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남성 중심 철학이지만 남녀의 결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의 부리, 즉 인간 도덕성의 토대로 간주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군신관계로 확대되는 사회화 과정의 원천으로도 본다. 우주론적 용어에서 볼 때 하늘陽은 땅陰 위에 군림하며,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명확한 위계질서는 우주론적으로 공인되어 인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 질서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유학자들은 여성의 내부․가사 영역과 남성의 외부․공식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성적 타락이나 이기심이 사회 불안이나 부부간의 역할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보았으므로 남녀 구분이 그러한 현상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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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교육은 교화였다. 교화 목적은 중국 고전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이상을 여성에게 주입하고, 혼인 생활에 필요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었다...유교사회에서는 특정한 여성을 추앙했는데, 이들은 개성이 아니라 유교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틀에 얼마나 완벽했느냐에 따라 선정되었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가운데
원래 유교 사상과 유교 교육은 중국식의 군주 체제에 있어서는 국왕이 지식인들로부터 충성심을 획득하고 이들의 학문과 자기 수양을 정치적으로 무해한 것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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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현상은 무사 계급을 교화하여 순종적인 관료 제도로 바꾸기 위하여 유교를 이용한 일본의 토쿠가와 막부 시대에서도 전개되었다.
- 제임스 팔레,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가운데
지배하기 위한 만들어낸 말이나 생각, 곧 이데올로기.
구름이 떠다니고 햇살이 비치는 하늘이나
사람이 걸어다니고 나무가 자라는 땅이 아니라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식의 하늘과 땅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물
상상한 것에 실재하는 인간을 대입시켜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용
지배 이데올로기로써의 유교
대한민국의 경우도 학문이나 학자 등이 주로 하는 일은 지배를 위한 수단을 제공하고 지배를 정당화
(중국)시한황조...서기전 140년 우띠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똥종수는 이론적으로 대통일을 수호하기 위한 과업, 즉 봉건 전제주의 정권에 이바지하는 사상체계의 수립을 제기하였다. 우띠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유학 이외의 모든 학파들을 금지시키고 유학만을 존숭하고 유학에 정통한 사람만이 벼슬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부터 유가경전이 학자들의 주요 교재가 되었고 유가학설이 통치를 위한 사상이 되었다. 똥종수는 사회현상을 자연현상에 비유하면서 봉건사회에서의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영원한 자연적인 질서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 윤내현, <중국사 1> 가운데
지방 향리사회도 권력내에 끌어들여 중앙과 지방, 정부와 민간이 일체화해야 비로소 국가는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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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상으로 이 완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 유학의 진흥이었다. 왜냐하면 가족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사상은 가족생활을 기본단위로 하여 구성되었던 당시 사회관계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유교를 축으로 하여 지방 향리사회를 그 내면에서 장악하려 하였다.
전한 무제시대에 동중서의 제의에 근거하여 오경박사를 투고 태학을 설치했던 것은 이에 대한 획기적인 일보였다. 그 제자들[學生]은 처음에 50명 정원으로 발족했지만 이후 100명, 200명으로 증가하고 전한 말 성제(成帝, 재위 B.C.33~7) 때에는 1천명의 정원으로 급증하였다. 후한에 들어서자 더욱더 증가하여 질제(質帝, 재위 145~146)시대에는 태학에 유학하는 자가 3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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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을 마친 자는 성적에 따라 직책을 주어 임관시켰다. 결국 이것은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일종의 관리양성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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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거제도도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정착해 갔는데 후한 초기 이래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효렴과孝廉科였다. 효행·염결廉潔이라는 유가적 덕목이 강조된 과가 가장 명예로 여겨지게 된 것은 광무제의 의향에 의해서였다. 요컨대 지역사회에서 덕행의 소지자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을 중앙의 관리후보자로 선발했기 때문에 사실상 중앙정권이 해당인물뿐 아니라 출신지역 전체를 권력 안에 조직하는 구조였다.
이렇게 하여 중앙과 지방, 정부와 민간은 무력이나 법률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덕의 힘에 의하여 서로 내면적으로 결합해 갔다. 이 두 세계의 일체화야 말로 한왕조를 정당화하고 동시대인으로 하여금 한왕조를 영원한 국가로 믿게 하는 근거였다. 천하는 모두 유교이념에 기초한 고도의 문명에 흡수되어 이른바 예교세계禮敎世界가 출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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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에 학문은 국가권력과 결합되어 있었다. 국가권력에서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고 이에 의하여 국가권력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학문은 담당하였다. 이러한 학문이란 바로 유학이었다.
- 이근명, <중국역사 상권> 가운데
사대부층에 의해 요청된 유학은 그 기본적 성격인 통경치용(通經致用)의 학, 즉 송대의 현실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지도원리를 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창조적 해석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유교는 송대의 문신관료지배의 확립, 비약적으로 성장한 경제규모에 대한 효율적 운영, 서민적인 신문화의 보급 등 이른바 ‘근세적’ 사회에 적합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념적 차원에서 방향설정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또한 ‘정학’은 이러한 유교의 내적 쇄신과 병행하여 당시까지도 실질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점해 온 도교와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배불로排佛老의 자세를 넘어서는 유교 우위의 확고한 주체성의 확립이 필요하였다.
- 이범학, '송대 주자학의 성립과 발전',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Ⅲ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가운데
명 태조는 학교제學校制와 과거제를 정비하고 전통적인 유교적 정치이념의 회복을 표방하였으나 그것은 <맹자(孟子)>의 ‘역성혁명설’과 같은 통치측에 위험이 될 만한 요소는 모두 배제시킨 것이었다.
- 최정연, '명(明)조의 통치체제와 정치',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Ⅳ-제국질서의 완성>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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