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허먼, <트라우마-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플래닛, 2007
대개의 사람들이 잔학 행위에 대응하는 방식은 의식에서 이를 몰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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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잔학 행위는 묻히기를 거부한다. 잔학 행위를 부정하고 싶은 소망만큼이나 강력한 것은 바로 부정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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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 질서의 회복과 개별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 16
무시무시한 사건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큰소리로 외치고자 하는 의지의 충돌은 심리적 외상에서 중심적인 변증법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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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과 은폐 사이에서 주저한다. 마침내 진실이 인정된다면, 생존자들은 회복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은폐될 때가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외상 사건은 언어화된 이야기가 아닌 증상으로 떠오른다. - 16, 17
외상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적 고통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그 존재를 외면하게 만든다. 마치 외상을 경험한 사람이 사건에 대한 재경험과 감각의 마비 상태 사이에서 동요하는 증상을 보이듯이 말이다. 외상의 변증법은 복잡하고 기묘한 의식의 변형을 불러일으키는데...조지 오웰은 이를 이주 사고double think라고 일컬었으며,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학술적으로 명확한 용어를 찾은 결과 이것을 해리dissociation라고 불렀다. 이는 변화무쌍하고, 극적이며, 종종 기괴한 양상을 띠는, 100년 전에 프로이트가 아동기 성학대 경험의 위장된 표현이라고 했던 히스테리아 증상으로 이어진다. - 17
* 정신건강 영역에서 ‘외상trauma'이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4판>에 따르면, 외상이란 심각한 죽음이나 상해를 입을 위험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혹은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하였을 때, 이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 (사건에 대한 재경험 :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회상, 이미지, 생각, 지각, 꿈, 플래시백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외상 사건과 유사하거나 외상 사건을 상징하는 여러 단서에 노출되었을 때 심각한 심리적 고통과 생리적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 17(옮긴이주)
목격자 또한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외상 변증법의 지배를 받는다. 관찰자가 말끔한 생각과 차분함을 유지하여, 그림의 파편 한 조각에 머무르지 않고 그 모든 조각을 다 모아 하나로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본 것을 온전히 전달하고, 이를 다른 이들을 설득할 만한 언어로 전달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목격했던 잔학 행위를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신임이 위협당한다. 잔학 행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발언하는 일은 피해자를 따라다니는 낙인을 스스로에게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대중들은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알게 되지만 그 앎이 오래가는 일은 드물다. 부정, 억압, 해리는 개인의 내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수준에서도 작동한다. - 17, 18
(억압 :) 방어기제. 원본능, 자아,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불안이 나타난다. 자아는 원본능의 표출이나 초자아의 강제에서 발생하는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무의식 수준에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방어 기제가 지나치거나 방어에 실패할 경우 정신 병리가 나타난다. 부정이란 부인하여 왜곡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방어 기제이다.
(억압 :)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원리이자 방어 기제 중 하나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원치 않는 기억, 사고, 정서, 욕망, 소망, 공상 등을 의식에서 제외시키는 자아의 활동
(해리 :)일반적인 경우에 통합되어 있는 의식, 기억, 정체성, 환경을 지각하는 기능이 손상된 것으로 타인과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분리, 지각의 변형, 기억의 손상으로 설명할수 있다. - 18
임상의들은 억압된 생각, 느낌, 기억 등이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소중한 통찰의 순간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러한 순간은 개인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역사에서도 일어난다. 1970년대 여성 운동의 외침은 여성에 대한 폭력 범죄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자각시켰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피해자들은 천천히 비밀을 밝혀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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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오는 힘을 깨달았고, 부정과 억압의 장벽이 들추어지는 순간 해방되는 창조적인 에너지를 목격하였다. - 18, 19
외상 증후군에는 공통된 기본 양상이 있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 또한 공통 경로를 따른다. 회복의 기본은 안전의 확립, 외상 이야기의 재구성, 그리고 생존자와 공동체 사이의 연결 복구에 있다. - 20
1부 외상 장애
1 망각된 역사
심리적 외상은 연구한다는 것은 세계 안에 놓인 인간의 취약성과 인간 본성 안에 놓인 악惡의 가능성을 직면하는 것이다. 심리적 외상은 연구한다는 것은 끔찍한 사건에 관해 증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25, 26
가해자를 편들기는 너무나 쉽다. 가해자는 국외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가해자는 악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보편적인 바람을 악용한다. 반대로 피해자는 국외자가 고통을 덜어 주기를 원한다. - 26
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는 망각을 조장한다. 가해자는 할 수 있는 것이란 다 한다. 은폐와 침묵이야말로 가해자의 첫 번째 방어책이다. 은폐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다면 그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가장 뻔한 부정에서부터 가장 정교하고 고상한 종류의 합리화까지 일련의 인상적인 논쟁을 늘어놓는다. 잔학 행위 이후 우리는 비슷하고 뻔한 사과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 피해자가 과정을 한다, 피해자가 초래한 일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든 이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가해자의 권력이 크면 클수록, 현실을 명명하고 정의하는 그의 특권은 더욱 커지고, 그의 논쟁은 더 완전해지고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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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애초에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여성, 어린아이)인 경우, 그들은 생의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현실의 영역 바깥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들의 경험은 말하기가 금지된 무엇이 된다.
심리적 외상에 대한 연구는 피해자를 믿지 못하거나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이러한 경향과 지속적으로 싸워 나가야 한다. - 26, 27
외상의 실재를 의식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피해자와 목격자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필요하다. 피해자 개인을 위한 사회적 바탕은 친구, 사랑하는 이,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통하여 다져진다. 보다 큰 사회를 위한 사회적 바탕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정치적 운동을 통하여 다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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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운동은 연구자와 환자의 동맹을 정당화하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러한 현상 자체를 부정하기 일쑤인 사회적 흐름에 반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다. 인권 운동이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지 못할 경우, 적극적인 증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다시 망각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다. 억압과 해리, 부정은 한 사람의 의식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 28, 29
히스테리아 연구의 아버지는 위대한 프랑스의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였다...샤르코는 운동마비, 감각 상실, 경련, 기억 상실 등 신경학적 손상을 닮은 히스테리아의 증상에 주목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 그는 증상이 최면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유발될 수도 있고, 경감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를 통하여 이러한 신경학적 증상에 심리적인 원인이 있음을 밝히려고 하였다. - 31
히스테리아 상태의 원인에는 심리적 외상이 있었다. 외상 사건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정서적 반응은 의식의 변형을 일으키고, 이것이 히스테리아 증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자네는 이러한 의식의 변형을 ‘해리’라고 하였고, 프로이트는 이를 ‘이중 의식double consciousness'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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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이어와 프로이트는 불후의 결론으로 남게 될 말을 하였다. “히스테리아 환자들은 기억으로 인하여 고통받는다.”
또한 이 연구자들은 18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외상 기억에 수반되는 강렬한 느낌이 회복되고 언어화될 경우 히스테리아 증상이 경감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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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지독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환자들은 반복적으로 그에게 성폭력, 학대, 근친 강간에 관해 이야기 했다. 기억의 실타래를 따라가면서 프로이트와 그의 환자들은 히스테리아 증상을 촉발한 가장 근래의 상대적으로 작은 경험들 아래 숨겨져 있던 아동기의 주요한 외상 사건들을 들추어내었다. - 33~35
제1차 세계 대전의 재앙으로 심리적 외상의 실재는 또다시 공공의 의식 위로 떠올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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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속에서의 남성적 명예와 영광에 대한 환상은 전쟁이 남긴 여러 폐해 중 하나였다. 참호 안에서 지속적인 공포에 시달린 남성들은 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전멸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협에 억눌렸으며, 집행유예도 없이 동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군인들은 히스테리아 여성처럼 되어 갔다. 그들은 걷잡을 수 없이 울면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들은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이 없어졌고, 자극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기억을 잃었으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정신적 피해가 너무 커서 병원들은 서둘러 이들을 수용해야만 했다. 한 추정에 의하면, 정신 장애의 발병은 영국에서 전투 피해의 4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군 당국은 대중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고를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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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죽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에 받게 되는 정서적 스트레스는 남서에게 히스테리아와 유사한 신경증적 증후군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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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의자의 시각에서, 정상적인 군인이라면 전쟁에서 영광을 누려야 하지, 정서적인 증세를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군인은 절대로 공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외상 신경증을 보이는 군인은 좋게 말하자면 체질적으로 열등한 인간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꾀병을 부리는 겁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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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몇 년 되지 않아, 심리적 외상이라는 주제에 관한 의학적 관심은 다시 희미해졌다. 계속되는 정신과적 어려움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참전 군인 병원 구석의 병실을 가득 채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문명 사회가 잊으려 애쓰는 수치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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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투 신경증에 관한 의학적 관심이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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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일 년 뒤,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아펠과 비비는 전쟁터에서 200일에서 240일을 지내게 되면 아무리 강한 군인이라도 발병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전투에 익숙해진다’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노출 강도와 지속 시간이 발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정도로, 전투의 매 순간은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정신과적 후유증은 전쟁에서 총알과 파편에 상처를 입는 것만큼이나 불가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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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자인 로이 그링커와 존 스키걸...전투의 영향력은 “지우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칠판에 적힌 무엇이 아니다. 전투는 인간의 정신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결정적인 경험이 그러하듯이 사람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 46~55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전쟁을 수행 중인 남성이 아닌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더 일반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1970년대 여성 해방 운동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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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현실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삶의 영역 안에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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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활과 가정생활의 경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욕과 비웃음, 불신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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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는 사적인 삶이 포악성에 붙일 만한 이름이 없었다. 공적 영역에서 이미 잘 마련되어 있는 민주주의가 가정에서의 원시적인 폭정이나 교묘한 독재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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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기에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다이애나 러셀은 가장 정교한 역학 조사를 진행하였다. 무선 표집으로 선별된 9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참여하였고, 가정폭력과 성적 착취에 대한 심층 면접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여성들은 4명 중 1명의 비율로 강간을 경험하였다. 아동기 성학대는 3명 중 1명의 비율로 경함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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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브라운밀러...강간을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성기가 공포를 유발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남성의 발견은 최초의 불의 사용이나 돌도끼의 사용과 함께 선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나는 강간이 중요한 기능을 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 속에 가둬 놓기 위한 의식적인 위협의 고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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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스와 홈스트롬은 ‘강간 외상 증후군’이라고 불렀던 심리적 외상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다. 여성이 학대 도중의 모욕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강간을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따. 그들은 피해자들이 강간 후유증으로 불면증, 메스꺼움, 놀람 반응과 악몽은 물론, 해리와 둔감화 증상을 호소하는 데 주목하였다. 그리고 증상 중 일부는 참전 군인이 보이는 증상과 비슷하다는 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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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로부터 행해진 길거리 강간에 관한 초기의 관심은 지인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에 대한 관심으로 한걸음씩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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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한편의 포악과 예속은 다른 편의 포악과 예속과 같다”고 썼다. 한쪽에서의 외상이 다른 쪽에서의 외상과 같다는 점은 이제 너무나 명백하다. 여성의 히스테리아와 남성의 전투 신경증은 같은 것이다. - 59~65
2
공포
심리적 외상은 무력한 이들의 고통이다. 외상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피해자는 압도적인 세력에 의해 무기력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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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건은 드물게 일어난다고 믿어질 때가 있었다. 1980년, 진단 편람에 처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등재되었을 때, 미국정신의학회는 외상 사건을 “일반적인 인간 경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정의는 부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강간과 구타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성폭력과 가정폭력은 여성의 삶에서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험의 범주 바깥에 있다고 기술할 수 없다. 또한 지난 세기 동안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면, 군인들의 외상 역시 일반적인 인간 경험으로 여겨야 한다. 오로지 운 좋은 자들에게만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다. - 67, 68
외상 사건은 특별하다. 사건이 드물게 발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 삶의 적응 능력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외상 사건은 평범한 불운과는 다르다. 외상은 대개 생명과 신체적 안녕을 위협하거나 폭력이나 죽음과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을 무력감과 공포의 극단에 직면시키고, 파국적 반응들을 유발한다. <정신의학교본>에 따르면,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통제 상실, 붕괴의 위협”에 관한 느낌은 심리적 외상의 공통분모이다. - 68
일반적으로 인간은 위험 앞에서 신체와 정신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정교하고 통합된 반응 체계에 따라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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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반응은 행동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할 때 발생한다. 저항이나 탈출이 불가능해질 때 인간의 자기 방어 체계는 압도당하고 와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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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사건은 생리적 각성, 정서, 인지, 그리고 기억 속에 뿌리 깊고 지속적인 변화를 발생시킨다. 더 나아가, 외상 사건은 건강하게 통합됐던 기능들을 뿔뿔이 잘라낼 수 있다.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사건에 대한 명확한 기억 없이 강렬한 정서를 경험할 수도 있고, 강렬한 정서 없이 사건을 세밀하게 기억할 수도 있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과도한 각성과 과민한 기분이 지속된다. 외상 증상은 그 원천의 사건으로부터 단절되어 제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한다. - 69
50년 후 에이브럼 카디너는 전투 신경증의 핵심적인 병리에 관하여 이와 유사한 용어로 기술하였다. 사람이 공포와 무력감이 압도될 때, “‘조화를 이루고, 조율되었으며, 목적이 있는 활동을 위한 모든 장치가 파괴된다.’ 지각은 부정확해지고, 공포가 침투하며, 판단과 분별이라는 조정 기능은 실패한다......심지어 감각 기관이 기능을 멈추기도 한다...공격적인 충동은 와해되어 상황을 분별하지 못한다...자율 신경계의 기능은 나머지 기관과 조응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 70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치 신경 체계가 현재로부터 단절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한다. 시인인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일상 속에서 살면서도 계속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 속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행동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의 정신과 신경은 여전히 그 전쟁을 위하여 조직되어 있었다. 낸시가 나와 함께 있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정이 되면 내 침대 위에서 폭탄이 터지곤 했다. 대낮에 마주치는 낯선 이들의 얼굴에 죽임을 당했던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힘이 생기는 날이면 할레크 성 뒤의 언덕을 올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을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곳은 미래의 전쟁터로 바뀌었다.” - 70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여러 가지 증상은 세 개의 주요 범주로 구분된다. 이것은 과각성hyperarousal, 침투intrusion, 그리고 억제constricton로 불린다. - 70
과각성
외상을 경험한 뒤, 인간의 자기 보호 체계는 영속적인 경계 태세로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치 위험이 어느 순간에라도 되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생리적 각성은 줄어들지 않는다...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놀라고, 작은 유발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잠을 잘 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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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자인 로렌스 콜브는 베트남 참전 군인에게 전투 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지니고 있던 남성들은 테이프를 듣는 동안 심장 박동과 혈압이 증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실험 중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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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은 범불안 증상과 특정 공포증이 복합되어 고통스러워한다. - 72
(범불안 증상) 여러 가지 사건이나 활동에 대한 지나친 불안을 느끼고 걱정스러워한다. 지속되는 걱정을 조절하기가 어려우며, 긴장된 느낌, 피로감, 집중 곤란, 멍한 느낌, 과민한 기분, 수면 장해 등이 동반된다. - 옮긴이 주
(특정 공포증)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에 직면하게 되거나 그러한 대상 혹은 상황이 예상될 때 심각한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장애이다. 특정한 동물, 곤충, 자연 환경, 혈액, 주사, 교통수단을 비롯하여, 밀폐된 곳과 같은 특정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 이에 해당된다. - 옮긴이 주
다른 사람이라면 성가셔 할 만큼의 반복적인 자극에도,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번 반복되더라도 마치 매번 새롭고, 위험하고, 놀라운 것인 듯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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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사건은 인간의 신경 체계를 재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 71~73
침투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고 오랜 후에도 마치 현재에 계속해서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사건을 반복적으로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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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는 외상이 떠오르게 하는 단서들과 마주치지 않으리라고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일상적이고 안전한 환경이라도 위험하다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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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너는 ‘외상에의 고착fixation on th trauma’이 전투 신경증의 핵심이라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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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너는 “우리가 이 질환에서 마주치게 되는 가장 특징적인 동시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꿈이라고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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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사람들은 위험에 직면해야 했던 상황의 결과를 바꾸고 싶은 환상을 품고 외상의 순간을 재연하기도 한다...강간 생존자인 소하일라 압두알리는 외상 장면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그녀의 결심을 이야기한다.
나를 강간했던 놈들은 이렇게 말했다. “또 여기 혼자 오면 가만 안 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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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곳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밤에 그 길로 가지 않는다는 걸 안다...그런데 내 안의 일부분은 내가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이 나를 이긴 셈이 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욱더, ‘나는 그 길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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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에는 무언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의식적으로 선택한 행동일지라도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위험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강제적 특성이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외상 경험의 이러한 반복적인 침투를 일컬어 ‘반복강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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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인 폴 러셀은 외상의 인지적 경험보다는 정서적 경험이 반복 강박의 추동력이라고 개념화한다. 외상의 재생은 “상해에서 회복되기 위해서 개인이 반드시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반복 강박이 외상 순간의 압도적인 느낌을 다시 체험하고 이를 지배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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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의 재경험은 이렇듯 강렬한 정서적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를 피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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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의 재경험을 피하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잦을 경우, 삶은 의식의 공간을 좁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피하게 만드는 메마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 73~83
억제
한 개인이 완전히 무력해지고 어떠한 형태의 저항도 소용이 없을 때, 그는 굴복의 상태로 들어설 수 있다. 자기 방어 체계는 작동을 완전히 멈춘다. 무력한 사람은 현실 세계의 실제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상태를 변형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상황을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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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강간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소리를 지를 수 없어요.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마비되어 버렸어요....마치 헝겊 인형처럼.”
이러한 의식의 변형은 회피와 둔감화의 핵심...지각은 둔해지고 왜곡되며, 부분적인 마비나 특정 감각의 상실이 나타난다...이러한 지각상의 변화는 냉담함, 정서와의 유리(遊離), 그리고 모든 주도권과 분투를 포기하는 심각한 수동성과 결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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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자동적으로 해리가 되지 않는 이들은 술이나 진정제를 통해 둔감해지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링커와 스피걸이 전쟁 중에 군인들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전투 집단의 패배가 늘어날수록 무절제한 음주가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군인들의 음주는 점점 커져만 가는 무력감과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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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일상적인 자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의식 영역의 억제’ 때문에 외사후 기억 상실이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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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안전감을 형성하고, 커져 가는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해,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제한하게 된다. 두 명의 강간 생존자는 외상 이후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협소해졌는지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혼자서는 어디에도 가기가 무서웠다...내게는 그 무엇을 막아낼 힘이 없다고 느꼈다. 너무나 두려웠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그냥 집에만 있었고, 그저 두렵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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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제 증상은 앞날을 예상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을 간섭한다. 그링커와 스피걸은 전쟁 중에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을 때 군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였다. 군인들은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이 줄어들었고,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방식으로 사고했으며, 행운의 부적이나 징조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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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제 증상은 정서 상ㅌ에 압도되지 않도록 방어하려는 시도를 나타내지만, 그 방어의 대가는 크다. 이것은 삶의 질을 협소하게 만들고 고갈시키며, 결국 외상 사건의 영향력은 영속된다. - 83~91
외상을 경험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균형이다. 재경험과 기억 상실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렬하고 압도적인 느낌의 홍수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가뭄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과민하고 충동적인 행동과 완전하게 억제된 행동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주기적인 전환에서 파생된 불안정성 때문에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느낌과 함께 무력감이 악화된다. - 91, 92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한 군인에게 전쟁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이후 악몽 등의 침투 증상이 갑자기 재발하기도 했다. - 93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내적인 삶과 외적인 활동 범위에 놓인 제한은 음성(陰性)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극적인 성질을 결여하고 있다. 무엇이 빠져있다는 속에 이 증상들의 의미가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억제 증상은 잘 확인이 안 되고, 더욱이 외상 사건이라는 기원은 잊히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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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증상은 외상성 증상이 아니라 피해자의 지속적인 성격적 특징이라고 오해될 수 있다...여기 다시, 아버지에 대한 레싱의 묘사가 있다.
.....아버지의 영혼은 그 전쟁으로 불구가 되었다. 드높은 영혼, 힘, 삶의 즐거움에 관하여 말하던 젊은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친절함과 동정심, 그리고 - 자꾸 떠오르는 한 단어 - 아버지의 지혜...... 내가 만난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는 이 병들고 과민한, 넋 잃은 건강염려증 남자를 쉽게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94, 95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외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 안의 한 부분이 마치 죽어 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가장 뿌리 깊고 고통스러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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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생존자들은 다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신경증적 발병’, 더 많은 자살 사고(思考), 그리고 더 여러 번의 자살 시도를 보고하였다. 강간 이전에 그들은 자살을 시도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대략 5명 중 1명(19.2퍼센트)의 비율로 강간에 뒤이어 자살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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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딘과 하스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는 참전 군인을 연구하면서, 자살을 시도하거나(19퍼센트) 지속적으로 자살에 집착했던 사람들(15퍼센트)의 수가 상당한 수준임을 발견하였다. 지속적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남성들은 심각한 전투에 노출됐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경험에 관한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 심각하고 끊임없는 불안, 우울, 그리고 외상후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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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지나가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생존자는 외상을 결정지은 “전멸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의 추격을 받는다. - 95, 96
외상 사건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가족, 우정, 사랑,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깨진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자기 구성이 산산이 부서진다. 인간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 체계의 토대가 침식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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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관계적인 삶에 대한 손상은 외상의 부수적인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외상 사건은 자기라는 심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애착과 의미의 체계에도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마르디 호로위치는 외상 사건을 일컬어, 세상과 관계하는 자기에 관한 피해자의 ‘내적 도식’에 동화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외상 사건은 세상이 안전ㄴ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는,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가정들을 파괴한다. - 97
아동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양육자가 아동의 개인성과 존엄성에 대해 작으나마 존중하느 태도를 보였다면, 아동은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존중받고 있다고 느낀다. 아이는 자존감을 발달시킨다. - 99
외상 사건은 기본적인 신체적 안녕의 수준에서부터 사람의 자율성을 침범한다. 신체는 침해당하고 상처 입으며 더럽혀진다. 이들은 자신의 신체 기능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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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에서 공격의 목적은 정확히 피해자의 자율성과 존엄을 모욕하는데 있다. 따라서 외상 사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을 파괴한다. - 100
로베트 제이 리프턴이 밝힌 바에 따르면, ‘생존자 죄책감survivor guilt'은 전쟁, 자연 재해, 원폭 피해를 겪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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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은 생존자가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죽음을 목격했을 때 특히 더 심하다. 다른 이들은 불운을 만났다는 앎 속에서 혼자 살아남아 있다면,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재난과 전쟁의 생존자들은 죽어가는 이들의 떠나지 않는 형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그들은 죽어 가는 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소망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전투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은 특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발달시키는 위험 수준을 높인다. 유사하게, 자연 재해에서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생존자를 씻을 수 없는 외상 증후군 속에 남겨 두게 되는 사건이다. - 102
민간 사회의 외상 속에서 사회적 인정과 정의의 문제는 생존자들이 핵심적으로 몰두하는 것 중 하나이다. 재판 체계는 인정과 배상의 공적인 장이다. 그러나 이는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기관이다. 기본적인 인지 수준에서 여성은 법 앞에서 고립되고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다. 여성의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법적 개념 사이의 모순은 너무나 극단적이다. 글 결과 공적인 정의체계에서 여성의 참여는 실제로 배제되고 만다.
여성들은 강간이 이론상으로만 범죄라는 점을 빠르게 학습한다. 실제로 강간 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는 폭력에 대한 여성의 경험치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봤을 때도 강압적일 만한 정도인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따라서 강압의 수준은 꽤나 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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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법적 기준에 따르면 가해자가 극단적인 폭력을 사용했을 때에만 범죄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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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가 자행한 성적 행동의 강요는 강간으로 인정될 수 있는 반면, 아는 이가 자행한 행동은 그렇지 못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강간이 사실상 아는 사람이나 친밀한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므로, 대부분의 강간이 법에 의해서 인정되지 않는 셈이다. 또한 대부분의 주는 결혼에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성적 특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혼인 관계 내에서는 어떠한 강압이라도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의를 추구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더 큰 외상을 불러올 때가 있다. 이는 법적 체계가 강간 피해자에게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까닭이다. 법적 체계는 상호 적대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적대적인 환경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곳은 공격적 논박과 심리적 공격이 신체적 폭력을 대치하는 조직화된 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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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체계는 국가의 우월한 권력으로부터 남성을 보호하지만, 남성의 우월한 권력으로부터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해자의 권리는 강하게 보증하지만, 피해자의 권리를 위해서는 사실상 어떠한 보증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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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강간 피해자들은 정의를 다루는 사회적 기구가 자신들에게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보고, 어떠한 신고나 호소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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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신고되는 강간 범죄는 열 건 중 한 건 이하이다. 강간 사건의 1퍼센트만이 가해자의 체포와 유죄 판결로 해결된다. - 130~132
정치적 속박은 대체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가정 나에서 여성과 아동이 당하는 속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남성의 가정은 그의 성역이고, 그 가정이 여성이나 아이들에게는 감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가정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물리적 장벽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가정은 그곳이 설사 가장 억압적인 곳이라도 창살도 없고 철조망 담도 없다. 대개의 경우 여성과 아이들은 묶여 있지도 않다. 물론 묶이는 일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일어나지만, 탈출을 가로막는 장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벽은 매우 강력하다. 아이들은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의해 속박된다. 여성들은 물리적 강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법적 종속에 의해 속박된다.
속박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와 만성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속박 속에서는 강압적 속성이 있는 특정한 유형의 관계가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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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속이 공적인 정치적 영역에서 일어나든, 성관계와 가족 관계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든 상관없다. 강압적인 통제에 종속되었던 경험은 공통적인 심리적 결과를 남긴다. - 134, 135
가해자의 첫 번째 목표는 피해자를 노예로 만드는 데 있다. 그는 피해자의 삶 구석구석에 독재적인 통제를 행사하면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단순히 동조한다고 해서 그가 만족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가 있으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피해자의 승인이다. 따라서 그는 피해자에게 존경과 감사, 혹은 사랑의 표명을 집요하게 명한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발적인 피해자를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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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전체주의 정신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복종에도, 가장 비굴한 복종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마침내 우리에게 항복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반론자들을 파괴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저항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파괴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의 내적 정신을 사로잡고, 그들을 새롭게 고친다. 우리는 그들 내부의 모든 악과 모든 착각을 불태워 버리고 그들을 우리 편으로 이끈다. 단지 외관만이 아니라, 지심으로, 마음과 영혼까지.” 다른 이를 완전하게 통제하려는 욕망은 모든 형태의 포악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전체주의 정부는 피해자의 자백과 정치적 전향을 요구한다. 노예 가해자는 노예 피해자에게 감사를 요구한다. 컬트 종교의 지도자는 신성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의식(儀式)을 통한 희생을 요구한다. 가정폭력 가해자는 피해자가 다른 모든 관계를 희생하고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가 종속 아래에서 성적으로 만족하기를 요구한다. - 136, 137
가정 안에서는 가해자가 거대한 조직의 일부도 아니거니와, 정식으로 이러한 기법을 지시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기법들은 계속하여 고안되는 것 같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연구에서, 심리학자 레노어 워커는 학대자의 강압적 기법들이 “개인별로 독특하긴 하지만, 놀랍게도 유사하다”는 점을 관찰하였다. - 138
다른 이를 압제하는 기법들은 심리적 외상이라는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시련을 기반으로 확립된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의 힘을 빼앗고, 피해자를 단절시키는 조직적인 기법이다. 이러한 심리적 통제는 피해자에게 공포와 무력감을 주입시키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피해자의 자기감을 파괴시킨다. - 138
공포를 발생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폭력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피해자를 지속적인 두려움 안에 가두기 위해서 가해자가 꼭 잦은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폭력이라는 수단보다는 죽인다거나 크게 해친다고 위협하는 일이 훨씬 더 빈번하다.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피해자를 직접 위협하는 것만큼이나 파괴적이다. 가정폭력의 경우, 피해자가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가해자가 그녀의 아이와 부모, 그녀를 숨겨 주는 친구 누구라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
예측할 수 없는 비일관적인 폭력을 겪게 되고, 변덕스럽고 사소한 규칙을 강요당하면서 두려움은 고조된다. 가해자는 전지전능하고, 저항은 헛된 것이며, 피해자의 인생은 전적인 순종을 통하여 가해자의 너그러움을 획득하는 데 달려 있다고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러한 기법의 궁극적인 귀결 지점이다. 가해자의 목표는 피해자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삶을 허용해 주었다는 감사를 주입시키는 데 있다. 가정과 정치적 속박의 생존자들은 가해자가 죽이겠다고 협박하고서 마지막 순간에 목숨만을 살려 주었던 상황에 대하여 말한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유예가 몇 번 반복되고 나면, 피해자는 역설적이게도 가해자를 마치 구세주처럼 여기게 되고 만다.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데 더하여, 가해자는 피해자의 신체와 신체 기능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피해자의 자율성을 파괴하려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무엇을 먹는지, 언제 잠을 자는지, 언제 화장실을 가는지, 무엇을 입는지를 감독한다. - 139
가정폭력 피해 여성은 부부 강간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매우 잔인한 결혼이었다. 그는 너무 가부장적이었다. 마치 자신이 나와 아이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인 것처럼. 결혼하고서 첫 삼 주 동안, 그는 자신을 하느님으로, 그리고 그의 말을 복음으로 여기라고 말했다. 내가 잠자리를 원하지 않아도 그가 원한다면, 나의 소망은 소용이 없었다. 한번은...내가 원하지 않아서 우리는 호되게 싸웠다. 내가 그를 거부하자 그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나는 항의하고 항변했지만, 그는 아내라면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하면서 화를 냈다. 그때는 잠자던 중이라 그는 나를 몸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나보다 몸집이 컸던 그는 그저 나를 누른 채 강간했다.” - 140, 141
러블레이스는 성매매와 포르노 영화 출연을 강요받으면서 이렇게 격하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처음에는 신이 탈출을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믿음이 흔들렸다. 나는 더욱더 두려워졌고, 모든 것이 무서웠다. 탈출을 시도한다는 생각 자체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전락되었고, 모든 존엄이 벗겨졌으며, 동물로, 그 다음에는 식물로 강등되었다. 내가 가졌던 그 어떤 힘도 사라져 갔다. 오로지 생존하는 것만이 전부가 되었다. 내일을 살아내는 것이 곧 승리였다.
정치적 차이로 감금과 고문을 당한 출판업자이자 문학가인 자바코 티머만...“...투옥된 일년 반 동안, 고문을 당하고 독방에 감금되면서 내 태도에 대해 고심했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완전하게 수동적인 태도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어떤 감정이나 감각도 곧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뜻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논리적인 감정과 감각-두려움, 미움, 앙갚음-을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나는 식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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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이렇게 틀림없이 치명적인 상태에 놓인 사람을 ‘무슬림musulman'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격하된 지점에 도달한 포로들은 음식을 찾거나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구타를 피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시체였다. - 151, 152
속박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의식의 변형에 있어서 숙련가가 된다. 해리의 실행, 자의적인 사고 억제, 사고 축소, 그리고 때로는 완전한 부정을 통해 그들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변형시키는 방법을 학습하였다. - 155
미래에 대한 생각은 포로로서는 견디기 너무나 힘든 강렬한 그리움과 희망을 휘저어 내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들은 의식적으로 주의를 좁히고, 극히 제한된 목표에 집중한다. 미래는 시간 단위 혹은 하루 단위로 좁혀진다.
시간 감각의 변형은 미래를 삭제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점진적으로 과거를 삭제하는 것으로 진행된다...희망과 마찬가지로 기억조차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포로들의 삶은 끝없이 현재만 계속되는 삶으로 격하된다. - 158
주도성은 가해자의 지시 범위 안으로 점점 좁혀진다. 포로는 더 이상 탈출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지, 혹은 어떻게 하면 속박이 더 견딜 만할지를 생각할 뿐이다.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는 신발 한 짝, 숟가락 하나, 담요 하나를 얻기 위하여 계획을 세운다. 양심수 집단은 채소를 조금 기르기 위하여 공모를 꾸민다. 성매매 여성은 포주로부터 돈을 숨기기 위하여 책략을 세운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은 공격이 급박할 때 숨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 160
속박이 지속될수록 협소화된 주도성은 곧 습관이 된다...정치적 반체제주의자인 마우리시오 로젠코프는 수년 동안 속박된 이후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가게 되면서 닥쳐 왔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나오자마자, 우리는 갑자기 모든 문제들에 직면하였다...예를 들면 문고리 같은 우스운 문제들, 나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는 운동 반사가 없었다. 13년이 넘도록, 나는 문고리를 잡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닫힌 문 앞에 서면 사는 순간적으로 난처해졌다.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할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혹은 어두운 방을 밝히는 방법, 어떻게 일하고,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고, 친구를 방문하고, 물음에 답하는지를, 내 딸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 주면 하나의 문제는 다룰 수 있고, 두 개 정도는 다룰 수 있지만, 세 번째 과제가 닥쳐 오면 딸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내 머리는 구름 속에서 길을 헤맨다. - 160, 161
대부분의 상황에서 피해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행동이 감시당할 것이며, 모든 행동이 좌절될 것이고, 실패할 경우 끔찍한 대가가 있다는 것을 이미 학습했을 뿐이다...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피해자는 항상 보복을 예상하면서 환경을 유심히 살필 것이다. - 161
로젠코프는 처벌에 대한 그의 즉각적인 대비 상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끊임없이 움찔댄다. 내 뒤에 누군가가 있다면 먼저 지나가게 하려고 계속 멈추게 된다. 나의 몸은 계속 구타당할 것에 대비하고 있다.” - 161, 162
포로들의 우정은 죽음의 나치 수용소에서도 넘쳐났다. 수용소의 포로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서로 나누고 보호하는 충실한 동료 관계를 바탕으로 ‘안정된 짝’을 맺었던 대다수는 생존할 수 있었던 점이 밝혀졌다. 이 연구는 개인이 아닌 짝이 ‘생존의 기본 단위’였다고 결론지었다.
동료와 유대를 맺을 기회가 없어 고립된 포로들은 가해자와 짝을 맺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가해자와 맺은 짝이 ‘생존의 기본 단위’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해자를 구세주로 여기는 반면, 구조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되는 ‘외상성 애착’이다. 정신분석가이자 경찰관인 마틴 사이먼스는 이것이 ‘심리적 유아기’로의 강요된 퇴행이며, “생을 위협하는 바로 그 당사자에게 매달리도록 피해자는 강요당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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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성 애착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애정 관계라는 고립된 환경 안에서 공포와 유예가 반복되다 보면, 피해자는 전지전능하고 신적인 권위를 지닌 것만 같은 가해자에게 거의 숭배한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의존하게 될 수 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분노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가해자가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요 삶 그 자체라고 여기게 된다. - 163
모든 만남에서 기본 신뢰가 문제가 된다. 풀려난 포로에게는 잔학 행위에 관한 단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가해자, 누군가는 수동적인 목격자, 동맹자, 혹은 구조자라는 매우 제한된 역할만이 존재한다. 새롭든, 오래되었든, 모든 관계에 암묵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느 편이오?’ 피해자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수동적인 방관자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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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된 속박은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를 방해하며 외상의 변증법을 증폭시킨다. 생존자는 강렬한 애착과 겁에 질린 회피의 양 극단 사이에서 동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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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구조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고, 가해자나 공범자로 짐작되는 사람에게서는 갑작스럽게 도망치고, 동맹자로 보이는 이에게는 헌신적인 태도를 보이고, 무관심한 방관자로 보이는 이에게는 분노와 경멸을 드러낸다. 그녀 안에는 다른 이에 대한 어떠한 내적 표상도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작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조금만 실망스럽게 해도 그의 역할을 급작스럽게 바꾸어 버린다. 어찌할 수 없게도, 실수를 위한 공간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뢰를 측정하는 생존자의 가혹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생존자는 관계를 피하게 된다. 그녀의 고립은 자유로워진 이후에도 지속된다. - 164, 165
이러한 압도적인 심리적 상실감은 끊임없는 우울 상태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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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 외상의 주도성 마비는 우울의 무감각함과 무기력감과 혼합된다. 만성적 외상의 애착 파괴는 우울의 고립을 강화한다. 만성적 외상의 저하된 자기상은 우울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을 촉진시킨다. 만성적 외상의 고통스러운 신념 상실은 우울의 무망감과 융합한다. - 167
5 아동학대
성인기에 반복적인 외상을 경험하게 되면 이미 형성된 성격 구조가 파괴된다. 그러나 아동기에 반복적인 외상을 경험하게 되면 성격이 단지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성격을 만들어낸다. 학대적인 환경 속에 갇힌 아이는 끔찍한 적응 과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아이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신뢰감을, 안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안전함을, 끔찍하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통제감을, 그리고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힘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이는 어른이 제공하지 못한 보살핌과 보호를 자신의 힘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를 보살피거나 보호하지 못한다. 아이가 가진 유일한 대처 방편은 심리적 방어라는 미성숙한 체계뿐이다. - 169
증상은 기원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증상은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비밀을 위장된 언어로 전한다. - 170
만성적인 아동기 학대는 공포가 만연한 가족 환경 속에서 발생한다. 이 안에서 건강한 양육 관계는 깊이 파괴되어 있다. 생존자들은 강압적인 전체주의적 통제의 특징을 설명한다. 이들은 폭력과 죽음에 대한 위협과 사소한 규칙에 대한 집요한 강요, 간헐적인 보상, 그리고 고립, 은폐, 배신을 통해 다른 모든 관계를 파괴시키는 수단에 의해 억압받는다. 이러한 통제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하게 자신을 학대하고 방임하는 이들에게 병리적으로 애착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복지, 현실, 혹은 삶을 희생하고서라도 애착을 유지하려고 분투한다. - 171, 172
때때로 아이는 폭력이나 죽음의 위협을 직접 받으면서 침묵을 강요당한다. 저항하거나 발설한다면 가족 중 다른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빈번하게 위협받는다. 형제자매, 가해하지 않는 부모, 혹은 가해자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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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두려움에 더하여, 생존자들은 일관되게 압도적인 무기력감을 보고한다. 학대적인 가족 환경 속에서, 부모가 실행하는 권력은 독단적이고, 집요하고, 절대적이다. 규칙은 변덕스럽고, 비일관적이며, 명백하게 부당하다. 생존들이 말하기를, 가장 두려웠던 점은 폭력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학대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이들은 완전하게 굴복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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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매우 조직화된 처벌과 압제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생존자들이 보고하는 처벌의 방식은 양심수의 경험과 유사할 때가 많다. 많은 이들은 신체 기능에 강압적인 통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강제로 음식을 먹어야 했고, 때론 먹을 수 없었으며, 하제를 사용해야 했거나, 잠을 박탈당했고, 더위와 추위에 지속적으로 내던져졌다. 또 어떤 이들은 옷장이나 지하실에 갇히고 묶이는 등 구금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 172~174
지속적인 위험의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각성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학대 환경에 처한 아이들은 공격의 경고를 탐지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달시킨다. 아이들은 학대자의 내적 상태에 즉각적으로 조율되어 있다. 분노, 성적 흥분, 중독, 해리의 신호를 보내는 가해자의 얼굴 표정, 목소리, 그리고 몸짓의 미묘한 변화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러한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몹시 자동화되어 대부분 의식의 자각 너머에서 발생한다. 아동 피해자는 각성을 유발한 위험 신호를 명명하거나 확인하지 않은 채 이것에 반응하는 것부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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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신호를 감지할 때, 학대받은 아이들은 가해자를 피하거나 회유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많은 생존자들은 오랫동안 말 그대로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들에게 유일하게 안전감을 제공해 주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이었다. 어떤 이들은 가능한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를 끌지 않도록 애썼던 기억을 이야기 한다. 이들은 쭈그려 앉아 몸을 공처럼 웅크린 채 한곳에 얼어 붙어 있거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해야 했다. 따라서 자동적인 과각성의 상태가 지속되더라도 동시에 조용하고 얌전한 채로 내적 동요를 신체적으로 나타내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 결과 학대받은 아이들의 특징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얼어붙은 경계’라는 동요의 상태가 나타난다. - 174, 175
피하는 데 실패할 경우,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학대자를 진정시키려고 한다. 횡포한 규칙이 강요되는 가운데 크게 다치거나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된다. 이 속에서 아이에게 두 가지 모순된 측면이 나타난다. 한 측면에서 이것은 저항은 헛될 뿐이라는 완전한 무력감이 되어 아이들을 억누른다. 많은 아이들은 학대자가 절대적인, 심지어는 초자연적인 힘을 자기고 있고, 자신의 생각을 읽어내며,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을 발달시킨다. 다른 측면에서, 이것은 충실함과 복종의 동기가 된다. 상황을 제어하기 우한 유일한 방식으로 아이들은 ‘착하게 굴려고’ 두 배, 네 배로 노력한다. - 176, 177
아동 학대가 발생하는 가정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이 결코 자연스레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사실을 은폐하고 가족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해자가 강요한 결과이다. 생존자들은 모든 사회적 접촉에 대한 가해자의 질투 섞인 감시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학대자는 아이가 일반적인 또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활동을 방해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체면을 유지하고 사실을 감추라는 요구 때문에 학대 받은 아이의 사회적 삶은 너무나 깊이 제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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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이는 넓은 바깥세상뿐만 아니라,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도 고립되어 있ㄷ. 아이는 자기 안의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어른이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것은 물론, 보살필 책임이 있는 다른 어른들마저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매일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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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운명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끼며, 어쩌면 학대 자체보다 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 176, 177
매일같이 적의, 무기력, 무관심의 단서를 마주하면서, 학대받은 아이는 부모와의 초기 애착을 지킨다는 근본적인 목적 앞에 모든 심리적 적응 능력을 바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이는 다양한 심리적 방어에 의존한다. 이러한 방어의 덕으로, 학대는 실제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의식적 자각과 기억에서 단절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그것이 실은 학대가 아니었다고 축소되고, 합리화되고, 면죄 된다. 있는 그대로의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탈출할 수도, 현실을 변형시킬 수도 없는 까닭에, 아이는 정신을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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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솔직한 부정, 자의적인 사고의 억제, 그리고 무수한 해리 반응이다. - 178
학대의 현실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아이는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의미 체계를 구축해야만 한다. 불가피하게도, 아이는 자신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현실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고 결론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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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이가 나라면, 부모는 선하다. 악한 것이 나라면, 선해지기 위해서 나만 노력하면 된다. 이 운명을 이끈 것이 나라면, 어떻든 간에 이것을 변화시킬 힘은 내게 있다. 부모의 학대를 유발한 것이 나 자신이라면, 내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부모의 용서를 구하고 그토록 절박하게 필요한 보호와 보살핌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180, 181
분노와 살인적인 보복에 대한 환상은 학대에서 오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학대받은 성인과 마찬가지로, 학대받은 아동은 분노에 차 있으며 때로는 공격적이다. 이들은 갈등을 해결하는 언어적,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고, 늘 적대적인 공격을 예상하면서 문제에 접근한다. 학대 받은 아동에게서 예상되는 이러한 분노 조절의 어려움은 자기 본성이 악하다는 아이의 확신을 더욱 강화시킨다. 매번의 적대적인 대면은 자신이 혐오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점을 확신시킨다. 대개 그러하듯 만약 아이가 학대받았던 위험한 원천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분노를 대치하려 하고 애꿎은 사람들에게 이를 부당하게 이행한다면 자기 비난은 더욱더 악화될 것이다. - 182
(대치) 방어 기제의 한 유형. 사람은 감정을 표현해도 안전한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돌리게 된다. - 옮긴이 주
학대자를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아동 피해자는 뛰어난 성취자가 되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에게 요구된 어떤 것이든 하려고 한다. 아이는 부모를 공감적으로 보살피기도 하고, 훌륭한 살림꾼, 학업 성취자, 혹은 사회적 관습의 전형이 될 수도 있다. 절박하게 부모의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이는 이 모든 과제에 완벽주의적으로 열중한다. - 184
건강한 발달 단계에서 아이는 의존할 만큼 믿음직한 양육자의 내적 표상을 형성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순간에 양육자에 대한 정신적인 표상을 떠올리면서, 확고한 자율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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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이는 내적인 안전감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위안과 위로를 찾기 위해 외적인 자원에 의존하는 면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커진다. 학대받은 아이는 확고한 독립성을 발달시키지 못하면서 절박하고 무분별하게, 의존할 만한 누군가를 계속 찾으려 한다. 낯선 사람에 대한 빠른 애착 형성은 학대받은 아이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아이는 자신을 학대하는 바로 그 부모에게 집요하게 매달린다. - 187
아동기 학대와 자해와의 연결 고리는 현재까지 매우 잘 기록되어 있다. 반복적으로 자해하거나, 충동적으로 신체에 갖가지 공격을 가하는 것은 아동기 초기에 학대가 시작됐던 피해자들에게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해하는 생존자들은 자해하기에 앞서 나타나는 심한 해리 상태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이인증, 비현실감, 마비는 견딜 수 없는 초조함과 신체 공격에 대한 강박을 동반한다. 처음 자신을 해치게 될 때에는 고통이 전혀 발생하지 않기도 한다. 자해는 마음이 진정되고 안도감이 느껴질 때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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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는 자살 시도로 빈번히 오해받기도 한다. 많은 아동기 학대의 생존자들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복적인 자해는 자살 시도와 명백하게 구분된다. 자해는 죽음에 대한 의도라기보다는 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을 완화하려는 시도이며, 역설적이게도 많은 생존자들에게 일종의 자기 보존 방식으로 작동한다. - 191
생존자의 친밀 관계는 보호와 보살핌에 허기져 끌려 다니고, 버림받고 착취당하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구원을 좇아, 생존자는 보살펴 주는 특별한 관계를 약속해 줄 것 같은 강력한 권위를 지닌 인물을 찾는다. 애착을 형성하게 된 새로운 사람을 이상화하면서 그는 지배받거나 배신당할 것이라는 지속적인 두려움을 저지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선택된 구원자는 환상 속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 실패에 실망하면서, 그는 분노에 찬 채 자신이 그토록 찬미했던 바로 그 사람을 모욕한다.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갈등에도 강렬한 불안, 우울, 분노가 유발된다. 경미한 냉대에도 과거의 무정한 방임이, 경미한 상처에도 과거의 계획적인 잔인함이 생존자의 마음 안에 되살아난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고 해도 이러한 왜곡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생존자의 언어적, 사회적 기술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자는 반복적으로 구원, 불의, 배신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강렬하고 불안정한 관계 양상을 발달시킨다.
생존자는 친밀한 관계의 맥락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양육과 보살핌에 대한 간절함은 다른 사람과 자기 사이에 안전하고 적절한 경계를 세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자신을 깎아 내린 채 애착을 형성한 상대를 이상화하면서 그의 판단력은 안개 속에 파묻힌다. 그는 다른 이들의 소망에 공감적으로 반응하고, 습관상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에 권력과 권위를 지닌 인물 앞에서 곧 취약해지고 만다. - 193, 194
많은 생존자들은 이렇듯 자기 보호에 뿌리 깊은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이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상상하지 못한다. 부모, 배우자, 애인, 권위적인 인물의 정서적 요구에 ‘아니요’로 응한다는 것은 실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과거 가해자의 소망이나 요구를 계속 돌보아 주거나, 관계 사이에 한계를 두지 않고 핵심적인 침범을 계속 허용해 주는 성인 생존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성인 생존자는 병에 걸린 학대자를 간호하고, 역경에 처한 학대자를 방어하며, 극단의 사례에서는 그들의 성적 요구에 계속 따르기도 한다. - 195,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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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진단 기준
만성적인 외상을 경험한 이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겪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호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호소는 이해받지 못한다. 이들이 약물 조제서를 수집한다는 것도 실제로 있는 일이다. 하나는 두통용, 다른 하나는 불면증용, 또 하나는 불안용, 그리고 우울용. 잘 듣는 약이 있을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기저의 외상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호자들도 좀처럼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이 만성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에게 질려 버렸다. - 206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외상에 뒤따르는 증후군에는 그만의 이름이 필요하다. 필자는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complex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이름을 제안한다. 외상에 대한 반응은 단일 장애의 범주로 분류하기보다는 연속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 206, 207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하여, 50~60퍼센트의 정신과 입원 환자와 40~60퍼센트의 외래환자는 아동기에 신체적 혹은 성적 학대 혹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정신과 응급실 환자에 관한 연구에서, 70퍼센트는 학대의 과거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동기 학대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기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211
경계선 환자들은 혼자 있는 것을 너무나 어려워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과도하게 경계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크나큰 두려움으로, 다른 쪽에서는 지배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들은 매달림과 피함, 비굴한 굴복과 성난 배신의 극단 사이에서 동요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경계를 세우지 못한 채, 이상화된 보호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초기 아동기에 심리적 발달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불안정성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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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성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호자와의 안정적인 관계에 관한 정신적 심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따라서 스스로를 안심시키거나 위로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 215
경계선 성격 장애에 관한 필자의 연구는 대부분의 사례 안에(81퍼센트) 놓인 심각한 아동기 외상의 과거력을 기록하였다...학대가 시작된 연령이 어리고 학대의 심각성이 클수록, 경계선 성격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은 더 높았다. - 217
회복의 첫 번째 원칙은 생존자의 역량 강화에 있다. 생존자는 치유의 창조자이자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은 조언을 제공하고, 지지를 전하며, 도와주고, 애정과 보살핌을 쏟을 수는 있지만, 회복 그 자체를 마련해 주지는 못한다. - 225
한 근친강간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좋은 치료자는 나를 통제하려는 이들이 아니라, 나의 경험을 수용하고, 나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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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럼 카디너에 의하면 치료자는 환자의 조력자이다. 그는 “환자가 자발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환자를 돕는 것”, 그리고 “새로운 통제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을 복귀시키는 것이 치료의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226, 227
치료자는 치료 관계에 들어서면서 사심을 없애고 중립을 유지하며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할 것을 약속한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치료자가 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환자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립’이란 치료자가 환자의 내적 갈등에서 특정한 편을 들거나,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환자의 삶은 환자에게 맡겨겼다. - 228
치료자의 전문적인 중립성은 도덕적인 중립성과는 다르다.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과 일할 때에는 도덕적인 태도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치료자는 범죄의 증인으로서 버텨야 한다는 부름을 받았다. 치료자는 피해자와 함께 단결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 한다. 이것은 피해자는 항상 올바르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상 경험의 밑바탕에 불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이해하고, 정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해결책을 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확신은 치료자의 일상적인 치료 작업과 언어를 통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피하거나 위장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하겠다는 그녀의 도덕적인 전념을 통하여 표현된다. - 228, 229
치료자는 지적인 동시에 관계적이어야 한다. 치료자는 환자의 통찰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환자와 공감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 229
나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일하는 헨리 크리스탈은 “신의 역할을 맡으려는 치료자의 충동은 그것이 병리적인 만큼이나 도처에 널려있다”고 말하였다. 정신분석학자인 존 말츠버거와 댄 부이도 경고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자기애적 덫은, 모든 것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는 열망이다...” - 241
사회복지사인 사라 헤일리는 참전 군인들과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 한다. “치료자는 먼저, 자신의 가학성에 직면해야 한다. 환자를 대하는 반응에서는 물론이고, 그/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학성도 직면해야 한다. 극도로 심한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거나 가학성을 드러내는 것이 공공연하게 허용되고 조장되는 환경에 처하게 되면 자기 또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음을 치료자는 알고 있어야 한다.” - 244
컨버그에 따르면 경계선 환자의 내면세계에서 “행위자를 확인하는 것”은 치료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치료자는 환자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하여 역전이를 안내자로 삼는다. 환자의 내적 삶에 형상화되어 있는 행위자의 대표적인 짝으로는 ‘파괴적인 나쁜 유아’와 ‘처벌적이고 가학적인 부모’, ‘원치 않는 아이’와 ‘무관심하고 자기중심적인 부모’, ‘결함이 있는 무가치한 아이’와 ‘경멸하는 부모’, ‘학대받은 피해자’와 ‘가학적 공격자’, ‘성적으로 학대받은 희생양’과 ‘강간범’이 있다. - 247, 248
한 근친강간 생존자가 치료자들에게 조언했다. “지켜보기가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가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할수록,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더 큰 확신을 갖게 되고,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커진다. 변함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내가 그렇게 지독한 외톨이 소녀였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해 주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다.” - 298
치료자는 사실을 발견해 내는 사람이 아니며, 외상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일은 범죄 수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치료자는 열린 마음을 지닌 공감적인 증인이다. 치료자는 탐정이 아니다. - 301
심리 치료의 근간에 놓인 기본 전제는 진실을 말할 때 회복의 힘이 생긴다는 믿음에 있다. - 302
복수 환상은 외상 기억에 대한 거울상일 수 있다. 이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역할이 전도되어 있다. 이것은 외상 기억과 마찬가지로 기이하고, 얼어붙어 있으며, 비언어적이다. 복수 환상은 카타르시스에 대한 소망의 한 형태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을 할 수 있다면 외사의 공포, 수치심,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복수라는 욕망은 완전히 무기력했던 과거 경험에서 솟아나, 이 모욕과 분노 속에서 힘을 회복시켜 주는 유일한 방편이 된다. 복수는 가해자가 과연 어떠한 해악을 저질렀는지를 그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된다.
복수가 평온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복수 환상을 반복하게 되면 외상을 경험한 이들의 고통을 사실상 증폭된다. 생생하고 폭력적인 복수 환상은 본래 외상만큼이나 무서운 심상으로 사람을 늘 쫓아다니면서 각성시킨다. 이로써 피해자의 공포가 악화되고 자기상은 격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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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과정에서, 생존자는 가해자에게 똑같이 갚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안전한 환경에서 분노를 풀어낼 수 있다면 무력했던 분노는 점차 가장 강력하고 만족스러운 형태의 분노로 변화할 것이다. 올바른 분노. 이러한 전환으로 생존자는 가해자와 함께 남아야 하는 복수 환상으로부터 해방된다. 생존자는 범죄자가 되지 않고도 힘이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복수 환상을 포기한다고해서 정의를 달성하는 과제에 실패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제 생존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해자가 범죄에 책음을 지도록 그를 포위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어떤 생존자는 복수 환상을 혐오하면서, 용서라는 환상으로 이 깊은 분노를 전부 우회해 가려 한다. 복수라는 반대의 극단과 마찬가지로 이 환상도 힘을 얻고자 하는 시도이다. 생존자는 자발적이지만 오만하게, 사랑으로 행동하면서 분노를 뛰어넘고 외상의 결과를 지울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혐오든 사랑이든, 이로써 외상을 몰아낼 수는 없다. 복수와 마찬가지로 용서 환상도 가혹한 고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능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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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종교체계 내에서도 신이 내리는 용서는 조건적이다. 가해자가 고백하고 회개하며 복원을 통해서 용서를 구하고 또한 그것을 얻어야만 진정한 용서가 내려진다. - 314~316
한 근친강간 생존자는 가족에게 비밀을 드러낸 이후에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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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고 느끼고 나서야...나는 희망을 느꼈다. 나에게 미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증도 아니고 취한 것도 아니고, 땅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다. 슬플 때 슬프다. 화날 때, 화가 난다. 내가 대면하게 될 나쁜 날들과 어려움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알고, ‘내’가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늘 이 자유를 원했고, 얻기 위해 늘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전투가 아니다. 싸워야 할 누군가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내 것이다. - 334, 335
“‘내’가 있음을 안다.‘ 이 명료한 진술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회복 단계를 상징한다. 생존자는 더 이상 과거의 외상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자기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하고, 외상 사건이 자신에게 무엇을 저질렀는지를 이해한다. 이제 남은 과제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데 있다. - 335, 336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면, 외상이 만들어낸 허위 자기와 절연해야 한다. 생존자가 피해자 정체성을 떨쳐버리면서, 자기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느꼈던 것과 결별할 수 있다. - 337
생존자가 외상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기를 인식하고 ‘놓아 버릴’ 때,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은 더 쉬워진다. 성격에 입은 손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면, 그 손상을 인정하는 일은 보다 쉬워진다. 삶을 다시 세우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외상을 경험했던 자기의 기억을 보다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338
다른 이들에게 베푼다는 것은 생존자 임무에서 핵심되지만, 이를 실천하는 이들은 스스로 치유되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생존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보살핀다. 거처가 없는 참전 군인을 위한 쉼터와 재활 프로그램의 감독자인 참전 군인 켄 스미스는 “인간 영혼이 서로 연결되면서” 일을 지탱해 가고 영감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 346, 347
생존자 임무는 정의를 추구하는 형태를 띠기도 한다. 세 번째 회복 단계에서 생존자는 가해자를 향한 개인적인 원망을 초월한 원칙의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가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개인적인 안녕뿐만 아니라 더 큰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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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범죄는 공동체의 온전함을 방해하고, 공동체를 중대한 위험에 빠뜨렸다. 그러므로 가해자는 정의 앞에 세워져야 한다....수리해야 할 것은 국가 그 자체이며, 복구해야 할 것은 톱니바퀴가 어긋나 버린 공공질서이다...다시 말해서, 이겨야 하는 것은 원고가 아니라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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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화 혹은 고발을 통하여 생존자는 자신을 침묵시키고 고립시키려 했던 가해자의 공격에 도전하고, 새로운 동료를 찾을 가능성을 열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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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엘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지지하면서 얻은 승리감을 이야기했다. “...여성을 존경으로 대하도록 이 체계를 작동시키는 것,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위한 체계를 작동시키는 위해...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우리를 위해 일한다. 이들은 뒤떨어져 있거나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원칙에 입각하여 이를 작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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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투쟁에 참여하기로 선택한 생존자는 승리란 필연적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가해자와 대면하려는 의지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외상의 가장 끔찍한 결과를 극복해 낸 셈이다. 두려움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가해자에게 알렸으며, 가해자의 범죄를 사람들 앞에 드러냈다. 회복은 악을 이겨 냈다는 착각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회복은 악이 전적으로 승리할 수 없었음을, 그리고 회복을 가능케 하는 사랑이 여전히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희망에 기반하고 있다. - 347~350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적인 끈을 회복할 수 있다. 집단만큼 이 경험이 즉각적이고,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공간은 없다. 집단 심리 치료의 대가인 어빈 얄롬은 이러한 경험을 일컬어 ‘보편성university'이라고 한다. 보편성이 담보하는 치료 효과는 수치스러운 비밀로 인하여 고립되었던 사람들에게 특히 깊이 있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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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시련을 거쳤던 이들과 만나면서 고립감, 수치심, 낙인의 느낌이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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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간 생존자 또한 집단에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었던 느낌을 유사한 언어로 이야기했다. “일생 내내 나를 괴롭혀 오던 고립감을 헤쳐 나갔다. 나는 서로에게 아무런 비밀도 없는 여섯 여자들의 집단에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무언가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다.” - 356~358
집단은 개별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넓혀 가고, 가해자에게서 해방되며, 소외되어 왔던 큰 세상이 실은 충만한 곳임을 다시 인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 367
한 참전 군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얻었다. 무언가의 일부라는 게 이리도 좋다.” - 383
나는 전 지구적인 정치적 인권 운동과의 지속적인 연대만이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지탱해 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390
조직적인 정치적 폭력의 후유증으로, 사회 공동체 전체가 둔감화와 침투, 침묵과 재연이 순환하는 덫에 사로잡혀 PTSD 증상을 나타낼 수 있다.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진실에 대해 발언하고, 피해자의 고통이 완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인 장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덧붙여, 남아 있는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별 가해자들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는 조직화된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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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피해자 집단의 무력한 분노는 곪아터져 시간의 흐름조차 이를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선동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분노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으나, 이렇게 고통받은 이들에게 집단적인 복수를 약속하면서 이 분노를 착취할 뿐이다. 외상을 경험한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외상을 경험한 국가 또한 외상을 재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며, 속죄해야 한다. - 397
가해자는 면죄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면(赦免)을 요구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형태의 기억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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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의 공적인 인정과 회복이 없다면 모든 사회적 관계는 부정과 비밀의 부도덕한 역동에 오염된 채 남게 될 것이다. - 398, 399
보다 공공연한 정치적 범죄와 마찬가지로, 가해자들은 자신의 학대가 확실하게 가려지고, 인정되지 않으며, 망각되도록 집요하게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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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방관자들과 마찬가지로, 치료자 또한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한다. 피해자와 함께 서고자 하는 이들은 불가피하게 가면을 벗은 가해자의 광포에 대면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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