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사회가 분화되고
지배계급의 지배기구로서의 국가가 형성되면서 궁궐이라는 것도 생겨나고
그 궁궐 짓느라 민중들은 졸라 쌔빠지고...
왕의 거처인 궁궐은 지배자의 정치적 권위를 외적으로 보여주면서 민과 지배자를 격절(隔絶)시키는 기능을 한다.
- 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가운데
(중국) 양저良渚문화 반산反山․요산瑤山 유적의 제단과 대형 봉토분을 가진 귀족은 마땅히 거대한 권력, 즉 정치(대량의 노동력을 능히 동원할 수 있는), 경제(대량의 재부를 수탈), 군사(대묘에 다량의 옥월鈺鉞 부장), 종교적 권력을 장악함과 아울러 엄격한 조직의 통치집단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사는 곳에는 이미 궁전, 종묘 등의 건축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미 발굴된 1천여 기의 무덤은 대, 중, 소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대묘는 단지 1% 남짓에 불과하고, 중등묘가 12%, 소묘가 87% 가량의 비중을 점하고 있다. 이러한 등급은 확실한 피라미드식 구조로 당시 사회 계급분화를 여실히 나타내주고 있다.
- 신희권, '도성都城의 출현과 백제百濟의 형성', 한국고고학회, <국가 형성의 고고학> 가운데
겨울 10월에 왕이 궁실을 늘여 지었는데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괴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자주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제17 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烽上王)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조선 초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켰는데 궁궐역宮闕役이니 산릉역山陵役이니 축성역築城役이니 대규모 토목사업이 거의 조선 각지에서 일제히 수행되었고 이것은 일반농민의 강제 징발에 의한 것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태조 4년(1395)에는 경기도 정부丁夫 9,500명, 충청도 정부 5,500명을 징발하여 궁궐의 영조에 사역하고, 태조 7년(1398)에는 경기 좌도左道 및 충청도 민정 3,700명으로써 궁성을 수축하였으며, 태종 2년(1402)으로부터 태종 5년(1405)에 이르기까지 경기도․충청도․강원도 민정民丁을 징발하여 태상전太上殿의 영조에 사역하였다.
- 전석담, 박극채 외, <조선경제사탐구> 가운데
경복궁 홈페이지에서 http://www.royalpalace.go.kr
대원군의 기본 목표는 전통 방식에 의하여 노인들의 불만에 대한 외면 요인(관리들의 부패, 부당한 세금 수탈, 관청의 환곡을 통한 고리대업)을 제거하고 국왕의 권력과 위세를 증대시키며 전통 질서를 파괴하는 이단 교의를 없애고 군사력을 구축함으로써 국가와 왕조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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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소생을 위해서는 권위를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도 필요했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왕조는 엄청난 경비를 필요로 하는 거대한 토목 공사계획을 통하여 이것을 마련하였다. 이 축조에는 궁전을 새로 건립하는 것뿐 아니라 정부의 건물을 수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왕조의 운명을 성공적으로 부흥시키는 유형의 근거를 만들려는 희망에 고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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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복궁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가 자리잡았고, 그 후 1590년대에 히데요시의 침입 중 불타버렸으나 결코 복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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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비와 대원군 그리고 고위관리들은 대부분은 경복궁의 중건을 분명한 왕조의 “중흥(中興)” 사업이라고 보았다. 관리들 중 어느 누구도 이 계획에 대하여 내놓고 직접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재정 및 국고 문제를 걱정하였다. 이들은 국고가 비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조세와 요역의 무거운 부담을 견디어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들은 백성에 대한 압력을 최소한도로 제한해야 하며 국왕도 절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백성들 모두가 그 생각을 반겨하고 있으며 “마치 아이들이 (부모를 도우러) 오는 것처럼” 일하러 올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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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수백 명을 단위로 조직되어 깃발과 장식을 갖고 행진하면서 일하러 갔다. 연예대들이 일꾼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또한 일꾼들을 위해 건축 장소의 가까이에 집을 마련하였다. 노동자들은 일삯을 받았으며 건축 첫날 대략 3만 명 가량의 백성들이 건축을 위해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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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 명령을 내린 처음 며칠 후 의정부는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요역 동원을 제한하고 국가의 모든 이들이 신분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이 계획에 기부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경우, 강제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이들에 대하여 관직이나 관계를 하사하자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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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20세기 초기에 이를 기술한 이능화(李能和)는 자금의 획득이 의정부의 발의를 훨씬 넘어섰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차사(差使)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것 같으며 마음 내키지 않는 기부자에게 정책적으로 이를 강요했다고 믿어진다. 호구의 호주는 불려나가 자신들의 재부와 재산의 일정 비율을 자진하여 납부하도록 협박받았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강요로 말미암아 자살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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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에는 토지 1결에 대하여 100문(文)의 부과세賦課稅(결두전結頭錢)을 징수하여 추가로 200만 냥의 세입을 만들어 냈다. 원납과 더불어 관직이나 관계의 판매도 계속되었다. 목재를 조달하기 위하여 각별한 방법도 사용하였다. 양반이나 평민이나 보유할 수 있는 묘역(墓域)의 규모에 제한을 가했던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묘역에서 벗어난 구릉의 나무를 보다 많이 채벌 했다.
- 제임스 팔레,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가운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대표적 사업이 경복궁 중건이다...“본채 없이 곁방살이를 하다니 나라와 임금의 체면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 경복궁 중건에 대한 대원군의 명분이었다...대원군은 백성들에게 노동력과 재력 제공을 호소했다. 재화를 자진 납부하는 자에게는 벼슬과 포상을 내리는 원납전이 생겼다. 종친들이 수만 냥의 기부금을 내고, 왕이 내탕금 10만 냥을 하사해 솔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
그러나 착공할 때와 달리 경비의 염출이 어려웠다. 말이 자진해서 내는 원납전이지 이제는 원성이 자자한 원납전이다. 경비가 모자라니 농민들에게 한 결당 1백 문을 내는 결두전을 부과했다. 또한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에게도 문세를 받았다. 일종의 통행세였다. 당백전도 주조했다. 당백전은 종래 사용하던 상평통보, 즉 엽전의 1백 배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약 6개월간 1,600만 냥에 달하는 액수를 주조했으나 실질 가치는 20분의 1도 못 되었다. 당백전 발행은 물가고를 부추켜 국민 생활을 압박했다.
그래도 공사는 지속되었다. 마침내 착공한 지 2년 만인 1868년(고종5) 7월에 경복궁이 중건되었다...재건된 경복궁은 조선 초기의 경복궁(390여 칸)보다 근 20에 가까운 크기(7천여 칸)였다....재건된 경복궁은 이처럼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와 백성들의 고단한 노역으로 완공되었다.
- 이성무, <조선왕조사> 가운데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 불탄 이후 국가의 재정이 곤궁하여서 이를 재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재정상태의 곤궁을 무릅쓰고 고종2년(1865) 그 재건에 착수하여 고종4년(1867)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농민에게 1결에 1백문文의 결두전이라는 특별세를 부과하였고, 도성문을 통과하는 물품에서 문세를 징수하기까지 하였다. 또, 원납전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금전을 바치게 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이 공사를 위하여 징발되었으므로 그들의 원망을 또한 면할 길이 없었다. 당백전이라는 악화를 주조하여 경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근정전․경회루․광화문 등의 건물을 포함하는 굉장한 규모를 가진 경복궁이 재건되었다.
- 이기백, <한국사신론> 가운데
경기지역에서는 경복궁 중건사업에 동원되는 부역이 큰 고통이었다. 특히 빈민들은 원납전만을 내고 부역에 동원되지 않는 부호와는 달리 원납전을 내고도 다시 부역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당하였다. 특히 중건사업에 필요한 기술인력이 모자라자 강제적으로 승려僧侶 중에 공수匠手들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으며, 나아가 자금부족이 심화되자 민간인 공장工匠도 강제 동원되었다. 실제 경기도 양주의 공장工匠 윤성선은 정부의 공장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 개인일을 계속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무거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 고동환, '대원군집권기 농민층 동향과 농민항쟁의 전개',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가운데
(중국) 진시황 35년(기원전212) ‘함양에 인구는 많은데 선왕의 궁전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진시황은 함양성을 대규모로 재건하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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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방에 전전前殿을 만들었는데 동서로 500보, 남북으로 50장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사방으로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부터 남산까지 곧장 이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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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이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다시 명명하려고 했으나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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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자 했다...황권의 천하에서 견줄 자가 없는 당당한 기세, 천하를 군림하는 위엄, 황실의 존귀함을 구현하는 것이 진시황을 포함한 역대 제왕이 궁궐을 재건한 주요 취지였다. - 831
궁실과 능묘를 재건하기 위해 진시황은 ‘궁형과 유배형을 받은 70여만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거나 여산에 능묘를 짓게 했다. 북산에서 석재를 채취하고 촉과 형 땅에서 목재를 운반해 관중까지 옮겼으며, 3만 가구를 여읍으로 이주시키고 5만 가구를 운양으로 이주시켜 모두 10년간 요역을 살지 않도록 면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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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과 궁실, 원유를 전무후무하게 대규모로 축조한 것은 백성의 노동력과 재산만 빼앗았을 뿐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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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아방, 아방이 진시황을 죽이리라”라는 민요도 있었다. 당시의 통치를 질책하는 풍자의 말
- 장펀톈, <진시황 평전> 가운데
(중국) 쒜이제국이 이룩한 것 가운데 동도東都의 건설과 대운하의 개통을 두 가지 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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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05년 동도 뤄양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건설공사를 진행하는 데 수천에서 수만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일 년 가량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뤄양성의 한가운데는 궁성이 있었고 궁성의 바깥은 황성으로 문무백관들의 관사가 위치하였다. 가장 바깥에는 와곽성이 있었는데 이곳은 관리들의 주택지역 및 백성들의 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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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도를 건설하고 대운하를 개통하는 과저에서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혹사당해서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다. 용지취를 팔 때에는 남자들이 모자라서 여자들까지도 노역에 징발되었다.
- 윤내현, <중국사 1>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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