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족
가. 가족 만들기
줄리엣 :...아버지께 말씀드려 주세요. 어머니, 전 아직 결혼 않을 거라고, 한다면 맹세코 파리스보다는 어머니가 제 미움을 잘 아시는 로미오일 겁니다.
......
캐풀렛 : 그 잘난 몸이나 추슬러 이번 주 목요일에 성 베드로 성당으로 파리스와 함께 가. 안 그러면 틀에 묶어 내가 끌고 가겠다. 나가, 누렇게 섞을 년아! 나가, 이 못난 것아!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2011, 112~113쪽
파리스는 줄리엣과 결혼하기를 원하고, 줄리엣의 아버지 캐풀렛은 딸을 파리스와 결혼 시키려고 합니다. 캐풀렛과 파리스는 목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을 하고 줄리엣에게 통보를 합니다. 가부장인 남성은 가족 안에서 최고 권력자이자 지배자입니다. 캐풀렛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딸에게 욕을 퍼붓고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파리스는 다른 가족으로부터 여자를 데려와 자신의 소유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가족을 만들려고 합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은 남성들 사이의 일입니다. 결혼 당사자들의 사랑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가부장인 남성들끼리 여성을 주고 받으며 가족 만들기. 왕은 그들의 우두머리
보노보 무리에서는 암컷들이 함께 꿀단지 가까이 다가가더니 서로 성적인 접촉에 몰두했다. 그러한 행동이 끝나자 두 마리는 나란히 앉아서 번갈아가며 꿀을 먹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거의 아무런 경쟁도 없었다. 수컷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수많은 위협 행동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암컷들은 수컷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 벨기에의 플랑큰달 동물원의 관찰자들도 수컷 보노보 한 마리가 암컷 보노보를 괴롭히려 하자 무리의 모든 암컷들이 한데 뭉쳐 수컷을 쫓아버렸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는 “수컷들이 무리를 지어 암컷 한 마리를 공격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암컷들은 떼로몰려가 수컷을 공격한다”라고 말했다. – 프란드 드 왈, [보노보] 가운데 |
한국 사회에서는 가부장제적 결혼이 많이 사라지고 당사자들의 선택권이 과거에 비해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은 당사자들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사자들만의 가족 만들기가 어려운 거지요. 특히 결혼 상대자의 부모와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시부모가 결혼 생활에 개입하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라고 요구하기도 하지요. 국가가 결혼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결혼은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을 사회적으로 승인한 제도이다. 따라서 모든 사회가 법률로써 결혼의 요건을 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법률혼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혼인 신고를 함으로써 법률적으로 부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의무와 권리가 주어진다. - 정성봉 외 5인, [고등학교 기술․가정], 교학사, 2012, 14쪽
위와 같은 방식의 결혼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결혼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①결혼은 동성간에도 가능합니다. ②결혼은 사회적 승인없이 당사자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③모든 사회가 법률로써 결혼의 요건을 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결혼 요건을 법률로 정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또 법률로 정했다고 해서 정당한 것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의 국가는 시민들이 누구와 어떻게 결혼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결혼 생활을 할지에 대해 일일이 개입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18세가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시민이 언제 결혼할지까지 통제하는 것이지요.
결혼에 따른 생활의 변화... ․ 독신의 불안정한 성생활→안정된 성생활 ․ 낭만적인 생활→ 현실성과 책임감이 따르는 생활 - 이병욱 외, [고등학교 기술․가정], 삼양미디어, 2010, 20쪽
결혼한 여성들의 입장에서 결혼은 안정되고 편안하고 행복한 성생활을 보장하는 사회제도일까요? 결혼을 하면 정말 현실성 있고 책임감이 따르는 생활을 하게 되나요? 무책임하게 가족을 내팽개치는 사람도 많지 않나요? 이 교과서를 만든 분들이 현실의 결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을 이해 못하거나 외면한 채 학생들에게 결혼에 대한 환상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 동거. 이혼. 간통
최근 경제적 필요성과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고 함께 사는 사실혼 관계의 동거 부부가 늘어나고 있다. 동거 부부는 법적 구속력이 약하고, 양가 가족 간의 유대감이 적다. 그래서 결혼 생활 중 문제에 부딪혔을 때 가족 모두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동거 관계를 해체하는 경우가 많다. 또 동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사회적 지원에서 소외되거나 권리를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다. - 같은 책, 19쪽
동거 부부는 법적 구속력이 약하고 양가 가족 간의 유대감이 적습니다. 법적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선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국가나 부모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당사자들 간의 성과 사랑을 만드는 방법이 동거일 수도 있으니까요. 결혼이 정상이고 동거는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동거의 한 형태로 결혼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동거를 결혼과 함께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사회도 있구요. 부부는 연인의 한 형태, 배우자는 파트너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구요.
동거 기간 동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결혼을 해서 살다가 이혼을 할 수도 있듯이, 문제가 발생하면 동거 관계를 중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학교폭력․성폭력 가해자들을 보면 대부분 법적 결혼 관계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지원에서 소외되거나 권리를 인정 받기 어렵기 때문에 동거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동거 관계 속에서 태어난 아이도 소외되지 않고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사랑에 기초한 결혼만이 도덕적이라면, 또한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의 결혼만이 도덕적이다. 그러나 개인적 성애의 정열이 지속되는 기간은 사람마다 아주 다르며, 특히 남자의 경우에 그러하다. 그리고 애착이 완전히 없어지거나 혹은 새로운 정열적 사랑이 그것을 밀어냈을 때, 이혼은 부부 쌍방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나 선한 행위가 된다. 이혼 소송이라는 쓸데없는 진흙탕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 1997, 94쪽
결혼 생활은 인간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해서 결혼을 했으면, 사랑하지 않을 때 헤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결혼이 주는 행복보다 고통이 더 크기 때문에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요. 폭력․외면․무관심․증오가 가득한 결혼 생활을 껍데기만 유지하는 것보다는 더 이상 서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결혼 생활을 중단하는 것이 정서나 건강에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결혼은 결혼 신고만 하면 되지만 이혼은 법적인 절차를 거치라고 합니다. 결혼에 비해 이혼은 더욱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사는 지를 국가에 꼭 신고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같이 살지 않겠다는 것을 국가로부터 허가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파트너 두 사람이 좋으면 함께 살고, 싫으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요.
“20일 서울시가 '2011 서울서베이' 및 '2011 혼인·이혼통계(통계청 인구동향조사)' 등의 자료를 분석해 내놓은 '통계로 보는 서울부부 자화상'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년 이상 산 부부가 0~4년 산 신혼부부보다 500건 이상 많이 이혼했다. 2010년 신혼부부의 이혼 건수는 5440건 인데 반해 오래 산 부부는 5083쌍 이혼했다. 2011년에는 격차가 더 벌어져 신혼부부는 5083건, 20년 이상 산 부부는 5704건 이혼했다.”, 뉴시스, ‘서울, 2년 연속 황혼이혼 신혼이혼 추월…여성 초혼 30대 진입’, 2012년5월20일, www.newsis.com |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혼을 어렵게 만든 것은 가족을 만드는 이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가족을 벗어나 다른 남성과 성행동이나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이혼의 자유를 확립하고, 이혼이 가족이나 국가의 개입 없는 두 파트너 사이의 의사로 결정할 수 있게 되면 가정 교과서에서 말하는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남녀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학교에서 결혼의 방법과 절차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큼, 이혼의 방법과 절차도 함께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요. 이혼을 가정의 파괴나 인생의 고통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위한 새로운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서울 가정 법원 홈페이지에서
간통죄는 국가가 성-대상 선택의 자유를 제약하고, 성-대상을 특정 인물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결혼 상대자가 아니면 성행동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게 따지면 성노동자들과 성행동을 한 모든 기혼 남성들은 간통죄로 처벌을 받아야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통죄니 일부일처제니 하는 것이 여성의 성-대상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남성들은 다수의 여성들과 성행동을 할 자유를 가진 반면, 여성들은 결혼 상대자가 아닌 남성과 성행동을 했을 경우 국가가 나서서 처벌을 하는 거지요.
신윤복의 <청금상련>. 정절을 강조하던 양반들
옥소리(왼쪽)를 간통죄로 고소했던 박철(오른쪽)
다른 사람을 쳐다봐도 되고, 마음으로 사랑해도 되고, 함께 차를 마셔도 되지만 성기를 접합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성을 성기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는 겁니다. 아동기 때 아이들의 성에 대한 관심이 온통 성기에 집중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 배우자와 외모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사랑, 건강, 성품, 지식, 외모 등 여러 가지를 보아야 한다. 특히 물질이나 외모를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력, 외모 등 한두 가지의 특성만을 보고 다른 중요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 정성봉 외 5인, [고등학교 기술․가정], 교학사, 2012, 12쪽
잘 생긴 남자나 예쁜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잘 생긴 남자, 예쁜 여자가 좋은 걸까요? 누구는 둥근 얼굴을 잘 생겼다고 하고 누구는 갸름한 얼굴을 잘 생겼다고 하고, 누구는 통통한 몸매를 예쁘다고 하고, 누구는 삐쩍 마른 몸매를 예쁘다고 합니다. 예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쁘다는 것은 시각과 관련이 있을 거고, 시각은 대상의 모양이나 색깔을 지각할 겁니다. 특정한 모양이나 색깔이 특정한 감정과 연결될 수도 있을 거구요. 다만, 인간의 어떤 모양이나 색깔을 예쁘다고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아함이라는 느낌 속에는 일종의 신체적 공감이 들어가 있으며, 그러한 공감의 매력을 분석해 보면,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신체적 공감이 미묘하게 그 관념을 암시하는 정신적 공감과의 인접성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2011, 31쪽 |
오, 횃불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가씨다! 검은 여인 귓밥 위의 값비싼 보석처럼 밤의 뺨에 그려가 걸린 것 같구나. 땅 위에서 쓰기에는 너무 귀한 아름다움!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2011, 42쪽
로미오가 줄리엣을 처음 보고 하는 생각입니다. 조금 전까지 로잘린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로잘린이 내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아 너무 괴롭다고 하더니 줄리엣을 보자마자 이제는 줄리엣이 세상에 제일 예쁘다고 합니다. 과연 로잘린과 줄리엣 가운데 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쁠까요? 로미오는 로잘린과 줄리엣이 예뻐서 사랑한 걸까요, 아니면 사랑을 해서(성욕을 느껴서) 예쁘다고 하는 걸까요? 성욕을 느껴서 예쁘다고 했기 때문에 한 순간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내가 성과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일수록 더욱 잘 생기고 예뻐 보이는 거겠지요. 그렇게 보면 남성들이 흔히 하는 ‘여자가 예쁘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남성이 가진 가장 큰 욕망이 성욕이고, 그 성욕만 실현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어찌되어도 좋다는 거지요.
라. 현실의 가족
1) 가족, 억압과 폭력
가족 구성원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사랑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애정 및 정서적 지지의 기능, 가족의 안전과 복지를 위하여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보호의 기능이 있다. - 정성봉 외 7인, [중학교 기술․가정 2], 교학사, 2012, 12쪽
한국여성의전화는 2011년 한 해 동안 언론보도를 토대로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된 여성들을 집계한 결과 최소 65명이었다고 19일 밝혔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운이 좋아 살아남은 19명을 합한다면 작년 한 해 최소 84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남자친구로부터 살해되거나 살해당할 상황에 노출됐던 셈이라면서 실제 살인사건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한국여성의전화 측은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아내는 14명이라고 밝혔다. - 한국일보, ‘'남편·애인 손에 죽은 여성'이 무려…’, 2012년4년19일, http://news.hankooki.com
‘우리가 아프고 힘들 때에는......그래도 가족이 최고지!’(앞의 책, 10쪽)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족 때문에 심리적․육체적 질병을 얻는 경우는 흔한 일입니다. 학문적 논의나 연구를 할 것도 없이, 그리고 가정 교과서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가족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정 교과서를 보면 가족에는 애정의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의 부부들은 정말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나요? 많은 부부들이 못 헤어져서 산다고 하지는 않나요? 욕하고 협박하고 두들겨 패는 일도 흔히 있는 일 아닌가요? 가족의 기능에는 교육의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의 가족을 통해 밥하고 빨래하는 등 생활에 필요한 능력, 음악이나 미술 관련된 예술적 감성,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지성 등을 키울 수 있나요?
양육과 보호의 기능도 있다고 합니다. 아빠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남자 아이는 ‘나는 절대 아빠처럼 안 해야지’라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를 때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싫다고 했던 아빠가 자신의 행동 모델이 된 겁니다. 여러 차례의 연애 경험 동안 사는 게 힘들다는 여성들과만 연애를 하는 남성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 남성이 어린 시절에 가정 폭력 피해자인 것은 아닌지 따져 봐도 좋겠습니다. 두들겨 맞는 엄마(여성)를 보면서 자란 아이는 자기가 보기에 힘든 여성을 보면 왠지 구해줘야 할 것 같고,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억압적인 아버지 곁에서 자란 여성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자상하기만 하면 된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서나 감정의 공감, 이해와 소통 등 연인/부부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여러 가지인데도 ‘자상’이라는 모습에만 끌리는 거지요. 아빠라는 남자의 모습이 싫어서, 아빠와는 반대 방향의 남자만을 찾는 겁니다. 이렇게 가족 안에서 벌어진 억압이나 폭력이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두고두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가족이 애정․양육․교육 등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이 어떤지도 알면 좋지 않을까요? 맨날 공부하라고, 놀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부모로부터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학생에게 ‘가족은 애정의 기능을 한다’는 말은 좀 공허하게 들리지 않을까요?
2) 부모의 나르시시즘
자식을 공부시키겠다고, 성적 올리겠다고 많은 것을 쏟아 붓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자식이 하기 싫다고 하고 힘들고 괴롭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두 너를 위한 거야’라고 말하고, ‘나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있어’라고 합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나르시스(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자신과 사랑에 빠집니다. 타인을 사랑-대상으로 삼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사랑-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이 부모에게는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권력이나 돈, 지위나 학력(A라고 하지요)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내가 돈이 없어서 이렇게 사는구나...’ ‘내가 좋은 대학을 못 나와서...’라며 자기연민을 느낍니다. 부모는 A를 갖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자기연민을 느끼고, 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그를 자아이상으로 삼습니다. 이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이 자식입니다. A를 갖기 위해 자신에게 쏟았던 에너지는 이제 자식을 향합니다. ‘또 다른 나’인 자식을 통해서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을 갖겠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공감의 정도나 형태가 달라지겠지요. 자식을 통해서라도 자아이상에 다가가려는 부모에게는 자식이 ‘힘들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들린다고 해도 무시해 버리지요.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욕망 실현을 위한 도구이고, 그 도구가 나타내는 감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모가 사랑하는 것은 자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자식을 이렇게 멋지게 키웠단 말이야. 자식이 멋진 만큼 나도 멋지게 보이지, 그치?’하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집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신을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는 겁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과 관련한 나르시시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펄쩍뛰겠지요. 자신이 부정하고 싶은 그 모습이 드러날까 봐 더 펄쩍뛰는 겁니다. 부모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알고, 이를 약화시키려 노력한다면 자식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3) 효(孝)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효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효 문화는 시대와 이념에 다라 변화되기도 하나, 부모를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며 봉양한다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 정성봉 외 5인, [고등학교 기술․가정], 교학사, 2012, 72쪽
삼종지도는 남성지배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남성에 대해 복종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충(忠)은 신하와 백성들에게 왕에게 복종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효(孝)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식들에게 부모,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가부장인 남성에게 복종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맹의자가 효를 물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어기지 않는 것이지요.
......
번지가 말하였다. 무얼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건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살아 계실 적엔 섬기기를 예에 걸맞게 함이요, 돌아가시면 장례와 제사를 예에 맞춰 지내는 것이지 - 배병삼, [한글세대가 본 논어1], 문학동네, 2006, 80~81쪽
공자의 생각이 담긴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와 효에 대해 나누는 대화입니다. 살아 계실 적엔 섬기기를 예에 걸맞게 함이요(生事之以禮)이라고 할 때, 예(禮)를 중심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섬긴다는 뜻을 가진 사(事)자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섬기는 겁니다.
삼종지도에서 여성이 남편을 섬기고 충신불사이군에서 신하가 왕을 섬기듯 인간 사이에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정성봉 등은 ‘가족 구성원 간의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 우리나라의 전통 효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효는 부모-자식 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드는 것임으로 효와 수평적 가족 관계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가족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고 싶으면 효를 버리고 동등한 개인들이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성.여성.가족 > 성.여성.가족-여러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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