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주권. 주권수호

순돌이 아빠^.^ 2013. 7. 1. 16:59

주권이란 하나의 지배계급이 사회에 대해 국가라는 허구적 실체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자 또한 상이한 사회의 지배계급들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 이종영, <지배와 그 양식들> 가운데

 

 

서주 전․중기의 군사적 요청에 의한 이봉(移封)현상에 엿볼 수 있듯이 서주의 제후국은 본래 피정복민의 반발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이른바 무장식민적인 군사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중기 이후 정복운동의 정체에 수반된 영유지의 고정화․세습화 경향과 주왕권의 약화, 그리고 주실(主室)가 제후간의 혈연적 연대의 쇠퇴 등이 요인이 되어 제후는 점차 독립적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소국에 대한 멸국겸병滅國兼倂현상도 꾸준히 계속되어 서주초 적어도 1,500여로 추정되었던 국의 숫자는 춘추초 170여 국으로 격감했다.
- 이성구, '춘추전국시대의 국가와 사회',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 <강좌 중국사 1 - 고대문명과 제국의 성립> 가운데


 

안으로는 권력기반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밖으로는 사대교린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던 청이 유약해 졌음을 절감하면서 권력집단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으며 가장 주도적인 인물은 국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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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추진되는 정책을 보면 영선사행의 파견, 교련병대의 설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강병책强兵策이 가장 먼저 추진되고 있었음 알 수 있다...군사확장을 통해 주권을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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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군사력의 증강은 민중에 대한 부담을 기반으로할 뿐 아니라 민중의 성장을 저지하려던 것이기도 하다.

- 연갑수, '개항기 권력집단의 정세인식과 정책',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3-농민전쟁의 정치․사상적 배경> 가운데






고종이 지키고자 했던 주권이란 무엇일까? 국가와 지주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과 빈민들이 곳곳에서 반란과 봉기를 일으키고, 국가는 수탈을 중지하기 보다는 억압과 탄압을 지속했던 19세기 말 조선에서 고종과 조선의 지배계급이 지키고자 했던 주권이란 무엇일까?


농민 생활의 안정? 여성들의 안전?


고종이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은 조선 사회에 대한 지배와 권력이 아닐까? 청과 일본 등이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정치세력이 보유하고 있던 권력을 넘보고 있으니 그것을 지키고 싶었던 거겠지. 농민들이야 굶어 죽든 맞아 죽든 어쨌거나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고 하는 지배계급.


조선의 농민들을 지배하고 수탈할 수 있는 권력을 청이나 일본 등 다른 사회의 지배계급에 빼앗기지 않고 보호하는 것이 주권 수호 아닐까?


주권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권리인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지배계급의 지배와 권력일 뿐.


한 사회에 대한 지배와 권력을 놓고 벌이는 여러 지배계급들의 투쟁. 조선을 놓고 청과 일본, 러시아 등이 투쟁을 벌였듯이.


주권강화란 다른 지배계급에 대한 것이자 해당 사회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것



1893년 3월 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자 국왕은 청이 태평천국의 난을 외국군을 빌어서 진압한 전례를 들어 청병차용淸兵借用 의사를 개진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동안 반청정책이 청의 간섭으로부터 국왕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 하였음에 불과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국내의 여타세력으로부터는 국왕권의 절대권을 확보하면서 한편으로는 청으로부터의 간여도 배제하려는 반청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중의 정치적 성장으로 인해 자신의 권력이 위태롭다고 여겨질 때 언제든지 다시 외세와 결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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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 민중에 대한 지배와 관계하기 때문에,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른 국가의 군대를 빌리기도 하고 돈을 빌리기도 하고...무슨 짓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