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존재한 인클로저법이 담당한 역사적 역할의 본질은 영국 농촌에 있던 고대로부터의 집단경제적인 유산들을 완전히 쓸어낸 것이었다. 이후 농업은 농촌공동체의 자급자족이 아니라, 전적으로 시장을 목표로 한 산업이 된다. 그래서 인클로저는 농업의 상업화와 불가분한 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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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대한 비상업적 태도와 자급자족적인 농업형태가 그 핵심이었다. 그러한 중세적 유산이 제거되었을 때, 영국 농촌에 남은 것은 소수의 지주계급과 상업적 소작농, 그리고 대다수의 고용된 노동자들이었다. 농촌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 프롤레타리아트로 된 것이다. 이들은 도시에서 자신들을 끌어들이는 유인만 있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미 토지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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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주인인 봉건영주들은 점차로 교환경제에 눈을 돌린다. 당시 모직물 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모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농민들에 의한 농작물 생산보다 양을 길러 모를 생산하는 것이 더 큰 이득이었다. 양을 치는 데는 넓은 땅 안에 훨씬 적은 수의 목동들만 고용하면 충분했다. 농업이 가능한 땅들도 목축지로 전환하고 그 땅에 의지해 살던 농민들을 추방해버린 것이다. 바로 인클로저 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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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그 결과로 16세기 초부터 생산수단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로서 시장에 내던져진 부유(浮游)하는 농민계층,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마르크스는 분석했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19세기 후반에 농촌사회에서는 조선후기 이래 전개되고 있었던 농민층의
분화가 더욱 확대 발전하고 있었다...농민층분화를 촉진한 것은 바로 지주층의 농지집적이었다. 지주들은 농지를 계속해서 집적하고
농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고율의 지대를 착취하면서 지주경영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봉건구가가 농민에 대해서 과도하게 봉건적
부세를 수탈하는 것도 농민층을 더욱 몰락시키고 있었다.
토지는 일반적으로 소수의 지주․부농에 집중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은 점차 농지에서 배제되어 소작농민으로 되었다. 이러한 농민들이 더 몰락하면 임노동층으로 전락하거나 유민화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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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방은...미곡의 상품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어 장시에서 미곡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 즉 금강,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포구와 내륙장시들로 연결되는 시장권을 통하여 미곡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 평양 등 대도시
미곡소비시장과 원격지간 유통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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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유통경제의 발전은 1876년 개항을 계기로 하여 이제 국제적 상품유통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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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 지주제는 개항 이후 확대된 상품유통경제를 배경으로 하여 더 많은 토지를 집적하면서 지주경영을 강화...지주들은
적극적으로 지주경영을 활용하여 미곡무역을 통해 소작미를 판매함으로써 수입을 증대하였다. 여기에서 지주제의 확대는 어떤 방법으로든
몰락농민층의 토지를 계속해서 추가 매입하고, 지주경영 내에 소작농민에 대한 통제를 어느 정도 강화하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1> 가운데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생산자로부터의 생산수단 박탈
비생산자의 생산수단 소유, 비생산자에게 생산수단 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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