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라고 해서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귀족연합 세력의 대표로써의 왕.
그의 생명과 권력 또한 귀족들과의 투쟁 과정에서 유지되기도 하고 상실되기도 하는 것.
공민왕의 피살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무력 기반도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권문세족과 신흥 무장 세력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걸핏하면 사병을 배경으로 우왕을 협박하곤 했다...우왕은 아버지 공민왕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자신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내시 등을 느닷없이 죽인 것도 이런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그는 아무도 믿지 못했다. 우왕이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병을 거느린 신하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강력한 무력 집단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왕은 대표적인 무장 세력인 최영, 이성계와 손잡고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해준 이인임 일파를 제거했다.
......
세상을 떠나기 전 예종의 다리에 종기가 난 것을 보고 신하들이 걱정하자, 그는 “이것 때문에 죽기야 하겠느냐.”며 건재를 과시했는데 바로 다음 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실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민간에는 한명회 등 훈신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지가 국왕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손상받을 것을 우려해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
정희대비가 성종을 지명한 배경에는 성종의 장인 한명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비롯해 세조 집권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세조 이후 예종 대에도 한명회는 정치권의 실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희대비는 후계 구도의 안정을 위해 한명회의 사위를 왕으로 지명한 것이다.
......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지 이미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 세월 동안 조선은 사대부들에 의해 양반체제로 정착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 국가였지만 국정 운영은 오히려 양반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조선의 양반 관료들이 왕권을 견제하거나 제약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들은 여러 가지였다. 유교 이념으로 왕을 얽어매거나 갖가지 제도를 통해 왕을 조종하려 들었다.
......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지 이미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 세월 동안 조선은 사대부들에 의해 양반체제로 정착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 국가였지만 국정 운영은 오히려 양반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조선의 양반 관료들이 왕권을 견제하거나 제약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들은 여러 가지였다. 유교 이념으로 왕을 얽어매거나 갖가지 제도를 통해 왕을 조종하려 들었다.
......
소론계 유생 조중우가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의 추숭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희빈을 추숭하느냐, 아니면 희빈 사사를 정당화해 놓느냐 하는 이들의 상소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오랜 침묵을 깨뜨림과 동시에 정쟁의 서막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경종으로서는 자신의 권위와 정통성을 위해 당연히 소론의 입장을 지지해야 했다. 또 자신을 역적의 아들로 간주해 모욕감을 준 노론이 괘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종은 노론의 위세에 눌려 조중우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바로 정조 암살의 주동자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 홍술해, 백부 홍지해, 사촌 홍상간이 유배에 처해지자 정조만 없애면 다시 옛날의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일을 저질렀다.
홍상범의 사주를 받은 전흥문과 강용휘 등은 칼과 철편을 지니고서 어둠을 틈타 대궐로 들어갔다. 그들은 왕이 거처하는 존현각 용마루에 올라가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객들은 칼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정조의 호위 무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
남인들 사이에서는 정조가 벽파 집단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이에 영남 사림 중에는 관아에 나아가 시위를 벌이는 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도 그의 저서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정조 독살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을 두려워해 아무 일도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신하에게 요직 한 자리를 임명할 때도 반드시 좌우에 묻기를 “교동 아저씨(김좌근)가 아는 일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 이성무, <조선왕조사>, 가운데
'지배.착취.폭력 > 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귀족들의 권력 투쟁 (0) | 2013.04.04 |
---|---|
한글 창제와 국가의 지배 (0) | 2013.04.04 |
전쟁 장사꾼 (0) | 2013.03.30 |
역사 또는 국사 만들기 (0) | 2013.03.28 |
국가. 법. 관료 (0) | 2013.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