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력을 징발하는 역(役)은 요역(徭役)과 군역(軍役)으로 구분되었다. 요역은 부역(賦役)이라고도 했는데 1년에 일정한 일수를 소경지역과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동원되는 잡역이 있었다. 또 군역을 직역이 없는 모든 백성(노비 제외)이 지는 국방의무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신분의 남자들이 지는 군 복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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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징포란 죽은 사람에게 포를 부과하는 것이다. 본래 죽거나 60세가 넘는 자는 군역이 면제되었다. 황구란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황구첨정이란 16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부담을 견디다 못한 양인들은 도망을 하거나 노비가 되어 군역을 피하고자 했다. 이제 관리는 그 부족분을 도망자의 친족이나 그 마을에 부과하는 족징과 인징을 통해 충당하고자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양역을 부담하고 있던 자식의 죽음을 부모가 다행으로 여기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 현종 때 평양에서는 족징을 피하기 위해 일족이 자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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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는 세금 징수와 군역 부과를 위해 군현이나 마을을 단위로 총액할당제를 채택했다...정부와 농민들 사이에는 수령과 아전이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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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의 입장에서도 중앙의 고위 관료에게 뇌물을 써서 내려왔으니 본전 이상을 뽑아야 했다. 만의 하나 청렴하고 결백한 수령이 있다고 하면 포악한 아전들은 수령이 부임하는 날 밤 수령을 처치해 버리고 처녀 귀신이 나타나 죽였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퍼드렸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수령들은 미리부터 기가 죽어 그 지방 행정에 밝은 아전과 한통속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수령과 아전이 백성을 후리는 모습이란 기아에 허덕이던 범이 돼지를 만난 격이고, 배를 쫄쫄 곯은 매가 꿩을 만난 셈이었다. 수령과 아전들에게 그렇게도 당하고도 백성들은 그 지방 수령의 공을 영원토록 잊지 못하겠다는 선정비까지 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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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과 아전들은 전결(田結)을 자기고 별의별 농간을 다 부렸다. 묵은 토지를 늘 경작하는 토지로 만들어 세금을 거두는 진결, 토지를 대장에서 누락시켜 주는 대신 뇌물을 받는 은결, 빈터를 토지대장에 올려놓고 세금을 강제 징수하는 백징, 허위로 토지 결수를 조작하고 자신들의 급료에 보조한다고 세금을 징수해 착복하는 허결 등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부가세도 많았다. 결손 보충을 명목으로 거두는 가승미, 곡식을 쥐가 먹었다거나 부식을 구실 삼아 거두는 곡상미, 서울 창고에 곡식을 납부할 때 그 사무를 청부 맡은 경주인의 보수로 징수하는 창역가, 납세의 수수료인 작지, 세무 관청 담당 관리에게 주는 인정미 등 매우 다양했다. 이 가운데 인정미란 일을 잘 보아 달라고 주는 뇌물성 수수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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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과 군정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환곡이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환곡은 백성을 구휼하기보다는 부세의 형태를 띠어 농민을 수탈하는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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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환곡의 분급은 보유하고 있는 곡식의 반만 나누어 주고 반은 새 곡식이 나올 때까지 창고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관례가 허물어져 갔다.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수령과 아전들이 불법적으로 다 나누어 주어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분급 방법도 가구별 분급보다는 마을이나 통 단위 또는 토지 결수 단위를 보아 분급이 이루어졌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환곡을 회수할 때나 이자를 받아들일 때 공동 납부제가 채택되었다. 환곡은 구휼의 목적에서 벗어나 모곡(환곡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 둔 동안에 축이 날 것을 요량해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던 곡식) 외에도 각종 수수료를 붙여 수납하는 것이 점차 관례화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환곡이 고리대 제도로 변질되었다. 고리대에 도저히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도망을 갔다. 그러나 이웃이나 친척이 도망간다 해도 인징과 족징이 이루어져 도망자의 부담을 떠맡은 백성들은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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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보기에는 관리들이나 세도가들의 재산이란 자신들의 재산을 도둑질해 간 것에 불과했다.
- 이성무, <조선왕조사> 가운데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는 데 대한 댓가로서 전조(田租)를 내어야 했다. 전조는 과전법에 있어서는 수확량의 10분 1로 되어 있었으나, 세종 26년(1444)에 새로 제정된 공법(貢法)에 있어서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되었다. 국가에서 거둬들이는 공전의 전조는 각지의 조창漕倉을 거쳐서 조운(漕運)에 의하여 서울로 운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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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부담으로는 또 공납(貢納)이 있었다. 공납은 각지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토공(土貢)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관부의 여러 가지 용도에 충당키 위한 것이었다. 공물에는 수공품으로서 각종의 그릇․피륙․종이․돗자리 등과, 각종의 철물․수산물․모피․과실․목재 등이 있었다. 공납은 전보보다도 더 괴로운 농민들의 부담이었다. 또, 원래는 지방장관들의 부담이던 진상(進上) 같은 것도 결국은 농민의 부담이 되었다.
다음 장정(壯丁)들에게는 역의 의무가 있었다. 역에는 교대로 번상(番上)해야 하는 군역과, 1년에 일정한 기간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요역이 있었다. 요역에는 적전(籍田)의 경작, 궁궐․산릉․성곽 등의 토목공사, 그리고 광산노동 등이 있었다. 요역은 경작하는 토지 8결마다 1부(夫)를 차출하며, 1년에 있어서의 동원 일수는 6일 이내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관아의 임의대로 징발할 수가 있었다. 토지의 경작 뿐 아니라 역의 징발을 위하여도, 호패법으로 장정들을 일정한 지방에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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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의 확대는 국가의 공적인 수입을 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농민의 생활을 곤궁하게도 하였다. 농장의 전호(佃戶)로서 농민들은 병작제에 의하여 수확량의 2분의 1을 전주에게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고통을 양반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특산물과 수공업제품의 공납으로 말미암아 더욱 커졌다. 공납의 양이 무거운 데다가, 그 수납 과정에 따르는 여러 절차가 또한 까다로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간에서 대신 물품을 납입하고 농민으로부터 댓가를 받아 내는 방납(防納)제도가 생기었는데, 이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그 피해가 또한 컸던 것이다. 이에 공납을 내지 못하고 도망하는 무리들이 늘어갔으며, 그러면 그 대신 일가친족에게 받아내는 족징(族徵)이나 혹은 이웃에 부과하는 인징(隣徵)이 행하여져서 괴로움을 더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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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제도가 농민을 상대로 하는 일종의 고리대로 화하여 농민들을 또한 괴롭히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받아들이는 제도였다...받아들일 때에는 모곡(耗穀)이라 하여 약간의 이자가 붙는데, 1할이 원칙인 이 이자가 다른 여러 명목으로 점점 증가하여 가서, 농민들의 무거운 부담의 하나가 되었다.
- 이기백, <한국사 신론> 가운데
<조운도>
조선사회의 농민은, 최고 지주인 국가의 농노로서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부분이 사적 지주의 예농으로서 한층 가혹한 생산조건하에 긴박되어 있었던 것이다...품관․향리 등이 대토지를 私占하여 토지 없는 농민에게 소작케 하고 일반 田租의 5배가 넘는 고율지대를 수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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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법적 중렴은 차치하더라도 사전에는 각종 雜賦가 이른바 풀이나 재, 말먹이 등등이 있어서 경작농민의 고혈을 다양한 형태로 짜낸 것이다...즉 職田의 경작농민은 여름에는 풀, 겨울에는 짚을 관가와 수전자에게 납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흔히 草價로 代納하는 듯하며 一束一斗라는 비율로 하면 그 草價米는 元田稅와 비등하게 되었다.
또한 태종 16년(1416) 5월 대사헌 金汝知의 상계에 의하면, 곡초뿐만 아니라 숯, 말꼴 등 가지각색의 부과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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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宗辛未元年(1451) 五月 議政府據戶曹呈啓 全羅道珍島郡本閑曠無人之地, 附近各官居民及諸處流亡之徒, 樂其無租稅、徭役, 多往居之。 自設官置守之後, 厭其徭役、防戍之苦, 還復逃散, 餘民鮮少(<文宗實錄> 卷7, 辛未元年 5月條)
즉 조선시대의 농민들은 그리운 고향 그리운 토지보다도 착취 없는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되기를 원했다. 위의 인용문은 봉건적 지배관계 내지 생산관계의 본원적인 모순을 너무나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무인도를 찾아 몰려든 농민들은 그곳이 유인도가 되자마자 다시금 유랑의 길을 떠난 것이다. 조세와 요역이 그들을 부지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 참고 : 앞의 문종실록 내용 풀이.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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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석담, 박극채 외, <조선경제사탐구>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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