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계급 내의 끝없는 권력 투쟁.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뭐든...
아래는 이성무가 쓴 <조선왕조사>의 일부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은 왕위를 넘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었다...조선 건국과 제1차 왕자의 난 일등공신인 방원의 위치가 너무 견고했다...방간은 ‘방원이 평소에 나를 시기하니, 이에 속절없이 죽을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궐기했다...방간은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란 이유로 죽음 대신 내린 토산 유배가 오히려 관대하게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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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의 형제들 및 아버지와 수차에 걸쳐 생사를 건 경쟁을 벌여야 했다...태종은...자신을 도와 왕이 되게 한 처가 식구들을 죽이고 부인 민씨를 냉대했다. 심지어 상왕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처가인 심씨들이 발호할까 염려해 이들을 멸문시키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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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태종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내가 부처를 좋아함은 두 아들과 사위를 위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태종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1402년(태종2)...11월5일 안변부사 조사의 등이 거병했다...과연 태조는 조사의의 난과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었을까?...그가 반란에 개입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태조가 개국주開國主이자 당시 국왕이었던 태종의 부왕이었기에 반장叛將으로 직접 칭할 수 없어 이를 조사의의 난이라 이름 붙였고, 태조가 반란에 직접 간여한 것을 나타내는 각종 증거를 인멸했기 때문에 주변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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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여덟 살이던 1448년(세종300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그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인 1453년(단종1) 10월 10일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결과 단종은 모든 실권을 숙부에게 빼앗겼다. 또한 숙부의 강권에 못 이겨 3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1454년 1월에 혼인했다...단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금성대군의 개인집으로 옮겼다. 단종의 거처에는 삼군진무 두 명이 군사 열 명을 거느리고 주야로 경계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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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 6월 21일...송현수와 권완이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는 주장이 김정수라는 사람에 의해 발설된 것...이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상황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가게 되었다...세조는 단종에게 이해 10월24일에 사약을 내렸는데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도 한다. 죽었을 때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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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양대군의 핵심 참모 한명회는 쿠데타에 대비해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의 명부를 기록한 책, 즉 살생부를 작성해 두었다고 한다. 이날 한명회는 지옥의 염라대왕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입궐하는 대신들은 한명회의 손짓에 따라 생사가 갈렸다. 한명회가 죽이라는 신호를 보낸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다.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살부에 올라 있던 의정부 대신들이 그렇게 이승을 하직했다. 반대로 정인지, 신숙주, 김필 등 생부에 올라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대립 관계에 있던 의정부 대신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판이병조겸내외병마도통사’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받았다. 이는 의정부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이 되고, 동시에 문신과 무신의 인사 부서인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며 아울러 내외의 군사들을 통솔하는 내외병마도통사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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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 사건...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의 처나 딸들은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어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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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부는 금성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보복 당했다. 세조는 순흥부를 반역의 고을이라 하여 풍기군에 붙이고 혁파해 버렸다. 순흥부의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 사형에 처해졌다. 일반 백성들 중에서도 금성대군에게 동조했다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같은 보복으로 경상도 선비들은 조선 시대 내내 세조에게 이를 갈았다고 한다. 순흥부는 숙종 때까지 쑥밭으로 남아 있다가 단종이 복위되면서 복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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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종친 구성군 이준을 유배에 처했다. 이는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전철이 되풀이될까 우려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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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대에만 다섯 번에 걸쳐 공신이 책봉되었다. 세조는 점차 공신 세력에게 둘러싸이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커져만 가는 공신 세력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세조는 자신을 지지해 줄 젊은 인재들이 절실했다. 강성해지는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그랬다. 세조는 공신 세력과 관계없는 시골 출신의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 중앙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이들의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연산군 대 이후 공신들과 일대 혈전을 벌인 것이 이른바 사화이다. 그러나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 세력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팽창시켜 나가다가 결국 선조 대에 이르러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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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을 위시한 사림파는 무오사화 때 혹심한 화를 당했다. 이때 사화의 빌미가 된 것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은 의제를 죽인 항우의 중국 고사를 인용해 세조를 항우에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다. 이 글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그의 글들은 압수, 소각되는 화를 당했다.
연산군은 양반 관료 세력과 이들이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고안한 갖가지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양반 관료들에게 왕의 가마를 메는 하찮은 일을 시킴으로써 왕의 절대성과 양반들의 종속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여기에 반항하는 관료들은 불충으로 몰아 처벌했다. 양반 관료제를 떠받치던 이념과 제도들도 모두 무시해 그들의 이념적 지주인 종묘를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젊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성균관에서는 술을 마시고 잔치를 열었다. 왕의 잘못은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던 사간원은 아예 혁파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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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들의 위훈을 깎아내린 사건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마침 큰 지진이 일어나 임금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자 남곤과 심정 등이 몰래 고려 말에 행하던 <목자장군검 주초대부편>이라는 참서를 이용, 후원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어 마치 글자의 모양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처럼 했다. 대개 ‘주초走肖’는 조(趙)자를 파자한 것이다. 이는 곧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궁인을 시켜 그 잎을 따서 임금에게 바치게 했다. 또 홍경주의 딸 희빈을 시켜 일국의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 돌아간다고 밤낮으로 임금께 고자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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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중종15) 원자 호(인종)는 적자로서 중종의 기대와 백관의 경하를 한몸에 받으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1534년(중종 29) 제2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명종)을 낳음으로써 예기치 않았던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이 투쟁은 세자의 외숙 윤임과 경원대군의 모후 문정왕후와 외숙인 윤원로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전개된 두 척신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는 조정 전반에 확산되어 전자를 지지하는 세력인 대윤과 후자를 지지하는 세력인 소윤으로 각립하게 되었다...투쟁방향은 역시 세자 자리를 탈취하려는 소윤의 도전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윤의 응전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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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조참의였던 윤원형은 소윤이라고 불리던 자신의 일파가 이들에게 자꾸 쫓기는 듯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 자신을 위협하는 자가 제거 대상 무순위였다.
이에 윤원형은 이기, 정순봉, 허자, 임백령, 최보한 등과 모의해 윤임 등 대윤 일파를 몰아내기로 작정했다. - 316
이기는 실로 모호한 죄목을 들면서 말문을 열었다.
형조판서 윤임이 중종 때부터 딴 생각을 품고 있다가 이제 와서는 스스로 불안스러운 마음을 가졌으며(不自安之心), 좌상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도 또한 그와 같은 형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 <명종실록> 권1, 명종 즉위년 8월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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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윤임, 유관, 유인숙은 사사하고 권벌은 체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가해자들은 성종 대 좌리공신의 예에 따라 공신책록을 서둘렀다. 29일에는 궁중에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위 세 명에게 사약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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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년 가을에 벌어진 사화, 즉 을사사화
9월 18일 양재역에서 한 벽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 붉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씌어 있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아래에서는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 이는 나라가 망할 징조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요. - <<연려실기술>> 권10, <명종 조 고사본말>, 정미벽서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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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근래에 옳지 못한 여론이 나돌고 있으니, 죄인들이 허위자백을 했다 하며 공신들을 가리켜 아무런 공도 없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론邪論이 일어나는 것은 당초에 역류(윤임 일파)를 가볍게 다스려서 화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연려실기술>> 권10, <명종 조 고사본말>, 정미벽서지옥
이에 송인수와 이약해를 죽이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이담, 권벌, 송희규, 백인걸, 김난상, 유희춘, 이홍남 등 수 십 명을 유배했다...이들은 물론 벽서의 범인이 아니었으나 평소에 불온한 기색을 보였다 해서 추방되었다. 그 밖에도 벽서 사건을 계기로 관직이 삭탈되거나 추방된 사람은 수십 명에 이르렀고 봉성군도 울진에서 살해되었다.
그 뒤 1549년(명종4) 4월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정미사화)으로 사사된 이약빙의 아들 홍남이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영월에 귀양가 있던 중 그 아우 홍윤을 역모로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홍윤은 윤임의 사위였다. 그는 충주에 있으면서 그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원통히 여겨 종종 분개하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홍윤과 홍남은 평소 형제간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홍남은 홍윤이 주상을 연산군에 비유해 비방하고 충주 거주인을 규합해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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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홍윤과 그 관계자들을 잡아들여 “아무개, 아무개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거사할 것을 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은 주로 충주에 살던 이약빙의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피해 범위가 워낙 넓어서 한 면(面)이 거의 텅 비게 될 정도였다. 또 그중에는 홍윤의 얼굴조차 모르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사화, 기축옥사
갑신년 이후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벼슬자리에 서지 못한 울분에 쌓여 있던 서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기화로 다시 한 번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시 서인의 실세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이 사건의 조사관이 되면서부터 역옥은 더욱 가혹하게 다스려졌다. 그는 역모와 직접적 관련이 없어도 정여립과의 친분 관계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많은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연루시켜 처벌했다. 이발과 이길 형제, 백유야,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김빙 등이 그렇게 처벌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다. 김빙은 정려비의 시체를 찢을 때 바람이 차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닦다가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죽었다. 또 <배절의론>을 지은 정개청은 주자가 논한 것을 읽고 동한 시대의 절의의 폐를 밝혔을 뿐인데도 그것이 군주에 대한 절의를 경시한 것으로 몰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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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진위도 살펴보지 않고 앞질러 탄핵부터 했던 옥사는 한번 지목당하면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고 감히 그 원통함을 밝힐 수가 없었다. 결국 서인은 정여립의 모역을 기화로 정계에서 동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철은 평소 사감이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이 사건으로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축옥사는 그야말로 또 하나의 사화였다.
영창대군을 화의 근본이라 여기며 항상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이이첨...
너는 곧 사형될 것인데 그렇게 죽느니 차라리 내 말을 따라 소를 올려 반역을 고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같이 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정훈에도 기록될 것이다. - <<연려실기술>> 권20,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박응서지옥
이 말에 귀가 솔깃했던 박응서는 이이첨이 시키는 대로 허위 자백을 했다.
우리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닙니다. 국구 김제남과 몰래 통해 양식과 무기를 준비해서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받들려고 도모한 것입니다. - <<연려실기술>> 권20,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박응서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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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남은 서소문 밖에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그가 사약을 받을 즈음 이미 서인으로 강등된 영창대군은 어리긴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인목대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광해군은 억센 여자 열 사람을 대비의 처소로 보내 영창대군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강화도로 보내 버렸다. 대비는 맨발로 대청에서 뛰어내려 와 뒤쫓아 갔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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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은 이이첨의 특명을 받아 강화부사로 부임한 정항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정항은 처음에는 영창대군을 굶기는 것으로 핍박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방에 가두어 놓고서 아궁이에 불을 많이 지펴 데어 죽게 했다. 그때 겨우 아홉 살밖에 안된 영창대군은 펄펄 끓는 방바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며칠을 밖에 다 대고 ‘어머니’를 외치다가 지쳐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법도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다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강빈을 포함한 그 일족들을 흔단이 있기 전에 미리 조처해야 한다는 왕의 입장은 소현세자가 죽던 바로 그해(1645년) 8월에 처음으로 표출되었다.
국본이 이미 정해졌지만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저 여러 강씨들이 모두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니, 그들을 먼 데로 이주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 8월 갑진
...인조는 흔단이 생기기 전에 선처하는 것이라는 명목으로 강빈의 형제 네 명을 귀양보냈다...인조에게 올린 전복 구이에 독약이 들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인조는 강빈을 지목해 강빈의 나인 다섯 명과 음식을 만든 세 명의 나인을 잡아 국문했다. 그러나 실상 인조가 그 이전부터 이미 궁중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했기 때문에 왕래가 끊긴 지 오래였다. 음식에 독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인조와 조소용의 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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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강빈의 형제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곤장을 맞아 죽었으며, 3월15일에는 강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아울러 강빈의 친정은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듬해 3월 목호룡은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했다. 그는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조카 이희지(이사명의 아들), 사위 이천기, 김춘택의 종제 용택 등이 환관과 궁녀들과 결탁해 이른바 삼급수로 왕을 죽이려 했다고 고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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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의 주동자는 김용택, 이천기, 이기지, 김성행, 백망 등은 모두 심한 고문에도 승복하지 않고 죽었다. 그들의 죽은 시신에 참수형을 가했다....목호룡의 고변으로 관련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처벌을 받았다. 김일경 등은 이 옥사를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의 문제로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노론이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고 한 것도 평지수의 방법으로 경종을 폐출하려 한 것에 결부시켰다. 노론 4대시는 이제 역모의 4흉으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이미 위리안치되어 있던 노론 4대신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이 밖에도 60여 명의 노론계 인사들이 살육되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유배되었다. 노론이 정권을 잡은 후 최대의 참변이었다. 소론은 왕의 의도에 거슬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이 당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보복을 가했다.
신축년과 임인년에 걸쳐 계속되었던 이 신임옥사
1728년(영조4) 3월에 발생한 무신란은 영조와 노론에 대한 반감을 폭력적인 수단으로 표출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반란의 주체는 소론의 급진 세력과 일부 남인 세력이었다. 반란의 목적은 영조를 제거하고 노론정권을 타도한 다음, 소론과 남인의 연합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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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시 노론과 소론의 갈등, 노론 내의 비외척 세력과 외척 세력의 갈등, 영조와 세자와의 갈등이 세 축을 이루며 일어났던 일이었다. 노론과 영조가 한편이 되어 소론과 세자를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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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의 끝은 당쟁의 시작으로 이어져 권력과 부를 차지하기 위한 지배층의 투쟁이 그칠 새가 없었다...승리자는 벌열 또는 세록지가世祿之家의 이름으로 특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패배자는 정치적인 기능을 박탈당한 채 몰락을 거듭해 선비로서의 마지막 밑천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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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손 시절부터 홍인한, 정인겸 등의 외척 세력에 대한 폐단을 공히 인식한 정조와 홍국영은 즉위하자마자 숙청의 칼을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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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자신을 모해하려 했고, 아버지를 전대미문의 사형 방법으로 죽게 한 간당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즉위한 바로 그달 3월에 정후겸을 경원으로 유배보내고 4월에는 홍인한을 여산으로 유배보냈다. 또 그들의 친척 관계에 있는 인물들로서 부홍파의 핵심 세력이었던 윤태연, 홍상간, 홍지해, 이선해 등을 역당이란 죄목에 처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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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나의 외척 세력인 경주 김씨 김대비 세력에게도 철퇴를 내렸다. 정조는 9월 김씨 세력의 대표 격인 정순왕후의 동생 김구주를 혜경궁의 병이 심한데도 문안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면적 빌미로 삼아 흑산도에 정배했다.
이로써 정조는 영조 대 후반기부터 조정의 가장 큰 대립 세력이었던 두 외척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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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전군 추대 사건...홍계희의 팔촌인 홍계능은 그의 아들 홍신해와 조카 홍이해와 함께 ‘금상은 국정을 잘못한 것이 많다. 추대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인조반정 때의 일을 들먹이며 나섰다. 이 일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인 홍낙임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정조를 살해한 후 은전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그 역시 발각되고 말았다.
정조는 관련자 은전군을 자진시키고 사건 주동자 23명을 사형시키는 등 강력히 대응했다.
철종이 1863년(철종14) 12월8일 후사 없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두 척족이 대립하게 되었다...당시 왕위 계승의 지명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는 그동안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 세력을 누르기 위해 장헌세자의 증손 흥선군 이하응과 제휴애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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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한국사신론> 가운데
태종(1400~1418)은 부왕 태조와 개국공신들에 의하여 세자로 책립된 동생 방석과 그의 스승인 정도전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집중시키었고, 나아가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그 권한을 축소시키고, 정치의 실무를 대폭 5조에 맡기어 6조직계제를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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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첫 사화는 연산군 4년(1498(에 있은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를 특히 사화(史禍)라고 적는 것은 그것이 사초(史草)에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김종직이 단종을 항우에에게 죽음을 당한 의제에 비기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 [조의제문]이었다. 연산군 초에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한 사국(史局)을 열었을 때 위의 사초가 발견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을 충동시켜 김일손 등의 사림 학자를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었다. 이 결과로 사림들의 세력은 크게 꺾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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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에 취해서 그로 인하여 재정의 낭비가 많았다. 연산군은 재정이 곤란하게 되자 훈구공신들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고까지 하였다. 훈구세력이 연산군의 이러한 행동을 억제하려고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연산군은 그들의 간섭을 억압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때 궁중과 깊은 인연을 가진 무리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출사사사건을 들추어서 그를 충동하여 가지고, 훈구 및 사림의 잔존 세력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었다. 이것이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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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세력의 반발은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공신 중에서 실제로 공이 없이 공신으로 책봉된 76명의 훈(勳)을 깎은 것이었다. 이에 분격한 훈구세력은 모략으로 중종을 움직여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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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배다른 두 아들의 왕위 계승을 에워싼 싸움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을사사화였다. 인종과 명종의 왕위계승 문제는 그들 외척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이 양자에는 당시의 양반관리들이 또한 부화(附和)하여 파를 이루었다. 인종이 먼저 즉위하였다가 곧 돌아간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그의 외척세력이 반대파를 처치한 것이 곧 명종 즉위년(1545)의 을사사화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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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은 훈구세력을 대신하여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도 강평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고, 이 대립이 드디어는 붕당을 낳게 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명종비의 동생인 심의겸을 김효원 중심의 신진기예한 사림들이 척신(戚臣)으로 몰아 배척하였다. 그런데 심의겸은 평소 사림을 옹호하여 왔으므로, 그의 후원을 받은 사람들은 김효원을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보고 심의겸을 두둔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두 파의 대립이 전랑(銓郞) 임명을 에워싼 대립으로 표면화하여, 김효원 등 신진관료는 동인,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기성관료는 서인이라 하여 동․서의 분당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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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이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자연히 서원이 붕당의 근거지가 되는 경향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같은 서원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동문계를 조직하여 그들의 우의와 결속을 다지는 현상도 이런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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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중에는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리어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기었다...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하여진 북인이 광해군(1608~1623)을 추대하였기 때문에 광해군 일대는 북인이 정권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북인에게 눌려 있던 서인은 광해군을 죄로 몰아 폐하고 인조를 옹립하였다(인조반정,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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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특히 노론을 중심으로 한 장기 집권 가문 즉 벌열(閥閱)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사림세력이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권력투쟁을 벌인 끝에, 드디어는 노론이 소수 가문에 의하여 정권이 독차지되는 벌열정치로 굳어져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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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돌아가고 순조(1800~1834)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세력은 왕권을 완전히 압도하고, 소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즉, 순조 초에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왕비의 아버지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이씨의 왕조라고는 하지만, 종실이라 하더라도 김씨의 세력에 눌려서 살아야 했다. 종실 중에서 김씨를 공격하다가 유배를 당하거나 혹은 모반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한 일 등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여 준다. 하물며, 다른 양반 가문의 세력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안동 김씨에 적대하는 어떠한 세력도 용납되지가 않았다. 이에 따라 과거가 더욱 문란해져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정치는 양반들 전체 혹은 노론들 전체의 공존이나 혹은 그들 상호간의 투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개 척족의 농단에 의해서 좌우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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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관료들이 국가의 지배를 둘러싸고 국왕과 투쟁하고 권력의 중심을 자신들로 옮기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발전시키는 대신, 소당파 집단을 조직하고 국왕의 호의를 획득할 목적으로 서로 다툰 것이다. 그리고 이를 획득하면 반대 당파를 없애기 위하여 국왕의 호의를 최대한 이용하려 하였다.
- 제임스 팔레,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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