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여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남성적 권력’의 존재임을, 다시 말해 ‘남근적’ 존재임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근적 향유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스적 향유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정체성!-을 나르시스적으로 향유한다는 것이다.
‘남근성’을 향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지위건 멋진 콧수염이건 화폐건, 남성적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모든 위치들, 장식들, 도구들을 향유한다는 것이다...남성적 권력을 상징할 수 있는 모든 차별적 자원들을 향유한다는 것, 그리고 차별적 자원들이 바로 ‘남근적 특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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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누리려고 시니피앙을 향유하는 남근적 향유가 진정으로 향유일 수 있을까? 라깡은 남근적 향유가 향유를 흉내 내는 것을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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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향유는 실질이 아닌 어떤 명목성名目性에 대한 향유일 뿐이다. 그것이 향유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어떤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명목적인 사실 자체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목표란 바로 ‘남근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근적 존재가 되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며 마음에 애를 쓴다.
그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서 남근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면, 그에겐 무엇이 주어질까? 아마도 그는 욕망하는 상대의 마음을 뺐을 것이다. 그처럼 마음을 빼앗은 다음엔 다시 무엇이 주어질까?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그 스스로가 ‘남근적 존재’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상대와의 교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는 이름뿐인 위치를 향유한다. 이것이 ‘명목성’의 향유다.
‘남근적 존재’의 위치를 차지한 다음에도 그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불안뿐이다. 그 위치를 상실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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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그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성적 주체로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 이유는 특히 남성이 여성에 대해 스스로를 남근적 존재로 내보이려 하기 때문이다. 즉 남성은 여성의 성보다 오히려 자신의 남근적 성격을 향유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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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이 “성관계는 없다‘고 한 것은, 우리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남근의 성(sex)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롱의 상징적 지위로서 남근 그 자체는 비(非)성적인 것이고, 그래서 비성적인 남근이 각인한 남녀관계도 비성적이라는 것(=성관계는 없다는 것)이다.
- 글 출처 : 이종영, <영혼의 슬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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