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날 영화나 한 프로 땡길까 싶었습니다. 무슨 영화를 볼까 하는데 문득 <나폴라>라는 영화가 떠오르더라구요. 독일 파시스트들이 교육을 통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라의 감독 데니스 간젤의 영화를 한 편 더 보자 싶어 <디 벨레>를 선택했습니다. 벨레는 독일어로 물결이라는 뜻이라네요.
규율과 지배
영화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고등학교에서 ‘독재정치’에 관한 수업을 하게 되는데, 교사가 독재 정치가 어떻게 펼쳐지게 되는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를 합니다. 학생들은 독일에서 다시 독재정치가 펼쳐질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만, 정작 교사가 조금 끌어당기자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무리 짓고, 무리를 키우고, 무리 밖의 사람들과 싸우는 일이 벌어지지요. 함께 무리 짓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배척하기도 하구요.
교사를 지도자 삼아 존칭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손동작으로 인사를 하고, 문양을 만들어 자기 무리의 상징으로 삼고 등등의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교사가 체험을 해 보는 정도로 생각을 하고 시작한 일이 점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임으로써 나중에는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지지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 벌어지는 겁니다. 독재정치를 체험해 보는 수준을 넘어서 점점 학생들이 변해가는 거지요.
한국 사회에서 보면 영화 속 학생들의 모습이 낯설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엔 학생들이 그냥 교사의 이름을 부릅니다. 독재정치를 체험하기 위한 규율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000선생님처럼 존칭을 붙이지요. 한국 사회 같으면 싸가지 없다고 욕 을 일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도 자유롭지요. 독재체험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독재체험을 하고 나서야 할 말 있는 사람은 손을 들고 선생님이 말하라고 하면 앉아서가 아니라 일어서서 말하지요. 교복 같은 것은 없습니다. 독재체험을 하면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지요.
한국에서 학생들의 삶은 규율로 지배로 가득합니다. 옷 입는 것, 말하는 것, 머리카락의 길이는 물론이요 상대를 부를 때 쓰는 호칭 등 온통 규율에 따라야 합니다. 심지어 조폭들이나 하는 ‘눈 깔아’ 식의 눈빛에 대한 통제가 가족과 학교 안에 가득하지요.
작은 불씨
교사 라이너가 독재체험이라는 작은 불씨를 던지자 불은 순식간에 학생들의 가슴에 큰 불을 일으켰습니다. 독재체험이 끝났다고, 이제 벨레는 해체한다고 하자 이를 거부하고 자살까지 한 팀의 경우는 그 불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지요. 팀을 비롯해 학생들의 가슴에 쉽게 독재의 불길이 타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른 풀에 불길이 잘 일어나듯이 그들의 마음이 외롭고 메말라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가족 안에서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하기 쉽고, 누군가와 마음 깊은 관계를 만들지 못한 인간들이 늘 외롭게 떠돌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 인간들에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 내가 어느 무리에 속해 있고,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큰 울림이 되었던 건 아닐까 싶네요.
학대 받으며 자란 인간이 누군가 조금만 잘 해 주면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듯이, 외로운 마음에는 누군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몰입할 수 있는 동기가 되겠지요.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말입니다. 그것이 나를 파괴하고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영화 <풀 메탈 자켓>에는 훈련소에 입소해 군인으로 만들어지는 인간의 모습이 나옵니다. 인종이나 나이, 출신지역, 학력의 차이 없이 모두 평등하지요. 영화 속 대사처럼 모두 평등한 쓰레기일지라도 말입니다.
국가 앞에 서면, 민족 앞에 서면 모두 평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설사 쓰레기 취급을 받는 평등일지라도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열심히 외치며 우리는 하나라는 흥분을 느낀 다음날, 회사에 가서 같은 한국인들의 지시와 명령을 받으며 기계처럼 일해야 하지요. ‘대~한민국’을 외칠 때 하나였던 것처럼, 회사에서는 일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하나 되는 거지요. 닭장 속 닭들이 모두 하나이듯 말입니다. 달걀을 가져가는, 닭들을 지배하는 주인은 따로 있구요.
지배하는 자가 따로 있는 상황에서, 피지배자로써 하나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무리를 짓고, 같은 무리라는 이유만으로 감싸고도는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디 벨레> 속 카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카로는 왜 우리가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하일 히틀러’를 닮은 손인사를 하며, 단지 벨레 구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욕을 먹고 따돌림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벨레의 문제를 지적하지요. 카로의 애인까지도 카로를 나무라지만 카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모두 오른쪽으로 가야한다고 할 때, ‘아니야 왼쪽으로 가야해’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왼쪽 길이 좋은 것 같지만,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보통의 우리 모습이지요.
독일이 아니라 한국에서 다시 독재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니 독재 정권이 들어서느냐 마느냐보다도 그런 정권을 지지하고, 그런 독재자에게 환호를 보내는 국민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다시 만들어질까요?
어쩌면 이미 우리는 맹목적인 환호와 적개심으로 가득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일본 제국주의가 싫고 독일 파시즘이 문제라고 하면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거나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사람들을 거칠게 비난하듯이 말입니다. 국가가 미워하라고 지시한 대상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낙인 찍히고 공격을 받듯이 말입니다.
국가와 정치, 교육과 인간의 마음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한 좋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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