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고 해서 제 고향 부산에 계신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가시고 싶은데 놀러 가자고 했지요. 복지관에서 만난 노인 분들이 국립해양박물관에 갔었다고 자랑하더라면서 아버지도 가시고 싶다네요.
저도 처음 가보는 곳이었습니다. 한창 더운 날에 이런저런 전시를 보다보니 땀도 나고 다리도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4층에 있는 찻집에서 커피를 한 잔 했습니다.
잠깐 쉬었다 다시 구경에 나서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박물관 한 켠에서 부산지방경찰청이 ‘6.25전쟁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는 전시를 하고 있는 겁니다. 6.25가 어떤 전쟁이었는지는 물론이고 전쟁 이후의 한국 상황과 최근의 천안함 관련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시의 결론은 위장 평화 공세에 속지 말고 국가 안보와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라는 겁니다.
전쟁박물관도 아니고 “해양”박물관에서, 국방부도 아니고 경찰청이 국가 안보와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시회를 왜 하는 걸까요? 경찰은 왜 시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키려고 하는 걸까요?
찜찜한 마음을 안고 박물관을 나섰습니다. 아버지와의 다음 여행지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태종대. 차에서 내려 태종대로 걸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또 웬일입니까? 태종대 입구에 부산영도경찰서가 ‘국가 안보 나의 행복’이라는 큰 간판을 세워 놓고 있는 겁니다.
부산영도경찰서는 왜 수많은 여행객들이 오가는 태종대 입구에 이런 간판을 세워 놓은 걸까요? 국가 안보와 우리의 행복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국가 안보에 큰 문제가 없는데도 많은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요?
태종대를 나와 아버지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아는 분을 만났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물휴지를 주더라구요. 별 생각 없이 물수건 껍데기를 보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공산주의나 국가 안보와 관련된 상담을 하라는 전화 번호가 적혀 있네요. 한국군이 상담을 해 주겠답니다.
도대체 물휴지와 국가 안보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지배와 안보
1908년 7월에 재차 내각을 조직한 가쓰라는 일본지배층이 그에게 부과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련의 정책 수행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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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황으로 하여금 무신조서를 발포케 하여 과격한 사상과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는 한편, 1908년 내무성과 농상무성이 중심이 된 각종 강습회(감화구제 강습회, 지방개량사업강습회 등이 있었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고 ‘풍기단속’ ‘근검치산勤儉治産’ 등의 구호 아래 일련의 체제순응교육을 실시하였다...전국의 신문을 통해 국민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선전활동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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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개시와 함께 전쟁을 비판하는 언론과 사상에 대하여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총본산 내무성은 신문․잡지의 편집에 종사하는 언론인에게 ‘국익을 해치고, 반전 또는 반군적 언사를 하며, 일본의 대외정책을 침략주의라고 의심할 수 있는 기사’의 게재 금지를 지시하였다. 문부성도 새로 교학국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천황주의와 군국주의에 의해 지도할 것과 전쟁을 반대하는 사상은 철저히 압살하는 방침을 세웠다.
- 강동진, <일본근대사> 가운데
20세기 초반 일본이 일본 국민들에게 어떤 일을 했었는지에 관한 글입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읽어보면 일본이 일본인 또는 조선인에게 했던 일과 한국이 한국인들에게 하는 일은 비슷한 게 많더라구요.
누가 지배하는 지는 다르지만 지배하는 이유와 방법은 비슷한 게 아닐까요? 우리가 20세기 초반의 일본인이나 조선인은 아니지만 그들과 비슷한 방법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거구요.
일본이 내세웠던 국익이나 안보란 무엇일까요? 일본이라는 국가가 국익이나 안보를 강조하는 동안 일본 사회에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계속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네요. 일본 점령 하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구요.
국익과 안보를 내세우면서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겠지요.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할 거구요. 그러면서 돈이든 권력이든 차곡차곡 챙기는 거구요.
국익과 안보를 명분으로 국민들을 지배하면 할수록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 국익과 안보를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요?
국가의 안보가 국민의 행복과 직결된다면 국가 안보를 통해 그렇게 많이 번 돈을 왜 소수만 독점하는 걸까요? 부자나 권력자라고 해도 좋고 자본가나 지배계급이라고 해도 좋은 이들의 이익의 국익이고, 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안보인 것은 아닐까요.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행복은 아무 관련 없는 헛구호인 셈인 거지요.
외적이 쳐들어 와서 노동운동하는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고 가두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경찰이 나서서 그들을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두지요. 국가 안보는 지켜지는데 국민은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신호와 반응
‘국익’, 즉 기존 체제의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가운데
제가 야구를 좋아해서 텔레비전 중계를 자주 봅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를 부르곤 하더라구요. 가끔은 연예인을 불러서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게도 하구요. 야구장에서까지 왜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야구장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김범수
어쨌거나,
야구장에서 우리나라 만세 한 번 외치고, 물휴지 껍데기를 통해 국가 안보라는 글자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구요? 물론 그 하나가 당장에 큰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일본+독도 얘기만 나오면 흥분 상태에 빠지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일본과 독도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해서 그렇게 된 걸까요? 독도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한국의 땅이 되었는지를 알고서 그런 흥분 상태에 빠지는 걸까요? 아마 대부분은 ‘그냥’ ‘나도 모르게’ 독도 얘기만 나와도 흥분 상태에 빠질 겁니다.
그러면 많은 한국인들의 심리는 왜 독도라는 단어만 들어도 흥분 상태로 빠지게 되는 걸까요?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당연히 그러는 것이 아닐 건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혹시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듣고 배운 것들을 통해 그런 심리 상태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요? ‘독도’라는 작은 신호 하나만 줘도 심리에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진 거지요. 독도를 사랑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독도를 사랑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국익이나 안보도 비슷한 것은 아닐까요? 한 번 열 번 백 번 천 번 듣고 보고 배우다 보니 단어 하나, 말 한 마디에도 움츠러들거나 정신이 번쩍 들거나 하는 그런 인간이 된 거지요.
A라는 신호를 주었을 때 B라는 반응이 나오도록 지배자들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는 매순간마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무언가를 새기고 또 새기는 겁니다.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나비야’ ‘나비야’라고 하면,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나비야’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고 침을 흘리는 멍멍이와 같은 거겠지요. 아빠에게 회초리를 많이 맞은 아이는 아빠가 집에 없는데 식탁 위에 있는 회초리만 보고도 움찔하겠지요.
그렇게 보면 물휴지 위에 적힌 ‘안보’는 지배자들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현존하는 체제에 저항 하지 말라고 우리의 마음에 보내는 신호는 아닐까요? 우리의 마음은 안보라는 신호가 다가오면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도록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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