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은 어른의 몸속에는, 부모에게 반항하면 처벌받을 것이라는 어린 아이의 불안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그 불안은 계속 몸속에 잠재해 있다. 그러나 일단 의식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불안은 점점 해소된다.
-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 -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운데
나보다 힘센 자에게
그가 부모든 누구든 그에게 반항하면 처벌 받고
처벌 받으면 몸과 마음에 고통이 남게 되지요
인간이란 게 고통을 피하고 싶기 때문에
처벌 받지 않기 위해서 순종하게 될 거구요
부모란 존재가 때론 참 잔인한 존재여서
처벌의 방법으로 사랑을 주지 않고 무관심하게 자식을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사랑을 받으려면 부모의 뜻을 따르거나
부모가 좋아할만한 일을 하려고 애를 쓸 거구요
그런데 자식도 인간이어서 타인의 욕망에 맞춰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러다 보면 또 반항을 하게 되고 그러면 또 처벌이 뒤따르게 되지요
처벌 뒤엔 고통이 남게 되구요
이제부터 자식의 마음은 고통을 피하는 길에 쏠려 있습니다
고통을 일으킬 수 있는 것과 연관된 무엇이 마음에 떠오르면
마음은 불안을 일으키지요
마음이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다시 고통 받을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숙제를 하라고 하는데 친구들과 노느라 숙제를 못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엄마가 화가 나서 자식의 등짝을 때렸다고 하지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숙제가 더 중요하다는 엄마의 말이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됐지만
엄마에게 대들면 더 맞기만 할 것 같아 손바닥 몇 대 맞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하지요
열 받고 억울 했지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식이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부 사세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하지요
그러자 자식의 마음은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불안이 시작된 거지요
숙제 하라는 엄마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두부 사세요'라는 소리 때문에 불안이 시작된 겁니다.
왜 그런가 가만히 따져 보니 몇 해 전에 그 아프고 억울한 사건, 곧 엄마가 나를 때렸을 때
마침 집 밖에서 '두부 사세요'라는 소리가 났던 겁니다.
사랑 받고 싶은 엄마,
하지만 날 미워하고 때리는 엄마,
'두부 사세요'라는 소리 등이 마음에 크게 남았던 거죠.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두부 사세요'라는 소리가 하나의 신호가 되어 당시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고
고통이 기억되자 불안이 일어난 겁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숙제도 없고 때릴 엄마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 우연히 들었던 '두부 사세요'가 연결고리가 되어 불안이 일어난 거지요.
관군은 여가閭家에 방화하면서 입성하여 닥치는대로 살육하였다. 서남 쪽의 봉기군은 남김없이 사로 잡혔다. 사로 잡힌 수는 2,983명이었으며 이 중 10세 이하 남아 224명, 여자 842명을 제외한 장정은 1,917명이었다. 이들은 23일 모두 효수되었다. 이로써 119일 만 4개월 여에 걸친 난은 종식되었던 것이다.
- 정석종, '홍경래난', 변태섭 외,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下> 가운데
앞의 글은 조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조선인들을 잡아 죽이고, 1,917명의 목을 벤 뒤 공개적으로 전시했다는 겁니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 목을 벤 뒤 전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죽임 당한 사람 때문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때문에 효수를 하는 걸 겁니다. 효수 뿐만 아니라 공개처형이나 태형 또는 망신주기 등도 비슷한 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까불면 죽는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지요.
반란을 일으켰다 잡혀서 사형 당하고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본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는 일이 아닌데도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혹시라고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리고 그 속마음에는 부모에게든 누구에게든 자신이 직접 겪었던 폭력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달라도 힘센 가해자와 힘 없는 피해자라는 관계는 똑같지요.
만약 내가 아버지한테 대들었다가 몽둥이로 맞은 경험이 있으면, 경찰이 들고 있는 진압봉을 보기만 해도 불안이 일어날 겁니다. 불안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진압봉을 보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피하거나 진압봉이 나를 때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경찰이 나를 때리지 않게 하려면 내가 국가나 지배자에게 대항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아야겠지요. 내가 내 마음을 검열하는 겁니다.
지배자에게 대항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폭력, 처벌, 경찰, 진압봉 같은 것들이 떠오를테고, 그런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테니까요.
처벌을 당했던 그래서 고통의 경험을 갖게 된 사람이 지배자에게 보다 순종적으로 되고, 작은 말 한마디에도 벌벌 떨게 되겠지요. 떤다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처벌과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과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는 걸 거구요.
내가 반정부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사장에게 바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지배자에게 저항을 하고
지배자들이 폭력과 해고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
내 마음 또한 떨리고 긴장 됩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정부와 사장에게 불만이 있었거든요
이런 마음을 갖고 나도 저들처럼 저항을 했다면 두들겨 맞거나 짤렸을 거라는 생각도 들 수 있구요
저항을 하지 않아도 처벌을 당하지 않아도
저항하고 처벌 당하는 사람과 비슷한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 사회 문제를 앞에 놓고도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건
할 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별 생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불안하기 때문에 입을 닫는 것일 수도 있구요
그 불안은 자신이 겪었던 처벌/고통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구요
'사랑.평화.함께 살기 > 생명.인간.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 (0) | 2014.05.14 |
---|---|
순응하는 인간, 가면 쓴 인간 (0) | 2014.05.14 |
불안한 사람 (0) | 2014.05.14 |
지배자에게 매달리는 정서 (0) | 2014.05.13 |
도덕. 자유. 사랑 (0) | 2014.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