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의 정치투쟁 이면에는 귀족들의 땅 따먹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산수단인 땅을 더 많이 차지함으로써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쥐게 되고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쥠으로써 더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고...
공양왕 3년(1391)에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이에 의하면 과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관료들에게 그 관직의 고하에 따라 분배하게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의 일파가 다대한 과전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경기도 이외의 전국의 토지는 모두 공전(公田)으로 편입시켰고, 이를 위하여 농장은 몰수되었다. 이리하여 권문세족의 경제적 토대는 무너지게 되었고, 이것은 곧 그들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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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세력에 속하는 양반관리들은 많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우선 과전을 받은 데다가 또 허다한 공신전을 받았다. 태조의 건국, 태종의 계위,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와 같은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공신전의 급여는 증가하여 갔다. 이에 더하여 국왕이 특별한 명목을 붙여서 급여하는 별사전(別賜田)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결국 모두 세습되었다. 그러고도 양반관리들은 또 매입․겸병․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시켰다. 그들은 특히 비옥한 삼남(三南) 지방의 넓은 공전에 착목하여 이를 침식하여 갔던 것이다. 직전법조차 폐지되고 말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 갔으며, 또 이렇게 해서 확대된 농장이 그들의 생활 근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 이기백, <한국사신론> 가운데
州郡과 산천을 경계로 하는 대토지사유가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한 뙈기의 땅을 에워싸고 온갖 잡배가 쟁탈전을 전개하여 그 소유자가 5,6인을 넘고 1년에 8,9차례나 지대를 징수한 것이다. 일반농민에 대한 사적 지주들의 수취가 얼마나 무궤도적이고 가혹했는가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고려조 붕괴과정에 있어서의 정치적․사회적 파란과 동요는 토지지배관계의 문란한 분열을 토대로 하여 조장된 것이고, 토지소유자와 농민층의 대립 격화, 수취의 분배를 둘러싼 각 토지소유자의 상호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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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제개혁은 토지지배관계의 질적 비약 내지 전환을 초래한 것이 아니고 고려조의 그것과 같은 생산관계를 재구성한 것이었다. 조선 왕권은 본질적으로는 고려조 이래의 중소지주층을 구성요소로 하여 피라밋의 정점이었다. 따라서 조선 정권이 담당할 수 있었고 또한 주요한 역사적 사명은 봉건적 토지소유자층의 상호반발을 조정하여 통일적인 상호보험적인 관계를 결성하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또한 봉건적 지배층에 의한 농민수탈의 합리화를 동반하는 것이나 이것은 부차적 효과에 지나지 않고, 고려말 이래 급격하고 광범하게 진전한 토지 소유 내지 점유의 불균등은 시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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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와 평안도에 있어서도 豪强者는 토지를 다점하고 빈궁자는 한 뼘의 땅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성종 8년(1477)에 이르기까지 아직 貢法을 시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토지점유의 불균등이 조선 성립 이후 급속히 발전한 것이 아니고 고려조 이래의 상태를 그대로 계승한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른바 ‘인민의 怨咨’란 일반농민의 그것이 아니고 토지를 다점하고 조세를 불납하는 호강자의 怨咨니, 이러한 사적 지주층의 반대로 말미암아 조세지대를 징수하지 못한 것은 조선에 의한 전제개혁의 한계성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세조대의 이시애난은 집권적 세력의 침투에 대한 토착지주들의 반격이었다. 우리는 집권봉건적 지배체제의 상호보험관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또한 봉건적 지주층의 상호반발관계를 경시할 수 없을 것이다. 봉건관료, 지주층과 농민의 기본적인 대립관계, 봉건적 지배층의 상호보험과 상호반발, 이것이 조선봉건사회의 내용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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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8년(1436) 강원도에서의 토지점유상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大 戶 50결 이상 10호
中 戶 20결 이상 71호
小 戶 10결 이상 1,641호
殘 戶 6결 이상 2,042호
殘殘戶 5결 이하 7,773호
토지점유를 기준으로 한 강원도의 민호 구성은 첨예한 피라밋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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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畿內에 집중하여 상호견제케 함으로써 사전에 의한 공전 점식을 방지하려 한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조직의 정비․확대에 따라 科田은 나날이 증가하고 정국의 동향에 의해 功臣田․別賜田은 연이어 재생산되었다. 이를 태종 2년(1402)의 통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경기도 총전결수 149,300결
功臣田 31,240결
科田 84,100결
합계 115,340결
여기에 寺田 4,680결이 있었으며 별사전은 계상되지 않았으니 경기내에는 사전으로써 거의 전부가 차지된 셈이다. 이리하여 태종 17년(1417)에 이르러서는 과전의 3분의 1을 충청․전라․경상 3도에 이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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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에 속하는 비교적 하급관료는 지방장관의 요직을 차지할 때에 국가의 수조권의 대행자로서 나타난다. 그들은 국가의 일정한 규례規例에 의해 농민으로부터 지대=조세를 수납하고, 관리로서 국가로부터 일정한 보수를 받는 것을 직분으로 하였던 것이다. 또 중앙정권의 고관대작은 녹봉 대신에 토지를 분여받아(소유권은 국가에 유보된 채) 녹봉을 현물 조세의 형태로 직접 농민으로부터 조달케 하였으니, 이 수전제도授田制度가 역시 관료에 의한 수조권의 대행이라는 미명하에 농민의 무제한적 착취의 가능성을 보장한 것은 물론이다. 녹봉에 대신하는 수전의 유무를 불문하고 국가관료들은 사실상 지주의 연합체로서 국가기구를 이용하여 농민의 모든 잉여생산을 흡수하는 데 공동의 이익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있어서 토지국유는 특권관료에 의한 농민착취의 공동수단의 별칭에 불과하다. 따라서 토지의 국유는 곧 토지의 귀족 공유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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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러한 賜田制는 토지의 국유가 결코 농민 본위의 제도가 아니고, 특권적 신․구 귀족에 의한 토지의 공동소유를 선언한 것에 지나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만약 농민 본위의 토지국유였다면 정책의 중심은 농민에게 경작 토지를 평등히 분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제는, 농민에게의 토지분배는 문제도 삼지 않고 다만 농민의 수확물의 잉여를 탈취하는 권리를, 국가의 이름을 빌려 귀족계급에게 분여하는 원칙의 표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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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귀족은 토지비재권의 인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 전석담, 박극채 외, <조선경제사탐구>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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