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이니 감사니 하는 관료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던 정약용.
하지만 신분. 계급 제도, 귀족의 평민.노비에 대한 지배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약용.
신분 제도의 변화에 강하게 반대하는 정약용.
신분의 구별[辨等]
변등(辨等)이란 백성을 안정시키고 그 뜻을 바로잡는 요체이다. 신분 등급의 위엄이 뚜렷하지 않아서 위계(位階)가 어지러우면 백성들은 흩어지고 기강이 풀리게 된다.
우리나라 습속에도 신분 등급의 구별이 자못 엄격하여 위아래가 오로지 각각 그 분수를 지켰다. 그러나 근세 이후로 작록(爵祿)이 한쪽으로 치우쳐 귀족이 쇠잔하게 되자, 부유한 아전들과 백성들이 이 틈을 타서 기세를 부리니 이들의 집과 말을 꾸미는 호사스러움과 의복과 음식의 사치스러움이 모두 법도를 넘게 되었다. 아래가 위를 능멸하고 위는 쇠하게 되어 다시 등급이 없어졌으니, 앞으로 어찌 사회를 유지하고 결합하여 그 원기를 북돋아 그 혈맥을 통하게 하겠는가? 신분 등급의 구별은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 정약용, <목민심서> 가운데
1. 신분을 구별함으로써 백성이 안정된다는 것은 백성들의 삶이 안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배 대상으로써의 백성들이 저항하거나 강요된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는 것. 결국 신분을 구별함으로써 지배를 안정화하자는 것.
2. 분수란 계급과 신분 체계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옷을 입고 걸음을 걷는 방법 등을 규정한 것
3. 조선 후기로 가면서 신분 제도가 흔들림. 노비의 수가 많이 줄고, 양인이나 노비 가운데 재산을 쌓아서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사기도 함.
4. 정약용은 관리들의 탐학을 비난하는 데 관리들의 탐학이 가능했던 것이 바로 계급․신분 제도. 정약용은 그런 신분 제도의 철폐가 아니라 흔들리는 신분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 정약용이 관리들의 탐학이 왜 발생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는데, 그 일이 왜 벌어지를 모름. 관리들의 탐학을 없애려면 계급․신분 제도를 없애야 하지 않을까.
종족(宗族)에는 귀천이 있으니 마땅히 그 등급을 가려야 하고, 세력에는 강약이 있으니 마땅히 그 정상(情狀)을 살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도 폐지할 수 없다.
...
이른바 존귀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한다는 것은, 벼슬을 해서 군자가 되는 사람은 그 지위가 존귀한 것이며, 일을 하여 백성이 되는 사람은 그 지위가 비천하니, 두 등급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의 자손이 그 도(道)를 지키며 학문을 쌓고 예(禮)를 지키면 비록 벼슬은 하지 않더라도 귀족인데도, 백성과 노예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감히 이들을 공경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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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한다는 것, 곧 지배계급의 일원이기 때문에 존귀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곧 군자. 자신의 노동을 생활하는 백성은 비천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생활하는 자들은 귀하다는 것. 한 번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면 그 자손까지도 존귀하다는 것. 백성과 노예의 아들과 손자들이 계속 지배계급을 떠받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
향승은 비록 벼슬하는 관리는 아니지만 본 고을에서 대대로 수령의 정사를 보좌하므로 춘추시대의 등이나 설나라 같은 작은 제후국의 대부인 셈이니, 저 백성이나 노예와 같은 천민들은 마땅히 예절을 갖추어 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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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아전이나 향승 등의 탐학에 대해 비난하더니, 이제 와서는 향승을 떠받들라는 것. 예절을 갖춘다는 것은 곧 떠받들고, 굽신거리며 살라는 것. 이 때는 이 말하고 저 때는 저 말 하는, 오락가락 하는 정약용의 정신세계
수령으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이들이 편파적으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에 치우쳐서, 귀족을 예(禮)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소민을 두둔하면 원망이 들끓을 뿐만 아니라, 풍속 또한 피폐해지니 크게 옳지 않다...임금과 신하, 노비와 주인 사이에는 명분이 있어 마치 하늘과 땅 사이를 뛰어오를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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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귀족으로서 토족에게 능멸을 당하는 경우는 마땅히 통렬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니, 이것 또한 등급을 분멸하는 이유이다. 요즘은 아전의 습속이 나날이 달라져서,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귀족을 만나도 절을 하려 하지 않고, 아전의 자식이나 손자로서 벼슬도 없는 자가 고을 안의 귀족을 자기 또래의 친구와 다름없이 여겨 서로 맞먹으며 자(字)를 불러 예를 차리지 않으니 이것 또한 세상이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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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 곧 국가 관료이거나 관료의 가족․친척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굽신거리며 복종해야 한다는 것. 양반과 관료들이 지배하는 조선.
<속대전>에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일반 백성과 천민으로서 사족을 때려서 그 사정이 뚜렷이 드러난 자는 곤장 1백 대와 도형 3년에 처한다. 상해를 입힌 경우는 곤장 1백대와 유배 2천 리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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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신체에 해를 끼친 경우 강하게 처벌한 것. 반대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신체에 해를 끼친 경우는? 노비 주인은 노비를 때려 죽여도 처벌 받지 않음. 정약용이 등급을 분별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때려 죽여도 처벌 받지 않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때리면 곤장 1백 대를 맞게 되는 것.
대개 노비법이 바뀐 이후로 백성의 풍속이 크게 달려졌으니 이는 국가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
영조 7년(1731) 이후로 무릇 사노(私奴)의 양인(良人) 신분의 아내 소생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게 되었다. 이 이후로 상층은 약해지고 하층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의 뜻은 흩어져서 모두를 다스려 거느릴 수가 없게 되었다. -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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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나 아버지 어느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제도에서 변화가 일어남. 노비가 줄어드니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지배계급의, 정약용의 말로 하자면 상층이 약해짐.
양반-양인-노비의 신분 제도를 유지하면서, 양반+지주가 양인과 노비를 수탈하던 체제에 변화가 일어난 것. 이를 두고 정약용은 기강이 무너졌다고 함. 백성은 지배의 대상. 그런데 신분 제도가 변하면서 지배 체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두고 정약용은 다스려 거느릴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함.
양반+지주들의 지배 기구인 국가가 약화되는 것으로 여김.
<유산필담>에 말했다.
“...도대체 소민은 어리석어서 군신의 의리도 사우師友의 가르침도 없으므로, 귀족과 지체 높은 가문에서 그들에게 기강을 세워 주지 않으면 한 사람도 난민(亂民)이 아닌 자가 없을 것이다. 신해년 이후 한결 같이 귀족은 날로 시들어가고 천한 백성 무리는 날로 횡포해져서, 상하의 질서가 문란하여 교령(敎令)이 행해지지 않고 있다...그러니 내 생각에는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변란으로 망하는 것을 구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 52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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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민은 군자도 신하도 양반도 선비도 아니니 군신의 의리나 사우 같은 것을 알 리 없음. 그런 것들은 양반들이나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하는 거.
2. 귀족이 기강을 세운다는 것은 귀족들이 백성들을 강하게 지배․통제한다는 것. 만약 지배․통제가 약해지만 난민, 곧 지배 체제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거.
3. 부모 가운데 한 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로 되는 제도에서,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이 양인이 되는 제도로 변한 것을 두고 정약용은 나라가 망할 것으로 여김. 그 나라 또는 국가라는 것이 노비를 부려 먹으면서 유지되던 것이었기 때문에 노비가 줄어드는 것, 신분 제도가 변하는 것을 국가가 망하는 것이라 여김. 과거의 노비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
더러 흉악하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이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여 일을 꾸며서 난리를 일으키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의 뜻을 어지럽힌다...순조 12년(1812)에 토적(土賊) 홍경래 등이 음모를 꾸미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앞서 순조 10년(1810)과 순조11년(1811) 연간에 유언비어가 크게 일어났으니
...
임금의 봉록을 먹는 자는 단지 절개와 의열로써 보답이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절개와 의열 외에도 변란의 기미를 살펴서 변란이 일어나기에 앞서 준비하여, 이로써 변란의 싹을 없애고 화근을 끊어 버려야만 그 직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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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배 체제가 가진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 체제에 도전하는세력을 적賊이라고 규정.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없애고 지배 체제를 유지하려고 함
건국 초에는 사가私家의 노비가 나라 안에 가득차서 한 집에서 거느리는 수가 간혹 천이나 백 명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는 법 조항이 이처럼 자세했다. 그러나 영조 7년(1731) 이후로는 양처(良妻) 소생은 어미를 따라 양민(良民)이 되었으므로 나라 안의 노비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이치로 보아 절반이 줄어드는 것이지만, 1대에 반이 줄어들고 2대에 또 그 반이 줄어들어서 세대가 오래되면서 점점 없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명문대가라도 겨우 한두 명의 노비를 사서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으므로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에 대해서는 지금 논의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도 대개 재산 분배의 법이므로 일반적인 법에 따라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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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를 사고 팔 수 있었다는 것. 재산으로 여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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