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홍경래의 난 또는 평안도 농민전쟁

순돌이 아빠^.^ 2013. 6. 18. 15:06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上> 가운데


평안도 농민전쟁의 참가층
- 그 중층적 성격을 중심으로 -
鶴園 裕

순조 11년 12월 18일(1812년 1월31일) 평안북도의 가산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삽시간에 북에서는 의주의 성내 밖으로부터 남으로는 정주의 근교까지를 뒤덮었고, 정주에서의 농민군의 5개월에 걸친 농성을 거쳐서 다음 해 4월19일(음력)에 이르러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일반적으로 <홍경래난>이라고 불려왔던 평안도 농민전쟁 - 234

이 반란은 흉작이 원인이며 즉흥적으로 봉기하였을 것이라는 식의 성격파악이 아니라, 흉작을 봉기의 계기로 이용하면서도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서 계획되었다는 점 - 239

준비기인 주도층은 농민중에서도 특히 <무전농민無田農民> 즉 농민층분해에 따라 생겨난 최하층농민이나 임노동층․도시주변의 잡업층을 병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은 김점金店 점군店軍(채금採金 노동자)의 모집을 명목으로 1~3양兩의 선금을 주어서 유인하는 것 - 263

가산의 경우는 농민군이 가산읍내에 들어가자...가산의 지속支屬 이원섭은 그 날 중으로 가산군수에 임명되었다. 다음날 12월19일에는 가산 교외 갈마창渴馬倉의 창곡倉穀을 군율軍律에 의해서 엄히 지키라고 하는 농민군의 전령을 發하고, 23일에는 이원섭의 명령으로 갈마창의 창곡 200여석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서는 창곡이 농민군의 손에 의해서 엄격히 관리되었고 농민군 병사에 의한 자유로운 약탈이 허가되지 않았음을 살필 수 있다. - 268

김이대는 처음에 정주목사에 임명되지 않았던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27일에 정주목사겸진무도독으로 임명...가마에 탄 책, 동헌으로 들어가는 정도로 기뻐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주도층에 참가하는 목적이 정치적인 출세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269

농민군 대중의 전투의욕은 미약하였다. 이것은 첫째로는 유민流民등 무전농민층無田農民層을 농민군의 주체로 하고 있었던 점과 자영농민층등의 요구를 조직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정約正등은 본래 수세문제등을 둘러싸고 농민층과 직접 대립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 계층을 통한 초군抄軍에 농민층의 능동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주도층의 재지중간층으로서의 성격에서 오는 처음부터의 모순이었다. - 273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지방관)의 축출에 성공한 후, 기본적으로는 향무鄕武․향임鄕任․향리鄕吏 등 재지在地의 중간지배층이 권력을 장악해서, 향촌사회의 질서 그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령에게서 수탈당한 재지의 부유층이나 중간층은 자신의 계층적 이익을 위하여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으나 이같은 주도층을 통해서는 농민층의 요구가 적극적으로 조직될 수 없었을 것이다. - 274

의주에서는, 다른 지역이라면 농민군의 주도층을 형성하였을 계층이 정부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토호 장지헌․장지현 형제는 머슴 50여명을 인솔하여 관명官命없이도 자발적으로 성을 지켰다. 또한 성외의 부민富民 유학幼學 홍득주는 각곡 1,218석石․전錢 5,000양兩을 군수軍需로서 자원하여 납관納官했다. - 276

의주의 경우에는, 공무역公貿易의 독점에 따라서 정부와 보다 밀착하고 있었던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의주의 풍부한 무기와 물자는 의병장들의 물질적인 기초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의주의 의병장들이 정주의 농민군에 대한 포위전까지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277

농민군은 장기간의 농성에 따른 식료食料나 탄약의 부족 등에 의해서 최종적으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평안도의 <무전농민無田農民>을 중핵으로 한 농민군이 8,000명을 넘는 정부측 포위군에 대해서 5개월에 걸친 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측에 있어서는 큰 충격이었다. - 279

1812년의 평안도 농민전쟁은 4월19일(양력 5월29일) 정부군이 성벽 일부를 폭파 돌입하여 진압함으로써 끝나게 된다...[진중일기陣中日記], [서정일기西征日記]등의 기록에 의하면 정주 함락 후 생포된 남녀 2,983명 가운데 10세 이상의 남자 1,917명을 참수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에 대한 공식보고이고 함락의 과정에서는 [서정일기]에,

멋대로 살해하지 말도록 한 계율을 엄명하였으나, 적분積憤이 격하여서, 선비들이 모두 칼을 들고, 과다하게 살육하기에 이르렀다. - 279

평안도 농민전쟁에 있어서 주도층은 이조말기의 상품경제 발전에 따른 체제적인 모순을 배경으로 무전농민층無田農民層에 의존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배제, 궁극적으로는 중앙정부의 타도를 지향하며 봉기하였다. - 280



변태섭 외,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下> 가운데

홍경래난
정석종

18세기와 19세기 초엽에 있어서는 농업, 상공업, 사회신분 등 사회전반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농업에 있어서는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벼농사에서는...단위면적당 노동력을 8할이나 감소시켰으며, 농민 일인당 경작능력을 4, 5배나 늘릴 수가 있는 결과로 되었다. 따라서 농토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다량으로 축출되게 되어 광범위한 무토불농지민無土不農之民이 생성되었다. 이같이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민층분해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
무토불농지민들은 생활타개의 방법으로 상업에 종사하거나, 도시나 광산지방에 흘러 들어 공업에 종사하거나, 농토에 머물러 고용노동으로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 291

유민流民의 다량발생의 현상으로도 나타났던 것 - 292

이같은 무토불농지민을 일변으로 하고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일단의 사회계층이 또한 대두...스스로 직접 농사에 종사면서 경영규모가 클 경우에는 스스로 관리자나 감독의 일을 맡고 노동자로는 이들 무토불농지민의 노동을 고용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업을 합리적으로 경영, 부를 축적하는 계층이 그것이다. - 292

이같은 사상의 진출은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추세와 함께 나타났으며 그들은 결과적으로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던 것...사상과 특권상인(시전상인)과의 경쟁이 치열...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에 방해가 되는 특권시전상인층에 대한 저항은 대사상들 뿐만 아니라 중소사상층에서도 격렬한 양상은 띄우게 되었던 것 - 294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외거노비가 실질적으로 소멸하고 있는 것...외거노비를 추쇄推刷하러 간 양반주가 살해되는 사실은 비일비재...내거노비의 경우에는...주로 도망에 의하여 그들의 신분해방의 길을 찾고 있었다. - 296

양반층의 경우에도 그들은 소수를 제외한 거개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태 하에 있었으므로, 하등 상민층과 구별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 297

봉건사회의 전면적인 붕괴․해체라는 사회현실 속에서 봉건정부는 이러한 사태에 대응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이 이른바 노론 단일 독재체제로 변모하여 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이들 집권층은 그들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대토지 소유자 및 특권 상인층과 제휴하는 이른반 봉건적 반동체제로 변모치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 301

노론 단일 독재체제에로의 강화에도 일녀의 정책적인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1801년 정월 을사乙巳에 시행된 공노비해방이 그것이다.
이 노비해방은 실질적으로 이들 노비가 거의 사망 또는 도망하여 없었으므로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 301

유민의 다량 창출, 경영형부농층의 성장, 사상私商층과 특권 시전상인층의 갈등, 광산노동자의 대량생성, 관료가 되지 못하고 있는 다수 지식층의 불만, 신분제를 질곡으로 느끼는 천민층의 반항, 이러한 일련의 변화와 결부된 봉건정부의 반동체제 강화, 이같은 속에서의 혹심한 흉년의 계속, 하층인민들의 변혁에 대한 갈망이 높아가는 속에서의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의 보급,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평안도 일우에서는 사회변혁을 위하여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 304

관군이 밀고 들어가는 곳마다 불지르지 않은 곳이 없고, 남녀노소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도륙하였다. 불타 죽고 칼 맞아 죽은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른바 초토전술로 봉기군의 근거를 없이 하는 전술인 것이었다. - 324

정주성 근경의 지방 백성들은 관군의 초토 전술로 인하여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부모 처자와 친척 이웃을 빼앗기었으며, 따라서 초토전술의 피해를 피하여 가산, 박천 지방의 대부분의 농민들이 정수성에 봉기군을 따라 들어왔던 것이다. 봉기군을 따라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도 초토전술의 작전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시 저같은 관군의 약탈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따라서 이 지역의 이들 백성들은 정주성의 봉기군에게 그들의 물적 정신적 지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들 백성들은 낮에는 관군의 동정을 살펴 정주성 봉기군에게 보고하고, 밤에는 군량을 날라 봉기군을 도와 주는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주위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후원 속에서 고립무원의 정주성의 봉기군이 저같이 완강히 또 오래도록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난의 초기와는 달리 정주성의 봉기군은 농민군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334

1,710근 화약에 맞추고 진흙을 덮었다...이렇게 하고 그 대 끝에 화승을 달아 19일 날샐 녘에 불을 붙이자 한 시간 뒤에 성이 폭발하였던 것이다.
...
관군은 여가閭家에 방화하면서 입성하여 닥치는대로 살육하였다. 서남 쪽의 봉기군은 남김없이 사로 잡혔다. 사로 잡힌 수는 2,983명이었으며 이 중 10세 이하 남아 224명, 여자 842명을 제외한 장정은 1,917명이었다. 이들은 23일 모두 효수되었다. 이로써 119일 만 4개월 여에 걸친 난은 종식되었던 것이다. - 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