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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파 메타 - <아쉬람>을 보고

순돌이 아빠^.^ 2014. 2. 2. 08:41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나의 부모도 나의 이웃도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다가도 문득 문득 물음이 들 때가 있지요.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익숙하지만

1930년대 인도. 8살 쭈이야는 어느 날 일명 ‘과부’가 됩니다. 남편이 죽은 거지요. 8살인데 남편은 뭐고, 과부는 또 무언지... 쭈이야는 과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릅니다. 결혼이 무엇인지, 남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결혼을 했겠지요.

쭈이야의 아버지는 그를 과부들이 모여 사는 집으로 끌고 갑니다. 결혼이 쭈이야의 의지와 관계없듯이 과부 수용소에서 살게 되는 것도 쭈이야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는, 남편이 죽은 여성들의 수용소입니다.

이곳의 여성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바깥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단당한 채, 맛있는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율 속에 살아갑니다. 해서 되는 것보다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더 많을 지경입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평생 다른 남성과는 만나지도 말고 성 관계도 갖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그럴까요? 하지 말라고 해서 참고는 있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이나 그리움, 욕망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지요. 죽음을 앞 둔 할머니가 결혼식 때 맛 봤던 맛있는 음식을 평생 그리워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하지 마라’는 어떻게 관철될까요? 바깥사람들이 부정 탄다고 수용소 여성들을 멀리 하면서 관철되기도 합니다. 또한 이 여성들 스스로 남성과의 접촉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힌두교는 여성들에게 기존의 사회 질서에 순종하며 욕망을 억누르고 살라고 하지요. 종교니 관습이니 하는 것들부터, 여성들의 내면까지 온갖 것들이 그들을 옥죄고 있는 겁니다.

이 여성들을 이토록 옥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여성들이 남편을 죽인 것도 아닌데, 남편이 죽었다고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요? 왜 자유롭게 길을 걷고 일을 하고 사랑을 하면 안 되는 걸까요?

결국 남성의 욕망 때문은 아닐까요? 남성의 욕망에 따라 여성을 아내로 만들고, 남성의 욕망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수절을 하라고 하는 거지요. 혹시라도 수절을 거부하고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갖게 될까봐 두려워 아예 여성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여성들끼리 살라고 한 것은 아닐까요? 가정교육이니 종교니 여성의 삶이니 하는 여러 이야기와 정서들을 통해 여성들의 내면 또한 남성의 욕망 실현에 유리한 쪽으로 바꾸었을 거구요.

반대로 아내가 죽으면 남성도 다른 여성과의 성적 관계를 갖지 않고, 결혼도 다시 하지 않을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남성은 아내가 죽으면 새로운 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겠지요.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해 왔으니 익숙한 일이고 당연한 일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겁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년이 되는 것일 테고요.






남성의 욕망

남편이 죽은 여성이 다른 남성과 만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규율을 만들어 뒀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여성이 남성을 만나는 것은 안 되지만, 남성이 여성을 만나는 것은 가능한 거지요.

바깥으로 잘 나가지도 않고 노동도 하지 않는 수용소 여성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먹을 것을 구할까요? 구걸과 성매매입니다. 그리고 성매매를 한다는 것은 성매매를 하는 남성이 있다는 겁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하지만 모두 쉬쉬하고만 있는 성매매이지요. 앞으로는 도덕이 어떠니 여성의 삶이 어떠니 하지만, 뒤로는 자신의 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남성들입니다.

수용소 여성들은 모두 1층에 사는 데, 2층에 꺌랴니라는 여성이 혼자 삽니다. 수용소 바깥의 남성들과 성적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는 여성입니다. 바깥의 사람들이 부정 탄다고 멀리하는 수용소 여성들, 그 여성들은 또 깔랴니를 부정 탄다고 멀리하지요. 깔랴니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번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말입니다.

깔랴니는 남들이 부정 탄다고 여기는 개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런 깔랴니에게도, 개에게도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이 없던 쭈이야는 깔랴니와 친구가 됩니다. 바깥 세계로부터 고립된, 고립된 공간 안에서도 또 고립된 장소에서 두 사람은 우정을 쌓습니다.

쭈이야를 만나고 얼마지 않아 깔랴니 앞에 새로운 사랑이 나타납니다. 둘은 결혼할 약속을 하지요. 평생 죄인 아닌 죄인처럼, 늘 혼자 방에 갇혀서, 성매매를 할 때만 밖으로 나오는 삶을 살아야 했던 깔랴니에게 사랑은 수용소를 떠날 용기를 줍니다. 새로 결혼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부정한 일이라고 욕을 해도 무시하지요.

남성과 여성들이 옴짝달싹 할 수 없게 짜놓은 쇠그물도, 자유롭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나 봅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없을 때는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것들도, 무언가 간절히 하고 싶은 게 생기자 과감히 던져 버릴 수 있었던 겁니다.

깔랴니가 떠남으로써 여성 수용소가 자동으로 파괴되고, 갇혀 있던 여성들이 모두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한 사람이 빠진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도록 강요됩니다. 깔랴니가 했던 성매매를 쭈이야가 대신하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여성을 특정한 공간과 집단에 가둔 채 남성의 욕망을 실현시켜가는 사회 구조는 계속 유지되는 것이겠지요.


인도만 그런 것은 아닐테고, 1930년대만 그런 것도 아닐테고, 힌두교만 그런 것도 아니겠지요. 아프가니스탄도, 2천 년 대도, 기독교도 그럴 테구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가족이나 종교와 같은 사회 구조, 그리고 여성들의 사랑과 우정 등을 잘 표현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