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들은 프랑스혁명기에 나타났던 농민대중의 봉기와 항쟁을 평등사상에 의해 발단한 것으로 보아 사회적 대혼란의 징조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농민군의 봉기를 부정적 현상으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윤치호의 경우도 “동학당들이 양반들을 다룸에 있어 보여준 잔인성은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겪었던 유혈적 폭력사태를 연상시킨다”고 하는 데서 보듯이 역시 농민군과는 상이한 현실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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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9월18일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한국정부에 통고하였고, 21일 개화파정권은 이를 수락하였다. 농민군 토벌을 위한 일본과 개화파정권의 결탁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 고석규, '집강소기 농민군의 활동', 한국역사연구회,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9월 초순 이래 일제히 일어난 영남 남서부지역의 농민군의 왕성한 활동에 대해 거의 속수무책이었던 관에서도 일본군의 출병과 때를 같이 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서고 있다. 즉 중앙정부에서는 9월 25일에 이르러 대구판관 지성영을 초포사로 임명하고 안의현감 조원식을 조방장으로 임명하였으며, 특히 지석영으로 하여금 대구 관군을 이끌고 진주․하동 등지로 가서 일본군과 협동하여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는 동시에 통영에 대해서도 군병을 동원하여 이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 박진태, '1894년 경상도지역의 농민전쟁, 한국역사연구회',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광양현감을 겸하고 있던 낙안군수는 8일 광양 이교吏校들의 봉기소식을 곧 좌수영에 통고하고...좌수사 김철규는 이미 한편으로는 일본군함 쓰쿠바호의 흑강黑岡 함장에게 광양 방면의 농민군 집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고...10일 좌수영군과 일본군은 하동을 출발하여 섬진강을 건너 광양 다압․월포 지역으로 가서 농민군을 진압
- 박찬승, '1894년 호남 남부지방의 농민전쟁',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10월9일 일본공사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병을 파견한다는 통보를 보내고 아울러 이들의 지휘에 관군이 순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외무대신 김윤식은 행진각대장行陣各隊將과 연도沿途의 각 지방관에게 일본국 사관士官의 지휘에 순응하라고 시달하였다. 일본은 관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데 이어, 일본군대가 동학당을 소멸하기 위하여 파병하였다는 뜻을 포고하여 내외신민이 모두 일본병의 동학 소멸을 돕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책은 일본의 의도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관군의 힘을 믿지 못하여 외세를 빌리고자 하는 개화당정부의 의도와도 일치되는 것이었다.
- 정은경, 1894년 황해도․강원도지역의 농민전쟁,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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