



감시견(監視犬)들의 암컷들은 수컷들이 지키는 것들과 똑같은 것들을 함께 지켜야 하고, 사냥도 함께 하며, 그 밖의 것들도 공동으로 해야만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아니면 암컷들은 강아지들의 출산과 양육 탓으로 그런 일들을 할 수 없는 것들로서 집 안에만 머물게 하는 한편, 일을 하고 양떼에 대한 모든 보살핌을 떠맡는 것은 수컷들이어야만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우리가 여자들을 남자들과 같은 목적에 이용코자 한다면 여자들에게도 같은 것을 가르쳐야만 하네. - 322쪽

여성

4권까지만 읽으면 플라톤이 남성 중심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권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방금 언급된 것들과 관련해서 많은 것이 관습에 어긋나서, 만약에 말한대로 실천된다면, 아마도 우습게 보일 걸세...자네가 보기엔 이것들 중에서도 무엇이 제일 우스운가? 여자들이 도장에서 옷을 벗은 상태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그런 것일게 분명하겠지? - 322쪽

지금도 많은 사회,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사회 참여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에이 여자가...’ ‘여자가 무슨!’이라며 관행과 어긋난다고 합니다. 여성이 나서서 무언가 할라치면 ‘웃기고 있네’하며 비웃음을 던지기도 하지요. 2,400여 년 전 플라톤이 살던 시절은 어땠을까요? 민주 정체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성인 남성에게 해당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 시절에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 비웃음 사기 좋았겠지요.

눈으로 볼 때의 우스꽝스러움도 ‘이치로 따져서’(논의를 통해서) 드러난 최선의 것에 의해서 사라졌던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또한 이는 이런 사실을 보여 주기도 했네. 즉 나쁜 것과는 다른 것을 우스꽝스런 것이라 생각하는 자는, 그리고 어리석고 나쁜 것의 광경을 보고서가 아니라 다른 것의 광경을 우스꽝스런 것으로 보고서 웃기려는 자는, 그리고 또한 아름다운 것의 목표를 좋은 것 이외의 것으로 설정하고서 진지해지는 자는 실없는 사람이라는 걸 말일세. - 324쪽

여자가 마을 이장을 맡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웃지 말라고 싸울 것도 없이 왜 그게 우스운 일인지 따져 보면 됩니다. 따져서 우스운 일이면 웃고, 우스운 일이 아니면 안 웃으면 됩니다.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것입니다. 밀감이 사과와 다르다고 해서 밀감이 사과에 비해 열등한 것은 아니잖아요. 밀감을 과일이라고 한다고 해서 사과가 화를 낼 이유는 없습니다. ‘여자도 사람이다’, ‘노예도 사람이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라고 한다고 해서 웃을 것 없구요.





여성의 신체 모양이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여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여성이 되는 거지요.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여성이 되는 겁니다. 남성-여성이 함께 운동하는 것은 남성 지배의 사회냐 아니냐에 따라 많이 다를 겁니다. 남성이 지배하고 있을 때는 남성과 여성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남성이 지배하고 있지 않을 때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함께 있는 것이 별 문제 없겠지요.

남성과 여성이 만약에 어떤 기술이나 또는 다른 일(업무)과 관련해서 서로 다른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쪽에 이 다른 일(업무)을 배정해야만 한다고 우리는 말할 걸세.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달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점에 있어서만이라면, 즉 여성은 아이를 낳으나, 남성은 아이를 생기게 한다는 점에서라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데 대한 증명이 조금도 잘된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며, 오히려 우리의 남자 수호자들도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도 같은 업무에 종사해야만 한다고 우리는 여전히 생각할 걸세. - 328쪽

임신과 출산에 관해 남자는 씨요 여자는 밭이라는 식의 얘기 같은 것만 뺀다면 플라톤의 얘기는 깜짝 놀랄만한 것입니다. 남성-여성의 차이를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것으로 한정하고 다른 사회적인 문제에서는 성향이 다르지 않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보면 한 천민이 과거 시험을 본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사대부라는 것들이 어떻게 천민이 과거를 보냐며 난리를 피웁니다. 종자가 다르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그 천민이 장원급제를 해 버렸네요.

전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모든 게 똑같은 사람은 없겠지요. 다만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같음과 다름을 규정합니다. 계급이나 성(性), 피부색과 종교 등등이 그런 거지요. 

실은 여자의 경우에도 성향에 있어서 한 여자는 의술에 능하나, 다른 한 여자는 그렇지 못하고, 또 한 여자는 시가에 능하나, 다른 한 여자는 시가에 능하지 못하다고 우리가 말할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 330쪽

여자만 그렇겠습니까? 남자도 그렇겠지요.

이들 모든 남자의 이들 모든 여자는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개인적으로는 동거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네. 또한 아이들도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을 알게 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아이도 자기 부모를 알게 되어 있지 않다네. - 334쪽

여기서 공유한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것과 연결 짓기보다는 서로 관계 맺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앞의 얘기를 누군가 들으면, 놀라고 자빠져 까무라칠 일입니다. 개인적인 동거도 개인적인  양육도 없고, 부모-자식이 서로를 모르게 한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일이지요.

이들은 공동의 주거를 가지고 공동 식사도 하고, 그 누구도 그와 같은 것을 전혀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므로, 함께 살 것이며, 체육 훈련이나 그 밖의 양육에 있어서도 함께 어울리게 되어, 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상호의 성적 관계로 유도되네. - 336쪽

아이고, 어떤 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더 큰 일 났다고 하겠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공동 식사는 그렇다 치고 상호 성적 관계를 갖는다니 이 무슨 패륜이냐고 하겠지요.

과거와 다르다고 해서, 사회 관습과 다르다고 해서 플라톤의 이야기를 내칠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옳으니 그르니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남성 지배의 사회에서는 한 명의 남성이 여러 명의 여성과 성 관계를 맺는 것은 가능하지만, 한 여성이 여러 명의 남성과 성 관계를 맺는 것은 금지시킵니다. 만약 남성 지배가 사라지고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사회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과만 성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사라지고 서로가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성 관계 맺는 것에 인류의 대단한 미래가 걸린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면 가족은 어떻게 만드느냐구요? 가족이란 게 꼭 있어야 하나요? 서로를 아껴주고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건 꼭 가족이 아니어도 되겠지요. 같은 집에 사는 부모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이 자신에게 더 큰 힘이 될 때도 있는 거 아닌가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이 아침에 집에서 나가면 학교와 학원을 떠돌다 밤늦어서야 집에 옵니다. 학교 급식으로 공동 식사를 하구요. ‘내 새끼’ ‘내 가족’이라는 것은 강화될 수도 있고 약화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없어질 수도 있는 거구요.

개인과 국가

남녀의 자유로운 교류나 공동생활보다 더 찬찬히 따져봐야 할 것은 그 다음 이야기에 있습니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제일 변변찮은 남자들은 제일 변변찮은 여자들과 그 반대로 관계를 가져야 하고, 앞의 경우의 자식들은 양육되어야 할 것이로되, 뒤의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네...젊은이들 중에서도 전쟁에서나 또는 다른 데서 빼어난 사람들에겐 아마도 포상과 그 밖의 상이 주어져야만 하며, 여자들과의 한결 잦은 동침의 자유가 허용되어야만 하겠는데, 이는 이걸 핑계로 동시에 최대수의 아이들을 이런 사람들한테서 얻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일세. - 338, 339쪽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끌리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교류를 하는 이유도 편안함, 만족, 행복 뭐 이런 게 아니라 질 좋은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구요. 전쟁의 포상으로 더 많은 성 관계의 자유라니.

이들 관리들은 빼어난 자들의 자식들을 받아서는, 이 나라의 특정 지역에 떨어져 거주하는 양육자들 곁으로, 보호 구역 안으로 데리고 갈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반면에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은, 그리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자식으로서 불구 상태로 태어난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듯,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 둘 걸세. - 339쪽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사회가 계속 훌륭해지려면 훌륭한 사람이 계속 생겨야 된다는 말일 겁니다. 문제는 훌륭한 사람이 어떻게 계속 생길 거냐 하는 거겠죠.

키가 큰 부모에게서 키가 작은 아이가 나올 수도 있고, 키가 작은 부모에게서 키가 큰 아이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초딩 때는 키가 작던 아이가 중딩이 되면서 훌쩍 클 수도 있고, 초딩 때는 교실 맨 뒤에 앉던 아이가 고딩 때는 중간 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성향을 자식이 그대로 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성향이란 것은 환경이나 교육을 통해 바뀔 수 있는 거구요.

태어나는 사람 가운데는 장애인도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정치의 목적이 어떤 부류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이라면, 장애인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겠지요. 훌륭한 사회는 남들에 비해 능력이 좀 모자란 사람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요? 훌륭한 사람이면 당연히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할 거구요.

아직 아이를 낳을 나이의 남자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통치자가 짝을 지어주지 않았는데도,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를 건드리게 될 때도 같은 법이 적용되네. 우리는 이 사람이 실은 나라에 사생아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경한 아이를 떠맡긴다고 말할 걸세. - 341쪽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질 좋은 아이를 낳으라고 하더니, 이제는 통치자가 짝도 지어줘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더런 놈의 세상 ^.^

계급 사회에서 지배 계급이 플라톤의 얘기를 써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무얼 먹고, 마시고, 입고, 누구를 만나고, 언제 아이를 낳는 것까지 국가가 다 관리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영화 <이퀄리브리엄>에 보면 국가가 사랑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을 통제하는 사회가 나옵니다.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자들을 ‘감정유발자’라고 해서 처벌하지요. 아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국가에 대항해서 싸우구요.

어떤 것이 행복한 사회일까요? 연민이나 동정, 우정과 사랑 같은 감정은 느끼지 않은 채 모두가 올바른 것과 최선의 것만 생각하고, 생각한대로만 행동하는 사회일까요?

함께 산다는 것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혼에 이르기까지 전신에 걸친 전체적 공동 관계는 거기에 있어서 지배적인 것이 주도하는 하나의 조직으로 뻗어 있어서, 그걸 지각하게 되거니와, 그 부분이 아파하는 것과 동시에 전체가 일제히 함께 괴로워하는데, 우리가 이 사람이 손가락에 통증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해서이네. 그리고 이 설명은 사람의 어떤 부분의 경우에도, 아픈 부분의 고통의 경우에나 고통이 덜어지고 있는 부분의 즐거움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겠지? - 343쪽

그런 나라는 시민들 중의 한 사람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어떤 일을 겪게 되면, 그걸 겪고 있는 쪽이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다고 무엇보다도 우선 말할 것이며, 또한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 343쪽

우리는 고통과 즐거움의 공유가 ‘최대선(最大善)’이라고 동의했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하게 경영되는 나라를 신체에다, 즉 자신의 일부의 고통 및 즐거움과 관련해서 신체가 처하게 되는 상태에다가 비유했네. - 346쪽

연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대의 시작은 이해와 공감이 아닐까요? 상대가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알고 느낌으로써 개인과 개인이 단절의 상태를 넘어 서로에게 다가가는 거지요.

길을 가는데 저 앞에서 한 아이가 철퍼덕 넘어집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생판 처음 보는 아이지만 아이를 일으키고 묻은 흙을 털어주고 행여 울기라도 하면 울지 말라고 달랩니다. 아이가 옷과 손을 털고 고맙다며 인사를 하면 즐거운 마음이 들지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것을 두고 ‘내 것’이라 일컫게 됨으로써, 한 사람이 자기가 남들과 따로이 가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며, 다른 한 사람도 다른 자기 자신의 집으로 그렇게 끌고 가고, 또한 아내도 자식들도 따로 갖고, 사사로운 것들에 대한 사사로운 즐거움과 고통도 나라에 생기게 함으로써 분열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일세. 오히려 이들이 자기 자신들의 것에 대한 한 가지 신념으로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서, 고통 및 즐거움과 관련하여 모두가 최대한으로 ‘공감 상태’에 있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 347쪽

길을 가는데 앞에서 누군가 철퍼덕 넘어집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늘 나를 괴롭히는 우리 회사 사장이네요. 얼른 가서 일으켜 주고 싶을까요, 아니면 고소하다고 모른 채 하고 싶을까요. 아니면 얼른 가서 콱 한 번 밟아주고 싶을까요?

어떤 여성이 밤길을 가는데 앞에 가던 술 취한 남성이 철퍼덕 넘어집니다. 얼른 가서 일으켜 주고 싶을까요 아니면 다른 길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A는 00회사가 건물 청소를 하던 사람들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꾸었다는 얘기를 듣고 ‘에이 이런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A가 그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고, 회사는 노동자 임금을 줄임으로써 주주 배당을 높일 수 있을 거라 하네요. A는 비정규직이 된 청소 노동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즐거움과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개인의 성향 탓도 있을 거고, 공감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 문제도 있을 겁니다. 괴롭히고 못살게 굴던 사람한테 공감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나의 이익이 걸려 있으면 공감하다가도 멈출 수 있구요.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을 놓고 다른 사람과 싸울 일은 없을 거구요.

철학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 어떤 것인지 그 본을 그리고서, 그 그림에 모든 걸 다 충분히 표현해 넣은 화가가 그와 같은 인물이 생길 수 있음을 실증해 보여 줄 수 없다고 해서, 자네는 그를 덜 훌륭한 화가로 생각하는가? - 363쪽

앞에서는 여성과 공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부터는 그런 사회가 과연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내 생각으론 한 가지 변혁을 통해서도 나라가 바뀌는 것을 우리가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으이. 그렇더라도 그건 작은 것도 쉬운 것도 아니나, 가능은 한 것일세. - 364쪽

하나만 바꾸면 나머지도 바꿀 수 있는, 그 비법은 무엇일까요?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 365쪽

철학자가 군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 많은 권력자들이 들으면 놀라 까무라칠 소리입니다. 박원순 같은 사람이 서울시장 되는 것만 해도 저 난리를 피우는데, 소크라테스(플라톤)가 말하는 철학자가 왕이 된다면 저들은 놀라 자빠질 겁니다.

이걸 달리 생각하면 여러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철학자가 한데 합쳐져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자와는 다른, 흔히 말하는 학자니 교수니 하는 이들입니다. 이 철학자들은 인식을 생산할 능력은 없지만 권력자들을 위한 담론을 만들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런 담론을 (국정)철학이니 뭐니 하기도 하구요.


빨갱이가 무언지는 몰라도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 이야기는 만들 수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말하지는 못해도 거짓을 꾸며대는 것은 잘합니다. 이 철학자들은 권력자들을 위해 일하고,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재롱피우며 돈과 명예와 지위를 챙깁니다.

누구는 ‘그건 철학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거꾸로 철학과 철학자란 것이 정치권력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는 것일 수도 있구요.

철학자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으니 그러면 철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네요.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도 아름다움 자체는 믿지도 않고, 누군가가 그것의 인식(앎)에 이르도록 그를 인도할지라도, 따라갈 수도 없는 사람이 자네에겐 꿈꾸는 상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아니면 깨어 있는 상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 371쪽

말을 냇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아름다운 것 자체’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것과 이것에 ‘관여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그래서 ‘관여하고 있는 것들’을 ‘그것 자체’로 생각하거나 또는 ‘그것 자체’를 ‘관여하고 있는 것들’로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 자네에겐 ‘깬 상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아니면 이 사람 역시 ‘꿈을 꾸는 상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 372쪽

A가 학교의 개념을 찾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A가 이른 결론은 ‘교장, 교사, 학생, 행정실이 있는 게 학교야’입니다. A는 학교의 개념을 제대로 찾은 것일까요? 교사와 학생 등이 학교와 관계있는 것은 맞지만 그들을 뭉뚱그려 놓는다고 학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있는 네모난 건물을 학교라고 한다면 더 우스운 일일 거구요.

이 사람의 사고는 알고 있는 자의 것으로서 우리가 이를 인식(지식, 앎)이라 함이 옳겠으나, 앞엣 사람의 사고는 의견을 갖는 자의 것으로서 [우리가 이를] 의견(판단)이라 함이 옳지 않겠는가? - 372쪽

‘있는 것’(실재實在)에는 인식(앎)이, ‘있지 않은 것’(비실재非實在)에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상관할진대, 그것들 ‘사이의 것’에 상관하는 것으로 무지와 인식(앎) ‘사이의 어떤 것’을 찾아야만 되지 않겠는가?...그런데 우리가 의견(판단)이라고 말하는 게 있겠지? - 374쪽





A : 독도는 한국 땅이야
B : 왜?
A : 원래 그런 거야
B : 그러니까 왜 원래 그런 거냐고?
A :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그게...아니 그럼 독도가 한국땅이 아니라 일본땅이라는 거야?

A가 B에게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독도가 왜 한국땅인지 근거를 대면 됩니다. 만약 A가 근거를 대지 못하면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A의 생각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의견이 있듯이 말입니다. A의 의견은 독도와 한국,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상태에 있는 거지요.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관련된 다중(多衆)의 많은 ‘관습’(관례)이 ‘있지(...이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인) 것’의 중간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으이...‘많은 아름다운 것(사물)’을 보되, ‘아름다운 것(아름다움) 자체’는 못 보며, 거기로 자신들을 인도하는 사람을 따라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또한 ‘많은 올바른 것’을 보되, ‘올바른 것(올바름) 자체’는 못 보는 사람들, 그리고 또 일체의 것에 대해서 그러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그들이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은 갖지만, 자기들이 의견을 갖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걸세. - 380, 381쪽

다중, 대중, 시민, 민중, 여성, 노동자 등등의 무리는 제대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왜 노동자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딸들에게 ‘여성다움’을 강조합니까? 누구는 시민의 힘을 강조하는 데 그 시민들이 이명박 정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저부터도 근거 없고 논증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의견들을 마치 지식인양 진리인양 인식인양 떠들며 삽니다. 아는 게 아니라 아는 체 하는 것이죠.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처럼 제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인식으로 나아가야겠지요. 모르면서 안다고 하거나, 모르면서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으면 있을수록 인식은 멀어져만 가겠지요.

‘각각의 실재 자체’(각각인 것 자체, x인 것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로 불러야지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러서는 아니 되겠지? - 382쪽

대안교육은 기존 교육의 대안입니까? 만약 교육이란 것이 지배자들이 이용하기에 알맞은 기술과 태도를 갖춘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안교육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보수’정치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고 ‘진보’정치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정치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인식인지 의견일 뿐인지를 찾아가는 길은 ‘대안이 뭐냐’ ‘진보가 뭐냐’보다는 ‘교육이 뭐냐’ ‘정치가 뭐냐’라는 물음에서 시작할 겁니다. 교육이나 정치가 뭐냐라고 묻는 것은 교육이나 정치에 대한 각자 나름의 의견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정치,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일테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