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부가 원세개를 통하여 청국에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하였던 것은 농민군의 전주입성이 있을이지 이틀 뒤인 6월3일이었다. 6월5일, 인천항에는 청국군함 두 척과 미국군함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였을 때 인천항에는 이미 프랑스 군함이 정박하고 있었다. 프랑스군함은 동학농민군의 소요와 관련하여 5월9일 입항한 아래 조선정세의 추이를 주시하면 계속하여 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일 양국의 선발부대가 6월8일을 전후하여 각기 아산과 인천에 상륙하였고, 후속부대도 속속 상륙함으로써 청․일 양군은 대치상태에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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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군함 아처호로부터 5명의 장교와 22명의 해병대가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고, 같은날 미국군함의 해병대 80명이 수로로 서울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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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세력들은 동아시아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유지․확대하기 위한 외교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가운데 한반도 문제 해결책으로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한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7월19일 주일 영국대리공사는 “남부 4개도의 대외 및 대내문제를 일본의 단독 감독권의 보호하에 두고, 동시에 북부 3개도도 동일한 조건하에 청국의 보호하에 둔다. 단 서울은 서로 점령하지 않고 놓아둔다”는 내용의 분할점령안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 주미 일본공사 또한 소말리아에 대한 영불협정을 모델로 조선의 분할점령안을 건의하였다. 이 안은 남부 4개도의 대외 및 대내문제를 일본의 단독 보호하에 두고, 동시에 북부 3개도에 대해 동일한 조건으로 청국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경기도는 제3국의 간섭을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방지하는 조건하에 조선국왕의 관할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 최덕수, '1894년 농민전쟁기 열강세력의 동향',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5-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혼자 먹으면 좋겠지만 그러기 어려우면 나눠 먹자는 거. 해방 뒤 38선도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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