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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빵과 장미>를 보고

순돌이 아빠^.^ 2014. 12. 3. 14:20



무슨 영화를 볼까 고를 때 내용을 보기도 하고 배우를 보기도 하지요. 켄 로치의 경우는 감독을 보고 고르는 경우이구요. <랜드 앤 프리덤> <레이닝 스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등 제가 봤던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참 좋은 영화였습니다. 이런 감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지요.


여성이고 노동자라는 거

주인공 ‘마야’는 언니가 있는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합니다. 이민 과정에서 돈을 제대로 주지 못해 브로커들에게 납치 되어 강간의 위험에 처합니다. 강간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거지요. <빵과 장미>에서는 마야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약간은 우스운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진짜 마야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요? 알지 못하는 남자에게 끌려가면서 가졌을 두려움이나 혼란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노동자가 되기 위해 돈과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었는데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마야가 처음 일하게 된 곳은 술집입니다. 많은 남성들이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몸은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몸을 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말로 모욕을 주거나 수작을 거는 것도 흔한 일이지요.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만 하면 되는 거지, 몸을 만지게 허용해야 할 이유도 성적 농담을 주고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말입니다.

술집 다음으로 구한 일자리가 건물 청소부입니다. 이 영화의 주된 등장인물이 이들 건물 청소 노동자들이지요. 대부분 여성이구요.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 영화에 담겨집니다.

마야의 언니 로사는 다른 노동조합 동료들을 배신(?)했고, 몇 사람이 해고 됩니다. 마야는 언니를 찾아가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따집니다. 이때 로사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이야기 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을 위해 성매매를 해야 했으며, 마야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가졌다는 얘기도 하지요. 아픈 남편과 자식들을 둔 여성의 삶이 순간 드러납니다. 저 편하자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았던 거지요.

여성 노동자에게는 경제적 착취와 함께 성적 학대가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렇지요. 한국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 보면 한 병원 원장이 여성 간호사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규직을 시켜 주겠다는 말 때문에 여성 노동자는 학대를 참지요. 남성은 자신이 가진 돈과 힘을 이용해 여성을 괴롭히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거구요. 이게 어디 드라마에만 있는 일일까요?

 

 

 



이주노동자

마야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노동자+여성뿐만이 아닙니다. 이주노동자+불법이라는 것 또한 마야를 괴롭히지요. 마야가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학대를 겪더라도 드러내 놓고 대항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 마야를 불법이민자라고 신고를 하면 추방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주노동자라고 해서, 소위 ‘불법’ 이주노동자라고 해서 다른 노동자들보다 일을 적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불법’이라는 이유가 마야를 힘들게 할 수 있는 거지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합법이지만, 노동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것은 불법일 수 있습니다. 국가들이 그런 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이주노동자라는, 그러니까 내국인 노동자에 비해 힘이 약한 노동자들을 더 많이 착취하고 더 쉽게 해고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불법이면 더 그럴 거구요. 노동자의 힘이나 지위가 약하면 약할수록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 고분고분하게 만들려고 할 거구요.

한국 영화 <카트>에서도 그랬듯이 <빵과 장미>에서도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합니다. <카트>에서 그렇듯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돈으로 꾀어내거나 경찰을 투입해서 노동조합을 못 만들게 하지요. 먹는 음식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른데 자본가와 국가가 하는 일은 왜 이렇게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국적의 차이보다는 자본가라는 사회적 위치의 동질성이 더 큰 가 봅니다. <카트>의 여사님들과 마야의 처지가 비슷하듯이 말입니다.

 

 



돈과 인간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자본가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듯이 말입니다. 서로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기는 같은데 받는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자본가들은 회장님이니 사장님이 하면서 기사 딸린 차타고 다니면서 맛난 것 먹고 저 하고 싶은 말하면서 살지요. 여기에 비해 노동자들은 <빵과 장미>에서처럼 허리 굽혀 일하고, 관리자 앞에서는 주눅 들고, 언제 짤릴지 몰라 조마조마하지요. 임금이라고 받은 돈으로 어디 편하게 살 수 있나요. 그저 한 달 한 달 생활을 이어가기에 바쁘지요.

우리가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데 사장이 우리 보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모욕을 준다고 해 보지요. 정말 돈만 벌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일까요? 승진이나 임금을 미끼로 여성 노동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면 정말 돈만 벌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일까요? 돈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것까지 노동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겁니다.

노동자는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이기도 합니다. 자본가와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영혼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으라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기계도 로봇도 아니기에 임금 인상은 물론 학대의 중단과 인간으로써의 존중을 요구하는 겁니다. 자본가가 누군가에게 욕을 먹으면 기분 나쁘듯이 노동자들도 욕먹으면 기분 나쁘거든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줄 세워 놓고 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듯이 노동자들도 불만이 있으면 불만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거든요.

물론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임금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가-노동자라는 관계가 존재하는 한 자본가는 언제나 노동자를 지배·착취하는 존재이고, 노동자는 언제나 자본가에게 지배·착취당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지배하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지배 받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수박에 노란 물감을 칠한다고 호박이 되는 거는 아니지요. 인간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대우 받고 일하며 살기 위해서는 자본가-노동자라는 관계가 자체가 없어져야 하겠지요. 일본이 조선인들을 과거에 비해 조금 덜 괴롭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마야가 일하는 건물 청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건물 청소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보탭니다. 모임을 함께 하고, 거리에서 시위도 함께 하고, 함께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지요.

대학 등록금을 모으고 있던 한 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해고 됩니다. 마야는 그를 위해 편의점을 털어 돈을 건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나 마야는 추방당하게 되지요.

마야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샘과 사랑에 빠집니다. 불법 이주 여성 노동자가 합법 백인 남성 활동가에게 사랑을 느끼는 거지요.


인간이기에 그렇겠지요. 자본가와 국가는 인간을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노력을 하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요. 자본가와 국가가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이 세상은 금방 지옥이 되겠지요. 세상 모든 것이 지배와 착취 밖에는 없을 거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지닌 노동자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나마 덜 삭막하고 그나마 작은 변화라고 꿈꿔 볼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자본가의 지배가 아니라 노동자의 사랑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