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함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하여
가. 선과 악
가정과교육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으로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을 상정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가정과교육에서 praxis의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정과교육에서 praxis는 “개인 및 가정생활에서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행동, 개인 및 가정생활에서 숙고를 통해 선을 구체화 또는 실현하는 행동, 혹은 개인 및 가정생활에서 최선의 선을 추구하는 좋은 삶”...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phronimos)의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에 관해서 잘 살필 수 있는 것”(NE1140a)과 “인간을 위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해서 참된 이치를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NE1140b)라고 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유태명․이수희, [실천적 문제 중심 가정과 수업], 북코리아, 2010, 18쪽
유태명․이수희는 실천적 지혜에 대해 논의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용합니다. 해당 부분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5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5장의 마지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란 ‘인간적인 선에 대해서 참된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이다”라고 정의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 손명현 옮김, 동서문화사, 2011, 137~138쪽.
유태명․이수희가 인용하고 있는 최명관이 옮긴 글에서는 ‘실천적 지혜’라는 단어를 ‘실천지’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광사, 2001, 179~180쪽 참고)
그러면 여기서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선이나 이치, 덕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개인에 대해 다루면서 내용이 약간 추상적인데 반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정치학>에서는 가족․국가 등을 다루고 있어 그가 말하는 추상적인 단어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지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는 동료시민에 대한 정치인의 지배와 같으며 아이들에 대한 지배는 군주의 신하에 대한 지배와 같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이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이 여성보다 지배에 더 적합하며...-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 손명현 옮김, 동서문화사, 2011, 283쪽 노예는 사고 능력이 없으며, 여성은 사고 능력은 있지만 그 소유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으며 - 같은 책, 285쪽 우리는 시인 소포클레스가 여자에 대해 한 다음 말이 일반적인 진리라고 생각한다. 침묵은 여자의 영예. - 같은 책 285쪽 |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지배하도록 되어 있는 집단과 지배당하도록 되어 있는 집단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지배당하는 집단, 곧 아내와 자식과 노예는 주인인 남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선이니 덕이니 하는 것들은 지배계급인 남성들의 일입니다.
‘친애는 덕을 포용하며, 또 우리가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것’, ‘니코마코스 윤리학’ 가운데, 같은 책, 181쪽. ‘피지배계급이 잘 복종하고 혁명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게 하려면 그들 사이에 우애의 정신이 없어져야 한다’, ‘정치학’ 가운데, 같은 책, 294쪽 |
그 선과 덕이 잘 실천된 결과는 노예주인 남성의 욕망을 위한 사회질서가 잘 유지된다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닐까요?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고, 아내가 남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은 악이요 악덕이 될 거구요.
지배자들은 자신에게 이롭고, 자신을 즐겁게 하고, 자신의 욕망 실현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규정합니다. 악행이라는 것이 피지배자에게 이롭고, 피지배자들을 즐겁게 하고, 피지배자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선(善)이나 악(惡)이란 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인간에게 뚝! 하고 떨어진 것도 아니고, 인간의 역사가 언제나 품고 가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사회제도 속에서 그 모습을 달리하는 관념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은 물론이요, 건강한 가족․수평적 관계․남녀평등 등 대해 논의하려면 이것들이 놓여 있는 사회제도나 가족제도에 대한 논의가 선행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사회제도, 가족제도 위에 놓여 있는 ‘가족’
한국 사회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제도와 가부장제 가족제도에 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제도와 가족제도를 바탕으로 현실의 가족들이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회사 일에 시달린 사람에게 저녁에 자식이 길게 길게 늘어놓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해 주고, 함께 울고 웃으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낮 동안의 노동으로 육체적․심리적 에너지를 거의 다 써 버린 사람에게 ‘넌 왜 자식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거야!’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식과 소통하기 싫은 게 아니라 온 에너지를 다 써야만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제도 속에서 어찌 하지 못하는 겁니다.
줄리엣 : 아버지, 무릎 꿇고 간청을 드리오니 한마디만 제 얘기를 들어봐 주세요. (무릎을 꿇는다)
캐풀렛 : 목이나 매거나. 말 안 듣는 못난 것!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2011, 114쪽
줄리엣이 파리스와 결혼하기 싫다고, 제발 한마디만 들어봐 달라고 간청을 하는데도 아버지는 거절하며 줄리엣에게 욕을 퍼붓습니다. 지배자에게 피지배자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만 채우면 되지,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소통을 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인간사회에서 대화나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대화의 기술 부족이 아니라 지배-피지배 관계입니다. 남성과 여성이든, 부모와 자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지배-피지배 관계가 사라지지 않고 솔직한 대화나 마음 깊은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낮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인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어느 정도 약화 되었다고, 개인과 개인이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섰다고 가정한 상태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 함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하여
흔히 가족의 중요성이나 가족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가족이 관념 속에만, 상상 속에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추상적인 가족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입니다. 아내/남편, 아빠/엄마, 누나/형, 아들/딸 등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통해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관념 속의 가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1) 공감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식의 고통을 온전히 그대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 비춰서 자식의 고통이 어느 정도 일지를 가늠할 뿐입니다. 타인이 말이나 표정, 몸짓으로 신호를 보내면 우리는 시각이나 청각 등을 이용하여 그 신호를 지각합니다. 정신은 지각된 내용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함으로써 상대의 표정이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인지 고통을 나타내는 것인지를 판단합니다. 만약 그 신호가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판단되었을 경우, ‘괜찮아? 많이 아프지?’ 식으로 내가 상대의 고통에 대해 어떤 입장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상대는 ‘응 아파. 생각해 줘서 고마워’라고 다시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시합니다. 완전히 다른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들이 공감을 일으키는 겁니다.
2) 이해
공감하면 이해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가시에 찔렸다’, ‘가시가 손가락 안으로 5mm는 들어간 것 같다’, ‘이것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공감하지 않으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나무, 손가락, 고통이라는 단어들이 머릿속에 맴돌 뿐입니다.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 때문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는 상대를 이해 못하는 겁니다.
‘엄마...학교에 학원에 숙제에 성적에...힘들어’라고 아이가 말하는 데 엄마가 ‘그래 알겠어. 딴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해’라고 한다면, 이 엄마가 말하는 ‘알겠어’라는 것은 무엇을 알겠다는 것일까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상대가 어떤 때 기뻐하고 어떤 때 슬퍼하는지, 어떤 때 행복해 하고 어떤 때 고통스러워하는 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3) 존중
우리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욕망이 실현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욕망 실현이 방해 받으면 화가 나는 겁니다. 생명체로서의 자기 유지․보존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욕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존재입니다. 욕망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면서 감정이나 성격 등 .마음의 세계를 만들어가지요. 그러면서 인간은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즐거울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연인을, 아내와 남편을, 부모와 자식을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존중한다는 것일까요? 인간이 욕망의 존재이자 영혼의 존재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나이나 지위 등으로 보지 않고 욕망과 영혼의 존재로 바라보는 겁니다. 성과 사랑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인간으로, 즐겁고 행복한 영혼을 가지려는 인간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겁니다.
4) 배려
․ 배려Ⅰ : 배려는 존중에서 타인에게 조금 더 나아간 상태입니다. 내가 나의 욕망을 실현하면 행복하듯이 타인이 그의 욕망을 실현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겁니다.
․ 배려Ⅱ : ‘나는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이 욕망을 실현하고 난 뒤 이 사람의 영혼은 만족과 행복으로만 가득 찰까요? 언제 누가 자신의 권력을 빼앗아갈지 몰라 두려움을 갖게 되고, 혹시 나를 해칠지 몰라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남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인간은 상대가 나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을까 항상 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행복하고 편안할 수 있도록 욕망을 조절하거나 전환하는 것 또한 배려일 것입니다.
5) 함께 평화로운
다른 살인에 비해 친족살인을 더 큰 범죄로 여기고 비난하고 처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제 누가 나를 어떻게 위협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그나마 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친족마저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누구라도 언제든지 나를 공격하고 내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고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외로워서라도, 사랑받지 못해서라도 일찍 죽을 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공격 받지 않고 평화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다면 타인이 나를 공격하지 않아야 하고, 타인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려면 타인이 평화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타인이 불안이나 공포에 시달리지 않고 평화로운 영혼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려면 내가 타인을 공격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려면 내가 평화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할 거구요. 타인이 평화롭게 살아 내가 평화로울 수 있고, 내가 평화롭게 살아 타인이 평화로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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