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국가간 서열, 위계

순돌이 아빠^.^ 2013. 4. 8. 10:10

한 국가 안에서 개인이나 무리 사이에서 서열이 있듯이, 국가간에도 서열이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됨

A 국가의 지배계급이 B 국가의 지배계급을 지배하는 꼴.

A의 지배계급과 B의 지배계급은 서로 다투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고.




마한, 진한, 변한연맹체는 바로 국연맹체이다. 연맹체가 형성되면서 연맹체 구성국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강한 국이 연맹체를 대표하는 맹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연맹체 초기에는 맹주국의 지위가 공고하지 않아 힘을 행사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힘의 한계는 맹주의 지위가 세습되지 못하고 힘의 우열에 따라 교립交立되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마한의 경우, 목지국의 진왕이 맹주였지만 진왕은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그 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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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변 세력들을 정복하고 흡수하게 됨으로써 맹주국의 영역은 넓어지고 왕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다. 그에 따라 이전에 행해졌던 연맹장의 교립은 끝이 나고 왕위는 세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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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수장들이나 지역 연맹장들은 차츰 독자적인 수장이 지위를 상실하고 중앙의 지배세력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들의 정치적 지위는 이제 자신의 족적 기반이 아닌, 왕권과 연결된 고리가 강한가, 약한가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의 세력근거지를 떠나 중앙으로 옮겨와서 중앙의 지배체제 안에 편제되었다.

- 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가운데



11세기 고려의 경우 요나라에 조공해 책봉을 받는 한편, 탐라국(제주도)이나 여진족에 스스로 조공을 요구하는 등 일종의 소제국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위계질서에서 고려는 요나라나 그 뒤의 금나라, 원나라와 같은 ‘정상’, ‘강대국’의 위치를 점하지 못했지만 주변 약자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등 ‘중간 강자’의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다.

- 박노자, <거꾸로 보는 세계사> 가운데



고려...원종은 국내에 있어서의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세자(뒤의 충렬)의 원 공주와의 혼인을 청하였다. 이 요청은 세조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용납되었다. 이리하여 충렬왕이 세조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이후 역대의 국왕은 원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고, 그 몸에서 난 아들이 원칙적으로 왕이 되었다. 말하자면 고려는 원의 부마국(鮒馬國) 즉 사위나라가 된 셈이다. 이후 역대의 국왕은 세자로 있을 때에는 독로화禿魯花(질자質子)로서 북경에 머물러 있다가 즉위하는 것이 하나의 통례가 되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자주 북경에 드나들며 개경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이러는 동안 국왕은 몽고식 성명을 갖게 되고, 몽고식으로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리는 변발(辮髮)을 하고, 몽고식 의복을 입고, 또 몽고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와 원의 왕실은 한 집안과 같은 관계에 놓인 것이다...때로는 고려의 귀족들 중에서 원과 결탁하여 국왕을 모략으로 축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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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인 요구도 오랜 동안의 전란으로 황폐된 고려를 괴롭혔다. 원은 여러 명목을 붙여서 고려에 대하여 금․음․포백布帛․곡물․인삼․해동청海東靑(매) 등을 요구하였다. 심지어 처녀․환관(宦官) 등까지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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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원으로부터의 요구는 결국 농민들의 부담이 되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고려와 원에 대한 이중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농민이 유민이 되어 각지로 흘러 다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가운데서 고려의 지배층은 막대한 사유지인 농장을 소유하여 유민들을 모아다가 이를 경작케 하였다. 원은 점차로 무력한 왕실보다는 이 재부의 소유자인 지배층 귀족을 더 미덥게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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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원의 연락기관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철폐하고, 기철奇轍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하고, 옛 관계를 복구시켰으며, 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그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후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동령부東寧府(흥경興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원정치는 원과 친원파의 반발을 사서 김용 등이 공민왕을 해하려는 흥왕사의 난이 있었고(공민왕 12년, 1363), 원은 일방적으로 공민왕을 폐한다고 선언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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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과의 외교관계를 ‘사대(事大)’라 하여 친선을 유지하기에 노력하였다. 고려의 권문세족과의 투쟁과정에서 태조 이성계가 내세웠던 친명정책이 건국 뒤에는 조선왕조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하게 된 것이다.
- 이기백, <한국사 신론> 가운데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데라우치가 이완용을 앞세워 8월22일 마침내 한일합병조약을 조인했다. 전문 8개조의 제1조에서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군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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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0월1일. 면장이 지시하기를 이제부터는 가가호호 태양기(일장기)를 세우라고 한다.
1910년 10월30일. 일본인들이 면내에 와서 세금을 독촉하고 있다. - <저상일월>

- 이성무, <조선왕조사> 가운데



이성계는 1392년 4월에 등극하자마자 7월에 지밀직사사至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명의 양해를 구하였으며, 8월에는 지밀직사사 조림趙琳을 특파하여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중국에 대한 고려왕의 공식 명칭)에 취임할 뜻을 진언하고 윤허를 청했다...이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즉 강대한 명의 압박․간섭을 방지하는 소극적 의미 이외에도 적극적으로는 조선의 지배세력이 조선관부의 신흥 명세력에 대한 재보험적 관계라는 의미다. 이것은 물론 상호보험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조선의 봉건적 지배층은 그 배후에 강대한 우위後衛를 준비함으로써 무기력한 무력장치와 조루한 관료조직으로 500년간의 지배를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대청代淸 관계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봉건적 지배층과 대륙의 봉건적 지배세력의 동맹...조선 초기에 대량의  소와 말의 헌상이 명나라에 상납된 것은 이러한 관계의 현실적 표현이다.



조선봉건지배층의 상호보험관계가 농민의 수탈을 전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대한 재보험관계도 농민의 고혈 흡수를 전제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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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봉건지배층의 각종 수탈-전조, 공물, 부역, 잡부, 사적 지주에 대한 각종 형태의 지대, 공사 채무-을 한 몸에 걸머지고 빈사 신음하는 파리한 육체에, 머나먼 수천 리 밖으로부터 약탈의 손이 뻗쳐온 것이었다.


- 전석담, 박극채 외, <조선경제사탐구> 가운데



유럽 국가들 안에서도 특히 19세기 오토만 제국의 해체와 함께 등장한 국가들이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창설되거나 재건된 국가들에 대해서는 국가들 간의 힘의 비대칭성을 반영하는 강제와 부과가 횡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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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자발적으로 한에 대한 신속과 조공관계를 선택함으로써 정벌을 면했다. 반면에 한반도 북부의 위만조선은 한 제국에 순순히 신속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군사적 정복과 직접통치의 대상으로 되었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