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조선, 굶주리는 사람들

순돌이 아빠^.^ 2013. 4. 16. 10:42

한 땅에 살면서 굶주리는 자와 호의호식하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을

흉년의 탓으로만 할 수 있을까?

하늘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의 잘못이 아닌가?




내가 30년 전 날씨가 매우 찬 어느 날 저녁 서울 거리를 지나다, 다 떨어진 옷에 잔뜩 굶주린 눈먼 걸인을 만났다. 그는 하루 저녁 묵을 지이 없어서 남의 집 문 밖에 앉아 울면서 “죽여주시오. 죽여주시오”라고 하늘에 하소연하였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죽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 이익, <성호사설> 가운데


세종 25년(1443)에는 지난해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함경도 일대는 인간 지옥으로 화하였으니, 4월경부터 浮腫者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5, 6월 사이에 이르러 먹을 것을 구하려고 헤매다가 기진맥진하여 계곡에서 혹은 산속에서 혹은 도로에서 죽어 넘어진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비록 부모형제라도 장사지낼 수 없었다 한다.
...
예를 들어 경상도만의 아사자가 성종 1년(1470)에 7,100여명, 2년(1471)에는 7,400여명에 달하였다 한다. 실제 사망자수는 이 허술한 통계숫자의 몇 배에 이를 것이다. ‘春色은 飢色’이란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고 일반 농민의 생활 그 자체였다. 도토리와 나무껍질은 이미 농민들의 일상 음식물이 되어 있었고 흙을 먹는 것조차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농민들의 땀냄새를 맡고 공사의 債鬼가 달려든다.
- 전석담, 박극채 외, <조선경제사탐구> 가운데



<문헌비고>에 인조 16년(1638) 비변사가 아뢰었다.


함경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어 굶어 쓰러진 자가 잇따르고, 백성들이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이끌고 떠돌다가 평안도․황해도 및 강원도로 들어온 자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또 듣건대, 강원도 또한 기근을 겪고 있어 그곳 백성들도 떠돌아다니는 자가 꽤 있다 하니, 함경도 백성으로 강원도 쪽으로 길을 잡고 떠난 자들은 얻어먹을 데가 없어 반드시 또 삼남 지방으로 방향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굶주려 얼굴이 누렇게 뜬 백성들이 천릿길을 구걸하여 간다면 길을 가다가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는 것을 모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진휼사목에 “무릇 유리걸식하는 자를 거두어 보살피는 데는 그 좁쌀과 메주콩을 모두 수령으로 하여금 스스로 마련하게 하고 회감함이 없도록 하라”했으나 수령이 어찌 반드시 어진 사람만 있겠는가? 객관(客館) 앞 한곳에 땅을 파서 그 길이는 한 척(尺) 남짓하게 하고 그 둘레는 몇 장(丈) 정도 되게 하여 새끼줄로 몇 개의 서까래를 묶은 뒤 풀로 한 겹을 덮어서 위에서는 눈이 내리고 옆으로는 바람이 살을 에는 모진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물처럼 묽은 죽은 겨와 흙이 반이나 섞였고, 삽살개 꼬리 같이 다 떨어진 옷은 음부(陰部)조차 가리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얼어터진 피부는 마치 까마귀귀신의 꼴과 같다. 나팔소리가 한번 나면 돼지처럼 모여들어 먹고, 흩어져서 구걸하면 밥 한 술을 얻지 못한다. 저녁이 되면 한구덩이에 모여 자는데 몸을 꾸부리고 꿈틀거리는 것이 마치 똥구더기 같다. 서로 짓밟아서 약한 자는 깔려 죽고 병을 서로 옮겨 전염병이 성행한다.


감독하는 자는 이들을 진저리치며 미워하여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하루에 수십 명씩을 구렁에 갖다 버린다.
까마귀와 솔개는 그 시체의 창자를 쪼아 먹고 여우와 이리는 피를 빨아먹으니, 천하에 원통하고 비참한 일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

- 정약용, <목민심서> 가운데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http://sillok.history.go.kr



세종 101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9월 22일(계유) 1번째기사
함길도의 가뭄 정도와 상태·굶어죽은 상황 및 수효,화곡의 결실의 상황 등을 조사하여 아뢸 것을 명하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내가 마변자(馬邊者)를 불러서 함길도 인민의 기아(飢餓) 상태를 물은 것이 두세 번에 이른즉, 대답하는 말이 한결같지 아니하니 다 믿을 수가 없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답험(踏驗)해 볼 것이다.”

하고, 드디어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식(鄭軾)을 보내게 하고 인하여 식(軾)에게 이르기를,

“인민의 굶어 죽는 자는 다만 길옆뿐만 아니라, 그윽하고 깊은 산골짜기의 있을 만한 곳에 이르기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수색하고, 또 지나는 각 고을 수령과 연변(沿邊)의 진장(鎭將)·감사(監司)·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기민(飢民)의 상황을 자세히 물어서 아뢰게 하고, 민간(民間)에 준비된 흉년 구제할 물건과 도내(道內) 각 고을에 저축한 쌀·콩의 수효도 역시 마땅히 점검하여 아뢰게 하라.”

하고, 인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황보인(皇甫仁)에게 이르기를,

이제 어느 사람이 아뢰기를, ‘함길도는 지난해의 실농(失農)으로 인하여 민간(民間)에 먹을 것이 떨어져서, 혹은 닭·개·소·말을 잡아서 먹었으나, 금년 4월에 부황(浮黃)이 있기 시작하여 혹은 굶어 죽은 자가 있으며, 5, 6월 사이에 이르러서는 기근(飢饉)이 더욱 심하여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다가 혹은 시내 골짜기[溪壑]에서, 혹은 산야(山野)에서, 혹은 도로(道路)에서 굶어 죽은 자가 신의 눈으로 본 수효만도 4백에 이르옵고, 살아 있는 자도 무력(無力)하여서 비록 부자(父子)·형제(兄弟)라도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하였사오며, 가을에 이르러서야 겨우 기아를 면하여 그 사망하는 것이 5, 6월 같지는 아니하옵니다. 각 고을 수령이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고 혹은 미음이나 죽으로, 혹은 콩가루로 진휼(賑恤)하지만, 관가의 저축이 떨어져서 그것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수령이 굶은 백성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실어 와서 미음이나 죽을 먹이는데, 그 사람이 매우 굶주려서 수령 앞에서 죽는 자도 역시 많이 있다 하며, 그 중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칭하는 자도 대개는 다 굶어 죽은 사람이라 하고, 축성군(築城軍)의 가고올 때에 굶어 죽었는지의 여부(與否)같은 것은 알지 못하였다 하고, 감사도 역시 말하기를, ‘함흥(咸興) 이남은 진휼할 수 있겠으나, 함흥 이북에서 5진(鎭)에 이르기까지는 역시 어떻게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한다.



세종 104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4월 24일(계묘) 2번째기사
지인 박사분을 황해도에 보내어 흉년으로 흙을 파먹는다는 말을 확인하도록 하다

임금이 황해도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이 모두 흙을 파서 먹는다는 말을 듣고, 지인(知印) 박사분(朴思賁)을 보내어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사분이 회계(回啓)하기를,

해주 인민들이 흙을 파서 먹는 자가 무릇 30여 인이나 되었으며, 장연현(長淵縣)에서는 두 사람이 흙을 파서 먹다가 흙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하오나, 그렇게 대단한 기근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성종 6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6월 5일(임자) 4번째기사
소나무를 베는 것을 허락하여 그
껍질로 구황할 수 있게 하다

전지하기를,

“구황(救荒)의 초식(草食)은 소나무 껍질한 것이 없는데, 그러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는 것이 심히 엄하니, 그것을 여러 도(道)에 유시(諭示)하여 금하지 말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